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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마구 쏟아붓던 폭우와 천둥번개가 멈춘 뒤 오랜만에 하늘이 천연덕스레 개었다. 여름 햇살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29일 오전 10시경. 아침 잠 적어 일찌감치 외출나온 어르신들이 드문드문 서성이거나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하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열두 대의 반짝거리는 자전거가 모였다.

 

탑골공원의 주 손님이신 할아버지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뚫여져라 구경을 하고, 한 할아버지는 참다 못해 가장 마음에 드는 자전거를 쓰다듬고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 이내 다시 다가와 만져본다. 그러다 자전거가 쓰러졌다. 할아버지는 미안해 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으시고 여전히 관심어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자전거 주인도 웃기만 했다.

 

헬맷부터 자전거 하이킹용 운동화와 몸에 달라붙는 옷, 그리고 튼튼하고 탐스러운 자전거가 이곳에 모인 까닭이 뭘까. 남자 여섯, 여자 여섯. 이들은 사진작가인 정주하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와 그 학생들이다. 정식 모임의 이름은 '검은 비, 하얀 눈' 사진집단이다. 정 교수 부부를 제외하고는 이제 갓 스무살이 된 뽀송뽀송한 청춘들이다.

 

'검은 비, 하얀 눈' 사진집단은 재작년부터 준비 과정을 거쳐, 한일강제병합 100년째를 맞이하던 작년 여름에 자전거를 가지고 관부연락선을 타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의 원자폭탄 피폭지 히로시마에서 나가사키까지 자전거 순례를 하며 한국, 일본, 미국의 근현대사를 직접 보고 느끼며 다양한 시도와 퍼포먼스, 사진과 기록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 해 초겨울 같은 제목의 사진집 출간과 함께 전시회도 열었다.

 

'검은 비, 하얀 눈'이라는 제목은 원자폭탄의 피해와 그 기억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뒤, 많은 이들이 열선과 폭풍, 방사선 등으로 죽거나 파괴적인 상처를 입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방사능을 머금은 검은 구름이 곧이어 광범위한 지역에 '검은 비'를 뿌려 방사능 피폭자들을 만들어냈다. 일본에서는 직접 피폭자뿐 아니라, 이 검은 비에 대한 증언도 많이 남아 있고, 지금도 검은 비가 내린 지역을 조사하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다.

 

작년에 이 작업에 참여한 2학년 학생들이 졸업하고, 새내기로 들어온 1학년 학생들이 올해 '검은 비, 하얀 눈' 사진집단 자전거 순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발로 밀어가고 느낄 땅과 원폭 피해를 만날 공간은 일본에서 국내로 바뀌었다.

 

기획자이자 지도교수인 정주하 교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다녀오면서 정작 합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합천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빨리 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기 전에 피폭자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합천 복지회관에서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에 일본에 가는 것이 순서였다는 아쉬움이 생겼다.

 

실제로 작년에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은 일본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원자폭탄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를 행동으로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얼굴을 감싸쥐고 괴로워하거나 고개를 푹 수그러뜨린 모습을 담아내는 등, 단순히 풍경이나 유적, 원폭피해의 폐허를 담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원폭 피해와 그 역사가 만든 오늘의 기억을 기록하는 등 의미있는 작업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일본을 여행하다 보니 "일본의 피해만을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는 원자폭탄으로 인한 한국인의 피해를 깊게 이해하고, 내년에 나가사키로 이동하려는 것이다. 기획자인 정주하 교수는 그 과정에서의 고민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사람들도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전쟁 주체국으로서 그 국민이 피해를 입은 것인 데 비해, 한민족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일본까지 갔다가 희생을 당한 것이잖아요. 그분들에 대한 절박한 이해가 부족했어요. 그러니 일본의 원폭피해지를 다니다 보면 일본의 피해만을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 있었던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멀리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본래 27일 출발할 계획이었으나 집중호우와 물난리로 인하여 자전거 여행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이틀 늦어졌다. 그만큼 갈 길이 몹시 바쁘고, 마음도 바쁘다. 8월 3~4일 저녁까지는 경상남도 합천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8월 5일부터 7일까지 사흘 동안 합천에서는 '해원을 넘어, 평화의 언덕으로'를 주제로 한국인 원폭희생자 추모제와 각종 부대 행사들이 펼쳐진다. 8월 6일이 일제강점기말 전쟁중이던 일본 군수도시 히로시마에 미군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며, 식민지 백성이던 한민족도 그날 그 자리에서 수 만 명이 희생당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합천에서는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농촌이 황폐해져 친인척과 가족이 집단적으로 생존을 위하여 일본 히로시마로 떠밀려 간 사람들이 많아 국내 원폭피해자들에겐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현재도 피폭 뒤 생존한 원폭피해자 1세대는 물론이고, 피폭2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검은 비, 하얀 눈' 사진집단도 이때를 맞춰 합천을 방문하여 한국인 원폭피해자와 2·3세 가족들을 만날 생각이다. 그리고 6일 오전에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뒤뜰에서 열리는 원폭희생자 추모제를 비롯하여 전야제와 각종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작년 서울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 이어, 올해는 특별히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사진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이 전시회에는 일본의 피폭지 현장을 탐방하며 기록한 사진뿐 아니라, 한국의 합천에서 만난 한국인 원폭피해자와 2·3 '환우'들을 담아낸 작품들도 소개된다.

 

오늘은 청계천을 따라 달려 용인까지 갈 예정이다. 합천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 국내 원폭피해자와 관련된 지역이나 단체도 중간중간에 방문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너무 없어서 일단 직선코스로 합천으로 갈 계획이다. 코스는 일부러 학생들이 스스로 준비하고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몸으로 배워갈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맡겼다. 헤매거나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 대책도 물론 지도교수인 정주하 교수가 생각을 하고 있으나 우선은 학생들을 믿는 것이 정 교수의 방식이다.

 

이들이 달려야 할 구간은 400km 정도라고 한다. 비가 그친 것은 좋은데, 폭염 아래서 먼 자전거 여행이 쉽지만은 않을 터다. 사진을 찍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할 텐데 왜 굳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가 물었더니, 정 교수는 에너지 문제를 거론한다. 원자폭탄의 피해를 생각하자는 모임이지만, 원자폭탄과 원자력에너지는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는 것. 원자력으로 만들어낸 에너지를 우리가 마구잡이로 쓰며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스스로의 몸으로 바퀴를 굴려가면서 에너지를 사용해보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비롯하여 이번 자전거 순례에 가장 비용 투자를 많이 한 듯 보이는 참가자 정경선 군은 "완주를 목표로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비가 와서 도로가 미끄러우니까 걱정되지만 잘 갈 수 있겠죠"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피폭자는 일본에만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는데 한국 합천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고자 떠나는 길"이라고 말했다.

 

불안과 긴장감이 가득한 김주연 양은 참가자 중 단 두 명뿐인 2학년 학생 중 한 명으로, "이런 긴 자전거 여행은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낙오하지 않고 무사히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라면서, "5월에 봉사활동하러 합천에 갔는데요. 피폭자 분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미비하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문제들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각오를 밝혔다. 김주연 양은 지난 5월 15일부터 시작한 경남지역 원폭피해자 지원을 위한 조례제정 서명운동의 첫날, 합천에서 열린 평화나눔 한마당 잔치에서 땡볕 아래를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기 위해 땀흘렸던 경험이 있다.

 

'검은 비, 하얀 눈' 사진집단의 작업은 올해 국내를 무대로 진행되며, 내년 여름에는 일본 후쿠오카로 건너가 피폭지 나가사키를 탐방하고 기록할 계획이다. 그리고 2년 동안의 기록을 함께 묶어서 사진집과 전시회를 기획해볼 생각이란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들의 첫 여름방학이기 때문에, 긴 자전거 여행도 처음이고 짐도 있고 날씨도 무더워 이들의 길이 결코 콧노래 부르며 달릴 수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두 스스로 자원하여 이 길에 나섰다. 걱정도 되지만 용기를 내서 따라가는 것이다. 아마 합천에 도착해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면 마음의 키도 그만큼 자라고, 다음해 나가사키를 달리는 자전거 길은 더 자신감 넘칠 지도 모를 일이다.

 

"내년에는 이 친구들이 올해 우리 땅을 밟으면서 합천에 다녀온 경험에 더하여, 일본 나가사키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비교해볼 수 있을 거에요."

 

참가자들은 서로 바퀴에 바람을 넣어주고, 복장이나 장비 등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봐 주고, 열량이 높은 비상간식도 나눠주며 출발을 위한 준비를 자신의 것만 아니라 서로의 것까지 공동으로 했다. 출발이다. 


태그:#원자폭탄 피해, #합천, #검은 비, 하얀 눈, #전시회, #자전거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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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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