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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시티 마을 주민들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집에서 만든 물건들을 펼쳐놓고 장을 열고 있다.
 슬로시티 마을 주민들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집에서 만든 물건들을 펼쳐놓고 장을 열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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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리 주민들이 맛있는 국수를 준비하고 있다.
 상중리 주민들이 맛있는 국수를 준비하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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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거 오디죠?"
"아녀, 오디게여, 오디게"
"뽕나무 열매 아니에요? 오디?"
"그려 뽕나무 열매, 오디게!"

지난 11일 조용하던 충남 예산군 대흥 의좋은형제 공원에 20여 개의 천막이 쳐졌다. 농촌의 마을들이 그렇듯 이마를 대고 이웃한 천막에는 대흥면내 17개 마을의 팻말이 달리고, 대흥장이 '드디어' 섰다.

40년 만에 선 장, 온 마을이 들썩였다

오전 11시부터 시작한다고 분명히 알렸건만, 없어진 지 40년도 넘은 대흥장이 다시 선다는 소식에 들뜬 주민들이 새벽 6시부터 모여들었다. 행사를 준비한 예산대흥슬로시티주민협의회(회장 최동헌, 이하 주민협의회)는 상상을 넘어선 주민들의 호응에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나와 자리를 안내하고, 장은 결국 계획보다 1시간 더 일찍 시작됐다.
 
내 동네 천막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은 할머니들의 앞에는 서너가지씩 바리바리 싸갖고 나온 물건들이 함함하다. 텃밭에서 키운 마늘쫑, 감자, 양파, 마늘, 무…, 뒤란에서 베어온 머위대, 앞마당 나무에서 딴 청매실, 봄내내 캐어 모았다 쪄내온 쑥개떡, 지난 가을 수확해 잘 말려뒀다가 전날 방앗간에서 갓 짜온 고소한 들기름, 김장 때 담갔던 짠무, 이른 새벽마다 꺾어다 데쳐 말린 고사리…. 물건들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주인의 무릎 넓이를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양이 적다.

농사를 지을 줄만 알았지, 단 한 번도 장에 내다팔아 본 적이 없는 초짜 장사들이 태반이다. 오히려 도시에서 온 소비자들이 고수다.

"이거, 조선마늘쫑이네."
"야, 겁나게 맛있유."
"얼마에요?"
"한단 2000원에 가져가유."
"에이, 두단 3000원에 줘요."

대답할 겨를도 없이 마늘쫑 두단이 깍쟁이 주부의 손에 들려있다. "나도 일행이니 같은 가격으로 줘요" "지난번 장끔(예산오일장 가격)에 맞춰서 받는건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부르는 값은 어디가고 건네는 돈이 가격이 된다.

장 운영에서 가장 신경 쓸 부분은 반드시 마을 생산물들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협의회는 사전에 대흥면내 17개 마을 이장과 부녀회장을 모아 놓고 "직접 농사 짓지 않은 물건이 하나라도 판매되면 그 마을에 책임을 묻고 참여를 제한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단단히 약속을 받았다. 이날 장에 나온 물건들은 각 마을 부녀회장에게 신고된 것들에 한했다.

박효신 사무국장은 "이건 반드시 지켜야 할,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소비자들이 슬로시티 장터에 와서도 원산지가 어디인지 의심해야 한다면 말이 되느냐. 또 주민들에게 이 장터는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다. 슬로시티 주민으로서, 농민으로서 자부심을 갖는 과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드라마 ‘산너머 남촌에는’에의 무대이기도 한 은자네가게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드라마 ‘산너머 남촌에는’에의 무대이기도 한 은자네가게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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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기차기 맘처럼 안되네’ 대회 참가자들이 열심히 제기를 차고 있다.
 ‘제기차기 맘처럼 안되네’ 대회 참가자들이 열심히 제기를 차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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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타기, 널뛰기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
 그네타기, 널뛰기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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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좋은 형제의 초가집 방안에서 짚공예와 바느질공예 체험이 한창이다.
 의좋은 형제의 초가집 방안에서 짚공예와 바느질공예 체험이 한창이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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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서 나오는거 아니면 안 돼유"

장터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장구경 나온 남자들의 술추렴. 마을 부녀회가 운영하는 먹거리 천막 아래에 손님들이 북적인다. 막걸리와 부침개, 두부김치. 단촐한 메뉴에도 술잔은 넉넉하게 돌아가고, 일면식이라도 있으면 죄 불러들이니 앉을 자리가 없어 먼저 온 순서대로 자리를 털게 된다.

마을의 젊은 남자들은 한쪽에서 제기차기 대회를 진행한다. '전국의 제기차기 고수들 다 모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제기를 만들고, 차는 이색행사를 벌인다.

아이들은 곳곳에 마련된 체험장에서 떠날 줄 모른다. 고려시대에 살았다는 이성만, 이순 형제의 집을 재현해 놓은 초가에서는 각각 짚공예와 바느질공예가 진행된다. 앞뒤가 탁 트인 방안은 물론이거니와 툇마루에 걸터앉기만 해도 초여름의 더위에서 해방된다. 공예를 진행하는 마을 어르신들이나 체험하는 아이들이나 표정이 여유롭다.

뻥튀기 소리가 요란하다. 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모여 줄을 선다. 한봉지에 1000원짜리 쌀뻥튀기가 금세 동이 나고 미처 못 받은 사람들은 다시 흩어져 장구경에 나선다. 뻥 튀는 소리야 장 어디에서나 들리니 다 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학생수가 30명 안팎인 대흥초등학교와 대흥중학교 학생들이 벼룩시장을 열었다. 옷과 인형, 신발, 문방용품 등 재활용장터다.

말 그대로 대흥면의 남녀노소가 참여한 행사다. 처음에 장이 선다는 소식을 듣고 "그게 되겠느냐"며 의아해 하던 주민들인데 무려 200명이 넘게 나와 진행한 것으로 집계됐다. 

"대흥서 하는 행사니께. 구경도 할겸 겸사겸사 왔지."

의좋은 형제 ,두사람의 집에 마련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어르신들.
 의좋은 형제 ,두사람의 집에 마련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어르신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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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흥초등학교 어린이가 꼬마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벼룩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흥초등학교 어린이가 꼬마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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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론가 뭔가 좋네, 장이 다 서고"

이날 대흥초등학교 운동장과 인근 공터에 마련해놓은 임시주차장에는 승용차들이 꽉차게 들어섰다. 수도권에서 관광버스도 왔다. 방문객은 연인원 1000명을 훌쩍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주민협의회는 오는 20일 평가회를 가질 계획이다. 처음이다 보니 많은 문제들이 지적될 것으로 보인다. 판매물품의 다양화, 판매가격의 적정성, 체험프로그램  운영, 마을투어 안내 등등.

다행히 사전에 부녀회장들을 통해 알아본 주민 만족도는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판매수익 때문이라기보다는 대흥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다른 문제들이야 하나씩 보완하고 해결해나가면 될 일이다.

"하여간 슬론가 뭔가 한다더니 좋네, 장이 다 다시 서고."

금곡리에서 나온 박순(70) 할머니가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꼭 데리고 장에 다녔어. 그때는 장이 참 푸짐했었는디"라고 말하니 옆에 있던 다른 할머니가 "그때는 저기 신작로가에 장이 섰어. 지금은 변해서 뭐… 대흥이 그래두 옛날에는 군이였댜. 수리조합(예당저수지) 때문에 고립됐지. 깨딱하다가 여기가 장 되것어"라고 받는다.

주민들은 흥했던 대흥의 과거를 추억하며,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는다.

예산대흥슬로시티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뗐다. 중부권 유일의 슬로시티 예산 대흥의 의좋은형제장터는 앞으로도 매달 둘째주 토요일마다 계속 열린다. 제기차기 대회도 계속 된다.

당신을 제기차기 고수로 인정합니다
아버지가 제기를 차자, 아들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고 있다.
 아버지가 제기를 차자, 아들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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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제기차기대회에서 남자부 1등을 차지한 채규칠(63)옹은 멀리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

지난달 덕산에서 열린 향토산업합동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을 왔다가 제기차기 대회 소식을 알게 된 아들 유석(30)씨가 아버지를 모시고 일부러 온 것이다.

부자는 가족부문에서도 289개를 차 1위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유석씨는 11개만 찼을 뿐, 나머지 278개는 채옹이 찬 것이다.

"오늘 우리 아버지 실력발휘 못하신 거예요. 평소에는 500개 이상 너끈히 차시는데…."

대단한 실력에 모두들 놀라워하는데, 유석씨가 한술 더 뜬다. 채 옹의 최고기록은 3017개라고 한다.

매일 아침 운동삼아 제기를 찬다는 채옹은 "제기차기가 건강에 아주 좋아요. 내 얘기가 아니라, 의사가 한 얘기라니까. 특히 고혈압, 당뇨에 좋다는 거야. 다리운동, 배운동이 되니 뱃살이 들어가고"라며 홍보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아들은 왜 안시켰냐고 물으니 "하하, 아버지가 저는 제기차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하셔서…"라고 유석씨가 대신 나선다.

"500개 이상 넘어가면 아버지께서 명상의 세계로 빠지시는 것 같아요. 제기차기 뿐만 아니라, 지금도 평행봉을 하루에 500개나 하시는 걸요"

제기를 잘 차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 의좋은 형제 장터가 정좋은 부자를 만나게 했다.

이날 부자는 두 개 부문 상품으로 12만원어치 교환권을 얻어 장터에서 된장과 사과쨈을 사갔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예산대흥슬로시티, #슬로시티, #의좋은형제장터,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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