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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띠지. 5년 전 잡지 기자 생활을 하다가 출판으로 옮겨와 1인 출판을 시작하면서 나는 '띠지'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책을 산 후 훌러덩 벗겨 쓰레기통으로 던지던 그 종이가 띠지라는 것을. 당시는 단행본 출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서 일단 다른 책과 똑같이 만드는 것이 목표이던 때였고, 디자이너가 띠지 디자인을 하자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띠지를 하는 것이 슈퍼맨이 바지 위에 팬티를 입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거라고 배우게 됐다.

그렇게 두 권의 책을 내고 출판에 대해 다 안 것처럼 자신만만해진 나는 세 번째 책부터는 재생지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나무를 베며 책을 만드는 부채감을 덜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생지를 알아보고, 최대한 여백을 줄여 디자인하면서 띠지도 없애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게 참 결심이 쉽지 않았다. 딱히 마케팅 비용이랄 것도 없는 작은 출판사에서 띠지는 훌륭한 광고판이었으니.

딜레마에 빠져 고민을 하다가 표지를 띠지가 있는 것처럼 디자인해보자는 꼼수가 떠올랐다. 그래서 세 번째 책 <채식하는 사자 리틀타이크>는 띠지가 있는 것처럼 디자인을 했으나 나중에 보니 광고 욕심에 표지 디자인을 망친 것 같아 3쇄 때부터 표지를 바꿨다. 꼼수의 처참한 결과였다. 그 후 우리 출판사는 띠지를 두르지도, 띠지가 있는 것처럼 디자인을 하지도 않는다.     

광고 마케팅에서부터 디자인 보조까지... 1인 다역의 띠지

띠지가 있는 것처럼 꼼수를 부린 표지. 결국 3쇄 때 표지를 바꿨다.
 띠지가 있는 것처럼 꼼수를 부린 표지. 결국 3쇄 때 표지를 바꿨다.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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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는 우리나라와 일본 출판계에만 있는 것이다. 버젓이 표지가 있는데 그 위에 띠지를 덧대는 것은 과자 하나를 먹기 위해 봉지를 뜯고, 다시 개별 포장된 봉지를 뜯는 수고를 거쳐야 하는 공산품의 과대포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잊을만하면 환경단체나 출판 관련 단체에서 띠지 추방 운동을 벌이지만 이를 비웃듯 2011년 한국의 띠지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띠지의 불로장생' 이유는 무엇일까?

띠지는 광고 마케팅의 훌륭한 도구다. 표지가 디자인 요소를 강조한다면 띠지는 표지에 넣기 쑥스러운 광고 문구를 직설적으로 넣을 수 있다. 가령 '아마존 1위', '전 세계 5백만 독자의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 등 판매량, 저자 인지도 강조, 책을 소개하는 감성적인 문구 등 책에 관한 실질적인 광고를 할 수 있는 지면이다. 서점 판매대에 책이 놓여 있을 때 독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수단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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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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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띠지는 최근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띠지가 마케팅의 역할을 넘어 표지 디자인의 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일반적인 띠지는 표지 하단에 가로로 두르는데 요즘은 띠지가 표지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거나 세로 띠지, 각종 특수지를 이용한 띠지 등 색다른 띠지가 많이 등장했다. 띠지가 다양해진 것은 그만큼 중요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과정 속에서 디자인적인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내가 봐도 띠지 덕분에 표지가 더욱 눈에 띄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이 최근 많다. 영상 세대 독자들을 의식해서인지 국내 표지 디자인은 갈수록 화려함을 더하고 있는데 그중 띠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지 진짜 예쁘다. 사자."

언젠가 서점에 나갔다가 이런 대화를 듣고 '나도 표지에 신경 좀 더 써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반성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표지뿐만 아니라 띠지 디자인도 무시하지 못할 지경이 됐다.  

언젠가 기사에서 인문 분야 독자들은 띠지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는 글을 읽었다. 인문 분야 독자는 띠지보다 책 내용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글이었는데 과연 그럴까? 지난 주말 시내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진열된 책들을 살펴본 결과 띠지를 가장 많이 두른 분야는 인문 분야였다. 인문 분야는 진열된 베스트셀러 16권 중에 단 2권만 띠지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현재 띠지는 분야를 막론하고 막강 파워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하루에 1200만 그루 이상 잘리는 나무... 숲 파괴의 주범인 '제지 산업'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진열대. 인문분야의 총 16개 책 중 2권만 띠지를 하지 않았다.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진열대. 인문분야의 총 16개 책 중 2권만 띠지를 하지 않았다.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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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 판매에 도움을 주는 여러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띠지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일단 우리 출판사는 '종이 낭비' 때문이다. 물론 표지 1/3 정도의 종이가 소모될 뿐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한 종, 한 출판사가 아니라 전체 출판사라고 생각한다면 적은 양은 아니다.

숲 보호 운동가 맨디 하기스의 <종이로 사라지는 숲 이야기>를 보면 전 세계 인구가 사용하는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하루에 1200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잘려 나가고, 그 중 제지 산업은 전체의 42%를 소비한다. 제지 산업이 숲 파괴의 주범임을 인정한다면 아주 적은 양이라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출판, 광고, 포장 기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수가 많지 않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종이 양은 천문학적이라며 종이 소비의 주요 소비자임을 각성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출판사는 대개 진보적이어서 종이 소비를 줄이자는 목소리에 쉽게 귀 기울여 줄 것이라는 희망적 기대를 하고 있다. 실제로 캐나다의 출판사 85개가 재생지 사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4년간 21만 그루의 나무를 구했다.

물론 띠지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굳이 숲을 살리자는 윤리적 책임감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이고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실제로 띠지도 표지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독자들이 많기 때문에 띠지가 손상되었다고 반품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한 대형 출판사는 띠지를 하려거든 잘 찢어지지 않도록 5센티미터 이상으로 하든지 아예 하지 말라는 권고 사항을 편집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띠지는 반품 관리비를 증가시키기도 하지만 초기에는 제작비도 따로 들어간다. 종잇값과 인쇄비, 수작업을 해야 하는 후가공 비용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 제작비 중 극히 일부분이라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 효과가 월등하다면 포기하기 힘들 것이다. 아무리 독자 손에 쥐어지자마자 휴지통으로 가는 신세라고 해도 말이다.
  
출판사들, 관성처럼 띠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 표지의 2/3 가량을 차지하는 띠지. 많은 독자들이 책을 사고서 바로 띠지를 버린다.
 책 표지의 2/3 가량을 차지하는 띠지. 많은 독자들이 책을 사고서 바로 띠지를 버린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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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게 장점이 있는 띠지를 하지 말자고 출판사를 설득하기는 힘들다. 또한 우리 출판사는 영업력도 없고 변변한 베스트셀러도 없어 책이 판매대에 있는 기간이 적기 때문에 띠지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라 판매대에 있는 기간이 긴 책이라면 판매 부수가 올라갈 때마다 띠지 문구를 바꾸면서 시의성에 맞게 적절히 띠지를 활용할 수 있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띠지를 포기할까? 특히 요즘처럼 출판계가 힘들 때 말이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이 존재하는 원시림을 베고 그 자리에 성장이 빠른 단일 수목을 키우는 나무농장에서는 더이상 생물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다. 자신들이 살았던 원시림을 제지회사에 빼앗긴 인도네시아 쿤투 마을의 원로는 '원시림은 수많은 생명을 먹여 살리지만 나무농장은 오직 대기업에게만 이익을 준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동물 전문 출판사인 우리 출판사는 재생지를 사용하고 띠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숲이 살아야 동물도 살고, 생물 다양성 역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판매량이 미비한 우리 출판사가 띠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얼마나 많은 나무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그루의 나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대만족이다.

물론 이런 논리로 다른 출판사까지 설득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편집자들이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혹시 나는 관성으로 띠지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처음 책을 만들었을 때처럼 '당연히 띠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 습관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띠지의 광고, 디자인 효과와 원시림 보존의 가치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관성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해보기를 바란다. 그래도 띠지의 효용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편집자의 선택을 존중한다. 책의 운명과 가치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편집자일테니까.

띠지 관련 원고를 쓰며 나도 화들짝 놀란 일이 있었다. 세 번째 책 이후로 우리 출판사의 책에서는 띠지를 다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첫 책인 <동물과 이야기하는 여자> 7쇄 종이 발주를 하면서 계속 띠지를 발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매번 지난 문서를 그대로 이용해 발주하다보니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얼른 띠지 종이를 빼고 다시 종이를 발주했다. 나처럼 이렇게 습관적으로 종이를 발주하는 편집자가 또 있지 않을까? 딱히 띠지가 필요 없을 법한 책에도 띠지를 두르고 있지는 않은지 매번 고민해보자. 슈퍼맨의 팬티를 안에 입혀 보기도 하고, 벗겨 보기도 하는 기획력을 발휘하는 게 바로 편집자 아닌가?


태그:#띠지, #출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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