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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오후 서울광장에서는 금융노조 조합원 1만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금융노동자 총진군대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광장에서는 금융노조 조합원 1만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금융노동자 총진군대회'가 열리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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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때부터 영문도 모른 채 임금을 20% 삭감당했다. 정부가 신입직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한을 남겼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장맛비가 퍼붓든 지난 6월 22일 저녁, 서울광장은 뿔난 2만여 금융노동자들로 가득 찼다. '신입직원 초임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금융노조가 집회를 연 것이다. 2000년 7월 11일 정부의 강제적 구조조정에 맞서 일으킨 금융노동자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 그곳에서 2009년 이후 은행에 입사한 '신입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KB국민은행에 2009년 입사했다는 김아무개 조합원은 "입행 후 1년쯤 지나면 업무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더 이상 신입직원도 아니다. 먼저 들어온 선배들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을 맡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20% 삭감된 임금을 받고 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왜 힘없는 신입직원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지 이 정부에 환멸을 느낀다"고 말했다.

'환멸'이란 말은 흔히 쓰는 말이 아니다. 꿈이나 기대가 깨진 뒤 느끼는 괴로운 마음이 환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규직 은행원으로 입사하기란 쉽지 않다. 수백,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그런 그들의 꿈과 기대가 깨진 것이다. 단지 삭감된 20% 임금 때문이 아니다. 외환은행에 2009년 입사한 박아무개 조합원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도 차별을 받으면 주인에게 짖는다, 차별 당하고 있다는 모멸감을 참기 어렵다"고 밝혔다.

현재 금융노조에 소속된 은행 및 금융공기업에 2009년 이후 입사한 신입직원의 수는 8천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기존 직원에 비해 20% 삭감된 임금을 받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청년실업난이 가중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일자리 나누기에 공기업과 금융기업이 역할을 다해야 한다"며 "임금을 깎는 대신 고용을 늘리라"고 지시했다.

전체 공공기관 및 은행, 대기업이 발 벗고 나섰다. 신입직원 초임삭감에 노동계가 반발하고 나섰지만 정부는 막무가내였다. "근로계약이 이뤄지지 않은 신입직원은 노동자가 아니며, 따라서 근로기준법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동의가 없어도 초임삭감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부의 논리였다.

임금삭감돼도 고용늘지 않아... MB정부 책임져야

초임삭감을 통해 청년실업을 해소하겠다던 정부의 말과는 달리 고용은 늘지 않았다. 은행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만들기 보다는 단기 인턴 채용에 급급했으며, 주요 대기업들도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을 늘리는 일에는 인색했다. 대졸 초임삭감 정책은 정부와 대기업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신입직원의 주머니를 강제로 턴 '몹쓸 짓'일 뿐이었다.

신입직원의 초임을 삭감한지 3년, 임금차별에 고통받는 조합원 수가 점점 늘고 있다. 현장의 분노도 커지고 있다.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이다. 대다수 공기업 기관장들과 시중은행 은행장들도 신입직원 초임삭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노사 간 교섭 석상이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신입직원 초임삭감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하루빨리 원상회복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측 그 누구도 원상회복에 앞장서지 않는다. 정부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이다.

더 한심한 건 금융산별 사용자 대표인 신동규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 회장의 무소신이다. 그는 올해 산별중앙교섭에서 신입직원 초임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시작한 일이라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금융산업을 대표하는 사용자 대표로서 자세가 아니다. 정부의 노사관계 개입 자체가 불법이다. 사용자 대표라는 사람이 법 보다 정부의 눈치를 무서워하면 노사관계가 설 자리가 없다.

신입직원 초임 문제와 관련하여 또 한 사람을 기억한다. 바로 임태희 대통령실장이다. 그는 2009년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이었다. 한국노총과 한나라당은 2009년 4월 9일 국회의원회관 125호실에서 정책협의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임태희 실장은 "대졸초임 삭감은 경제위기 상황을 감안하여 한시적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는 임태희 실장의 소신이 변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대통령의 마음 움직이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시한폭탄의 시계는 점점 제로로 향해가고 있다. 신입직원들은 외친다. "이제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숫자로 월급통장에 찍어달라"고. 청와대는 초임을 20% 삭감 당한 신입직원들의 억울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호소를 듣지 못한다면 호소가 분노가 되고, 청와대로 날아드는 돌멩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오치화 기자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교육문화홍보부장입니다.



태그:#신입직원 임금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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