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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동화사에 있는 사명대사 초상을 보러 갔습니다. '泗溟堂大將 眞影'(사명당대장 진영)이라 불리는 그 그림은 동화사 조사전 안에 있습니다. 18세기에 지어진 이 건축물의 성격은 이름에 조상 조(祖)와 스승 사(師)가 쓰인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조사전(祖師殿)에는 사명대사만이 아니라 동화사를 거쳐간 여러 역대 고승들의 영정도 모셔져 있습니다.
 
솔직히, 다른 고승들의 초상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의 여행에 종교적 성격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사명당'대장'의 진영을 보러 온 것일 뿐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영남 지역 승군의 총지휘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 바로 동화사이고, 사명대사는 사령부의 지휘자였으니 '대장'이었던 것입니다.
 
할머니,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로 구성된 일가족 여행단이 조사전 출입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안을 들여다 보며 "여긴 뭐야?" 합니다. 이럴 때 쥐꼬리만한 지식을 무기로 문화해설사 노릇을 자임하는 것은 이런 여행의 즐거움 중 한 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사명당대장 진영에 가장 큰 관심을 보여습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일본까지 건너가 포로로 잡혀갔던 3천여 동포들을 구출해온 일로 이름이 높은 고승입니다. 전란 당시 이곳 동화사에서 승병들을 지휘하였습니다. 조사전에 그 분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림을 보면, 사명대사는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흰 장삼을 입고 있고, 그 위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습니다. 1800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인정되는 이 그림은 조선 시대 공신도상(功臣圖像)의 필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명당대장 진영은 전신상(全身像)입니다. 그러나 사진을 그렇게 찍을 수는 없습니다. 그림을 덮은 유리 위로 '찍사'의 상반신이 대문짝만하게 비칠 뿐만 아니라, 햇살을 받아 더욱 환해진 방문까지 덩달아 진영을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진영의 윗 부분만 촬영을 하고는 조사전 밖으로 나옵니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낮잠을 즐기려는 태세로 땅에 드러누워 있습니다. 동화사 대웅전 바로 뒷 건물인 산신각과 이 조사전 사이의 땡볕 속에 고양이 한 마리가 엉거주춤하게 누워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옆으로 다가가도 전혀 비킬 태세가 아닙니다. 가만히 보니 반쯤 잠에 취한 표정입니다.  

 

사진기를 가까이 들이대자 고양이가 문득 고개를 바짝 치켜듭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봅니다. 눈을 가로로 찢어지게 뜨고 머리를 곧추 세웠습니다. "잠자는 고양이를 건드리지 마라!" 고양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여겨졌습니다. 두 귀가 정면을 향해 90도로 딱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재미있는 표정을 좀 지어보라는 뜻에서 "야! 뭐해! 지금 졸려?"하고 큰소리로 말을 걸었더니, 고양이의 귀가 갑자기 확 바뀌어버렸습니다. 직각으로 곤두선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두 귀가, 돌연 '좌우향'을 하더니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 표정도 지금은 고양이의 것이 아니라 호랑이의 인상으로 변했습니다. 만약 지금이 고양이 전문가와 동행을 한 길이라면, 고양이의 귀는 본래부터 이토록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인지, 대뜸 그것부터 확인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입니까? 이번에는 고양이의 두 귀가 각각 방향을 달리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두 귀가 나란히 정면을 바라보고는 것도 아니고, 서로 마주보는 것도 아닙니다. 오른쪽 귀는 정면을 바라보는데, 왼쪽 귀는 나란히 정면을 향하는 게 아니라 오른쪽 귀 쪽으로 90도 꺾여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미간도 아까보다 더 찡그려 인상이 훨씬 험악해 졌습니다.
  

아, 귀가 또 변했습니다. 오른쪽 귀는 바깥으로 불룩한 반면, 왼쪽 귀는 안으로 불룩합니다.  두 귀가 마치 왼쪽으로 나란히 바라보는 듯한 형상으로 돌변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을 향해서 말입니다. 눈빛도 뭔가 결심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는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고양이가 곧 덤벼들 기세여서 서둘러 자리를 떴기 때문입니다. 이 '찍사'가 물거나 할퀴는 동물들을 무척이나 무서워하는 까닭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영남 승군의 사령부였던 동화사
 
오늘은 두 가지 진기한 것을 본 뜻깊은 여행길이었습니다. 사명대사의 모습를 보았고, 고양이의 변화무쌍하게 돌변하는 두 귀를 보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영남 지역 승군의 총지휘부가 있었던 동화사의 조사전을 찾아 사명'대장'의 진영을 경건하게 바라보는 일도 의미있는 경험이었고, '귀 곡예로 보는 고양이의 마음' 연극 또한 뜻밖의 소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사전에서 사명당대장 진영을 응시한 사람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 하나를 강조하여 언급해야겠습니다. 돌아서서 나오는 길에 봉서루 뒤편에서 임란 당시 동화사가 영남 지역 승병 지휘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 편액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는 무심한 관광객이라면 결코 눈에도 마음에도 넣을 수 없는 소중한 여정일 것입니다. 동화사 대웅전 전경이 봉서루 유리창에 비쳐 신비롭게 떠 있는 정경을 보는 것 또한.     

 


태그:#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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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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