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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은 낙동강의 제1지류로, 경북 봉화와 예천을 거쳐 흐르는 총 길이 100km가 넘는 강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천될 만큼 보존 가치가 높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모래강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영주댐이 건설되고 있습니다. 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의 중상류가 수몰돼 사라집니다. 또 하류로 운반되는 물과 모래가 줄어들게 됩니다. 이는 그동안 낙동강의 정화를 담당했던 필터 기능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거대한 삽질에 의해 베이는 버드나무 군락, 파헤쳐지는 흰 모래 사장, 멸종 위기의 수달, 사라져가는 흰수마자…. 이뿐만이 아닙니다. 영주댐의 건설로 운포구곡을 비롯한 비경과 문화재, 농경지도 수몰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6~7일 사이 약 20명의 작가들은 낙동강의 젖줄 내성천으로 향했고, 삽질에 의해 찢기고 파괴된 강바닥을 다시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흐르는 내성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지금 내성천으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여러분 스스로 강이 되어, 모래의 강 내성천을 마침내 지켜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내성천 살리기 참여 작가 일동>

내 고향 반내골은 보이는 것이라곤 죄 밭과 내(川)뿐이라고 해서 이름조차 반내골이다. 계곡과 좁은 신작로를 빼면 평평한 땅 찾기가 어렵다. 고향 사람들은 눈만 뜨면 산자락으로 달려가 화전을 일구거나 산을 뒤지고 다니며 먹을 것을 찾았다. 거칠고 가파른 산의 품은 뜻밖에 풍요로워 더덕이며 칡이며 송이며 능이며, 갖가지로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거친 산이 어른들의 영역이라면 냇물은 아이들의 것이었다.

섬진강의 무수한 지류 중 하나인 개천은 그즈음엔 이름도 없었다. 아이들은 그냥 '또랑'이라고 불렀다. 지리산과 백운산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내 고향 구례에는 뜨르르 소문난 계곡들이 즐비해서 반내골 또랑 정도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수량이 남달리 풍부한 것도 아니요, 풍광이 소문나게 멋진 것도 아니요, 그저 어느 고향마을에나 있을 법한 흔하디흔한 개천일 뿐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렀고, 봄이면 벚꽃잎이 가을이면 색색깔로 물든 단풍잎이 한가로이 떠내려오던 그 맑은 물은 가재며 토하며 은어며 고둥이며 참게며, 두루두루 다양하게 품어 가난한 산골 사람들을 먹여 살린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그뿐이랴. 또랑은 산과 산 사이, 읍내로 이어진 신작로 외에 아무 것 없던 무료한 산골 아이들에게 가장 신명 나는 놀이터였다. 어른들이 별을 보며 들로 일을 나간 후 텅 빈 집을 뒹굴다 무료해진 누군가 신작로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양 허리춤에 손을 대고 외쳤다.

"또랑 가자!"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아이들이 서넛씩은 있어서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기다렸다는 듯 우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종일 또랑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너 살짜리 아이들은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며 놀았고, 머리 굵은 아이들은 서로 시샘하며 더 높은 바위 위에서 다이빙을 했다.

2011년 여름, 내성천
 2011년 여름, 내성천
ⓒ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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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산골 사람들을 먹여 살린, 내 고향 반내골 '또랑'

미역을 감다 지친 아이들은 젖은 옷 그대로 집에 달려가 감자나 옥수수, 매운탕 양념 따위를 들고 왔다. 주로 그건 여자아이들의 몫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자맥질을 치며 물고기를 잡았다. 그물이나 어항도 없던 시절, 가진 게 없는 대신 재주 하나는 일품이어서 아이들은 맨손이나 고무신만으로도 너끈히 메기나 은어를 한 소쿠리 잡아 올렸다. 토하(민물새우)로 육수를 내고 된장과 고추장을 푼 뒤 오는 길에 딴 호박과 청양고추 숭숭 썰어넣은 잡어매운탕은 아직까지 어디서도 맛본 바 없는 천상의 맛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개울가에서 땡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매운탕을 먹는 동안 너럭바위 위에서는 젖은 옷이 뽀송뽀송 말라갔다. 누군가는 부른 배를 두들기며 너럭바위에 빨래처럼 널브러져 깜빡 잠이 들었다 팔이며 다리며 배까지 껍질이 홀라당 벗겨지기도 했고, 누군가는 용감무쌍하게 어른들이 절대 가지 말라는 소(沼)에 뛰어들었다가 시커멓게 소용돌이치는 물을 한 말이나 마시기도 했다.

뉘엿뉘엿 짧은 해가 저물면 돌틈에 숨어 있던 고둥들이 수면과 맞닿은 바위로 새까맣게 기어올랐다. 계집아이들은 치맛단을 움켜쥔 채 고둥들을 한 손으로 쓸어 담았고, 사내아이들은 참게를 찾아 묵직한 돌덩이를 들어올렸다. 해거름을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손에는 풀대에 꿴 은어나 피라미, 빠가사리, 참게, 고둥 따위가 한아름씩 들려 있었다. 그것은 어른들이 땀 흘려 일하는 동안 땀 흘려 논 것에 대한 아이들의 자그마한 사죄요, 소중한 저녁거리였다.

사촌인 동갑내기 정아는 고둥잡기의 달인이었고, 정아가 잡은 고둥은 동네사람들을 죄 배불리 먹이고도 남아 장날이면 사촌언니의 손에 몇 푼의 돈으로 남았다. 바닥 전체가 커다란 암반으로 되어 있는 또랑 저 아래서 커다란 소쿠리를 옆구리에 낀 채 물이끼 잔뜩 낀 바위 위를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며 고둥을 훑던 정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여름이면 집집마다 필수품처럼 마루 위에 놓여 있던 소쿠리와 그 속에 든 새카만 고둥과 탱자나무 가시도.

구름이 드나드는 아홉 구비의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운포구곡'
 구름이 드나드는 아홉 구비의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운포구곡'
ⓒ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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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 잃어버린 '또랑', 내성천의 미래가 되진 않을까 

은어가 산란을 앞두고 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듯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얼마 전 고향으로 내려왔다. 여름이 되니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미역을 감고 싶다는 손님이 있어 자신 있게 내 고향 반내골 또랑으로 안내했다. 찻길에서 또랑을 슬쩍 내려다본 손님이 한마디 했다.

"이런 개천에 물놀이할 데가 어딨다고 이런 데로 데려와?"

무슨 소리, 내 기억 속의 반내골 또랑은 어른들도 겁내던 깊은 소가 여러 곳이었다. 겁이나 먹지 마시지! 나는 기어이 고집을 부려 차를 세우고 또랑으로 내려가 물색하기를 대여섯 차례나 반복했다. 또랑을 거슬러 오르며 놀 자리를 찾다 설핏 해가 기울어 그날 결국 손님은 그토록 원했던 물놀이를 하지 못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 있는 사이, 반내골 또랑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서울만큼이나 눈이 부시게 변모하여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또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곳곳에 시멘트 보가 물길을 막고, 물 흐름을 방해한다 하여 우리의 놀이터였던 너럭바위마저 산산조각 나서, 십여 년 이상 하루가 멀다고 놀았던 그곳이 어딘지조차 찾을 길이 막막했다. 또랑 바닥의 잔 돌멩이까지 더러운 물이끼가 가득 찬 또랑에서는 시큼한 물비린내가 풍겼다. 그 돌멩이 틈 어디에도 가재는커녕 고둥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직 가을이 멀었는데도 물 위를 붉게 물들인 고추잠자리떼만 추억 그대로였다.

내성천은 아직도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있는 반내골 또랑의 모습 그대로다. 아니다. 반내골 또랑에 비할 손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하여 100여 킬로미터의 먼 길을 저 속한 땅 굽이굽이 휘감고 흐르다 낙동강 삼강나루로 합류하는 내성천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사행천이며, 아직도 제 본디의 모습을 간직한 이름 그대로의 강이다. 좋은 데라면 순식간에 사람이 몰려들어 망쳐놓고 마는 요즘까지 아직도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게 놀랍고 반갑다.

그 강에 댐이 들어선다. 영주댐이 들어서면 내성천의 절반이 사라지고, 사행천의 뚜렷한 특징이자 강이 낳은 최대의 미학이랄 수 있는 운포구곡도 사라진다. 거기 기대어 살던 짐승도 사람도 사라질 것이다.

내성천의 물빛. 이 아름다운 빛이 훼손되기 전에 우리가 내성천을 지켜내야만 한다.
 내성천의 물빛. 이 아름다운 빛이 훼손되기 전에 우리가 내성천을 지켜내야만 한다.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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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연의 침묵을 강요하는 우리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였다. 과학이 역사의 진보를 가능케 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과학의 무한한 정당성을 확보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인간 행위의 무한한 정당성을 확보해주지는 않는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라고 알려져 있지만 강이 사유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강은 이성이 아니라 저만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골에 내려와 유독 비가 많은 여름을 보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물은 제가 알아서 저 좋은 자리로 흐른다. 빠른 길을 두고 부러 산굽이를 휘돌아 느릿느릿 흐르는 것은 제가 속한 땅과 산과 호흡하기 때문이다. 이사 온 집 옆에 자그마한 계곡이 있다. 그 계곡 양 옆으로 땅을 소유한 분이 바위를 쌓아 축대를 만들고 축대 옆에 시멘트를 발라 놀 곳을 만들어놓았다. 얼마 전 큰 비가 온 뒤 개를 데리고 나갔더니 축대 일부분이 무너지고 물길이 시멘트 발라놓은 곳까지 범람하여 반 이상 깨져 있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막아놓은 것을 다시 물이 되찾아간 것이다.

해거름이면 매일 '호랑이'라고 부르는 개와 산책을 한다. 이곳저곳 산에는 시멘트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매일 오가며 비가 올 때마다 새 물길이 나고, 나무가 심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토사가 밀려온 것을 확인한다. 아, 이것이 산이, 그리고 물이 살아남는, 살아가는 방식이구나. 새삼 깨닫고 경건해진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장벽이 없는 곳으로 흐른다. 물이 제 몸을 갉아먹을 때 산은 제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을 버리고 살아남는다.

하나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물의 어떤 위험도 없이 살겠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사람이 그러하듯 자연 또한 자애롭지만은 않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위협적이다.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제 욕망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이 자연더러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침묵하고 있으라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다. 자연의 분노도 자연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인 것이다.

둑을 쌓아 수천 년 지속된 강의 흐름을 막겠다는 인간의 오만을 내성천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자연의 인내심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것으로나마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 정지아 :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90년 <빨치산의 딸>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 <행복> <봄빛>이 있다.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오늘의 소설상을 수상했다.

* 내성천 한 평 사기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공식 홈페이지: http://www.ntrust.or.kr/nsc
내성천 지킴이들 카페 <우리가 강이 되어주자>: http://cafe.daum.net/naeseongcheon
내성천 답사를 원하는 단체는 위 카페를 참조해주세요.



태그:#4대강사업, #영주댐, #사대강, #내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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