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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 해체 요구 집회
 기무사 해체 요구 집회
ⓒ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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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 창립 25주년이 되는 해이다. 25주년 행사를 앞두고 유가협을 만든 초대 회장 이소선 어머니가 7월 18일 밤 쓰러지셨다. 그날부터 나의 일터는 전태일재단과 더불어 서울대병원 응급실이 되었다.

어머니가 쓰러진 후 맨 먼저 찾아온 이들이 있다. 유가협의 엄마 아빠들이다. 첫날, 중환자실을 나오며 배은심(이한열, 이하 괄호 안은 열사의 이름) 엄마가 눈시울을 적셨다.

"으째스까나잉, 으째스까나잉."

내가 배은심 엄마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올해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24주기 이한열 열사 추모식에서의 일이다. 배은심 엄마가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행사장 정면 학생회관엔 커다란 걸개그림이 걸려 있었다. 24년 전 직격탄에 맞아 쓰러진 아들의 모습을 보며 배은심 엄마가 말했다.

"우리 아들 쩌그 있고만잉. 으째스까나잉, 으째스까나잉."

신정학(신호수) 아버지는 이소선 어머니 소식을 듣고 여수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25년 전, 이소선에게 유가협을 만들자고 제안한 분이다. 고순임(최덕수) 어머니도, 인혁당 유가족들도 서울대병원을 찾아왔다.

이들은 군사 정권 시절, 노동 정의와 민주주의, 평화통일을 외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다. 딸을 잃고, 아들을 잃고, 자식의 뜻을 이어받아 살아온 분들이다. 직격탄과 쇠파이프에 맞아죽고, 고문에 의해 살인되고, 정부 기관원들에 의해 조용히 사라졌다 시체로 떠오르거나 자신의 몸에 불 지른 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들.

유가협의 사무실 '한울삶'에서 이들의 호칭은 '엄마'(어머니), '아빠'(아버지)다. '이소선 엄마'(전태일), '배은심 엄마'(이한열), '허영춘 아빠'(허원근), '박정기 아빠'(박종철) 이런 식이다. 한울삶에 발을 들여놓는 청년들은 '엄마', '아빠'라는 호칭에 금세 익숙해진다.

나에게 이렇게 많은 엄마 아빠가 생긴 것은 전태일재단에 오면서부터다. 전태일재단과 유가협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서로 이웃해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두 곳을 오가며 지내셨다. 이소선 어머니의 삶은 유가협의 삶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5월광장어머니회'와 유가협의 엄마 아빠들
 아르헨티나 '5월광장어머니회'와 유가협의 엄마 아빠들
ⓒ 전태일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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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뜻을 이어받아 군부독재 타도하자!

한울삶 한쪽 벽엔 열사들의 영정사진이 120장 가량 걸려 있다. 한쪽 벽면 전체가 한국 현대사를 120개의 액자 속에 옮겨놓은 것 같다. 엄마 아빠들이 한울삶을 마련한 후 맨 먼저 한 것은 죽은 자식들의 사진을 모아 벽에 걸어두는 일이었다. 이 사진들은 '내 자식'으로 불린다.

유가협엔 이런 말이 있다.

"한울삶엔 늘 사람이 있다."

거기 사람(사진)이 있기 때문에 유가협 회원들은 외출할 때 방에 반드시 불을 켜두고 나선다.

박정기 아빠는 "이 사진이 우리 가족(유가협 회원들)을 돈독히 만드는 데 있어 큰 힘을 줬어요"라고 말하셨다. 엄마 아빠들은 영정사진이 걸린 유가협에 오면 막혔던 가슴이 뚫린다. 이 사진들을 통해 위로받고 치료받는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심지어 감기가 걸리고 몸이 아플 때 사진을 보면 낫는다는 분도 계신다.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에 학살된 이들의 어머니들 모임인 '5월광장어머니회'의 구호는 "아들이여, 산 채로 돌아오라!"이다. 유가협 엄마 아빠들의 구호는 나를 잠시 멍하게 했다.

"자식 뜻을 이어받아 군부독재 타도하자!"

엄마 아빠들은 아들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식을 찾아다녔다. 자식의 발자취를 뒤쫓으며 세상을 알았고, 자식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언젠가 영정사진을 가리키며 이소선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다.

"이 분들 돌아가실 때, 몇 분 정도 찾아갔어요?"
"내가 가보지 않은 장례식이 어딨노?"

노동자, 학생 열사들. 이들의 마지막 길을 지켜준 이는 이소선과 유가협의 엄마 아빠들이었다.

이소선과 유가족들의 만남은 때론 오해에서, 때론 위로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 죽거나 분신하는 일이 생기면 이소선은 한달음에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정부의 회유에 앞서 유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 시절 살아남은 자들에겐 시신을 지키는 급선무가 주어졌다. 이른바 '시신 사수 투쟁'. 박영진 열사가 분신했을 때는 보안 당국이 시신을 빼앗아 강제로 화장시켰다. 정부 기관원들은 어머니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유가족과 이소선을 갈라놓았다.

"저 여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요. 빨갱이 오야붕입니다. 절대 얘기 나누면 안 됩니다."

유가협 창립대회에서
 유가협 창립대회에서
ⓒ 전태일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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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 이소선

어떤 유가족들에게 어머니와 유가협 회원들은 '빨갱이'였다. 그래서 머리채를 잡아끌고 내동댕이쳤다. 자식을 죽인 여자들이란 생각뿐이었으므로. 그럴 때면 평소엔 그토록 당당하던 이소선은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쫓겨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소선과 유가협에 대한 오해가 없는 유가족이라 할지라도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사람이 보일 리 없었고, 누구를 반갑게 맞이할 경황이 아니었다.

이소선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유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향해 달려갔고, 그 길 위에서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을, 전태일이 쓰러져 누운 병원을 찾아가는 자신을 떠올렸다.

어느 유가족은 자식을 잃고 망연자실한 어머니를 차에 싣고 한울삶에 두고 간 적도 있다. "우리 어머니 다 죽게 생겼으니 제발 살려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엄마 아빠들은 2~3주간 그분의 눈물을 다 받아주었다. 밤새 그녀의 얘기를 듣고, 또 들어주었다.

그래서 이소선과 엄마 아빠들에게 밤 새우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되었다. 동병상련. 제 자식 잃어본 같은 부모 처지라서 하소연할 수 있었고, 들어줄 수 있었다. 한울삶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매우 중요한 사랑방이다.

유가족 공동체 유가협은 이소선에 의해 시작되었다. 배은심 엄마는 이소선을 '앞서 길을 가신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이소선을 처음 만나던 시절을 회상하며 "걸음걸이마저 배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가협의 역사 25년은 배은심과 엄마 아빠들이 이소선의 발걸음을 닮아가는 시간이었다.

이소선은 유가협에서 '친정 엄마'와 같은 존재다. '시댁 엄마'가 아닌 '친정 엄마'다. 떠난 자식 생각나 울고 싶을 때, 삶과 투쟁에 지쳐 위로가 필요할 때 유가협의 엄마 아빠들은 '친정 엄마' 이소선을 찾는다.

때론 다투기도 하지만 힘겨울 때 기대고 싶은 존재. 인생의 고갯길을 오를 때마다 그리운 존재. 투정을 부릴 때마다 보듬고, 타이르고, 안아주는 존재. 언젠가 허영춘 아빠는 '친정 엄마' 이소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애기가 젖 달라며 가슴을 깨문다고 애를 탓하냐?"

유가협 후원회장 문익환
 유가협 후원회장 문익환
ⓒ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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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유가족, 유가협의 새로운 식구가 되다

유가협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6년 8월 12일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창립식을 열었다. 처음엔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책상 하나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가족이 늘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무실 마련의 필요를 느꼈다.

유가협은 세를 얻기 어려운 처지였다. 세를 얻어봐야 정부의 압력으로 곧 나앉게 될 게 뻔했다. 게다가 지방에서 유가족이 올라오면 묵을 곳이 없어 애를 먹었다. 사무실을 마련할 계획을 세운 유가협은 서화전을 준비했다. 서화전을 열기까지 엄마 아빠들은 작품을 얻기 위해 방방곡곡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렇게 마련한 유가협의 사무실이 '한울삶'이다. 한울삶은 이소선에게 자기 집이나 다름없다. 20여 년을 그곳에서 유가협 엄마 아빠들과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올해 들어 유가협에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1997년 이후 14년 만에 전재숙(이상림)과 유영숙(윤용헌), 김영덕(양회성) 님이 새 회원으로 가입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다.

용산참사가 벌어지던 날, 엄마 아빠들은 현장을 찾아갔다. 기자회견도 참석하고 병원에도 들렀다. 그날 엄마 아빠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유가협의 회장인 배은심 엄마가 박제민 사무국장에게 전화했다.

"우리가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쓰것냐?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겄냐?"

며칠 후 남일당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배은심 엄마가 말했다.

"소복을 입고 앉아 있는 유가족을 보니께 '저 모습이 (20년 전) 내 모습이다'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엄마는 마이크를 넘겨주고 내려와서 말했다.

"저 사람들 눈엔 아무 얘기도 안 들리고, 아무 것도 안 보일 거고만. 한 1년쯤 지나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니께."

유가협은 용산참사가 벌어진 날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싸웠다. 이를 계기로 예년에 비해 활발한 현장 참여를 하고 있다.

어머니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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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해줄까? 안 오믄 우짤래?"

이번 주 금요일(12일 오후 6시)엔 서울 용산 철도웨딩홀에서 유가협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올해 초 유가협 사무국과 청년회원(2세대 유가족)들이 25주년 행사를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 이소선과 엄마 아빠들은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평생 원 없이 싸웠지만 이룬 게 없잖아."
"우리가 축하받을 일을 한 게 뭐 있노?"
"싸우기는 정말 징글맞도록 싸웠다만 세상 어디 유가협이 그렇게 싸웠다고 기억해주고 축하해줄 사람이 있겄나?"

유가협 사무국과 청년회는 엄마 아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행사를 준비했다. 30주년을 기다리기엔 연로한 엄마 아빠가 많았다. 살아계실 때 잔치를 열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가 쓰러졌다.

박제민 사무국장은 한울삶에 들어서면 "(이소선) 엄마의 빈자리가 보인다"고 한다. 이소선 어머니가 늘 있던 자리는 윗방 영정 밑 구석 쪽이다. 엄마 아빠들은 그 자리를 일러 '어머니 자리'라고 부른다. 이소선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친정 엄마'였다. '어머니 자리'는 지금 비어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쓰러지기 전까지 전전긍긍하셨다.

"행사를 하믄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해줄까? 안 오믄 우짤래?"

어쩌면 유가협 25주년 행사는 이소선 없이 치러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잔치'가 아닌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 이소선의 빈자리를 누가 채워줄까? 나는 유가협 25주년을 맞이하며 엄마 아빠들에게 축하보다는 먼저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늘 앞장서서 싸우던 엄마 아빠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라고.

▲ 유가협 25주년 홍보영상
ⓒ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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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송기역 기자는 전태일재단 상근활동가입니다.



태그:#유가협, #이소선, #배은심, #한울삶,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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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르포작가. 펴낸 책으로 <사랑 때문이다>(요셉 조성만평전), <흐르는 강물처럼>(4대강 르포르타주), <허세욱 평전> 등이 있다. 최근 e북 르포르타주 <달려라 할머니>와 <그대, 강정>(공저)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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