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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산소에는 돌을 조각하여 세운 석물(石物)이 한두 개 쯤은 있습니다. 동물 형상을 하고 있는 석수(石獸)도 있고, 장군이나 문관모양을 하고 있는 인물석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석물 중 문관모양을 하고 있는 문인석 대부분은 가슴부위에서 두 손으로 사각형의 뭔가를 들고 있습니다. 문인석이 들고 있는 이 사각형 모양의 것은 혼례나 제례를 올릴 때 의식 순서를 적은 홀기(笏記)입니다.

홀기, 가풍을 대물림 하는 뼈대

유전인자가 그 집안의 혈통이라면 홀기는 그 가문에서 치러지는 의식절차를 대물림하는 의례의 뼈대입니다. 어떤 집에서는 딸의 배필조건으로 홀기가 있는 집안의 자식으로 제한했다고 예기하는 걸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집안에 홀기가 있다는 것은 대소사를 치르는 의식절차가 기록으로 대물림되고 있을 정도로 뼈대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가문에서 치러지는 의식절차를 대물림ㅎㄹ 수 있도록 기록한 '홀기'를 들고 있는 문인석
 가문에서 치러지는 의식절차를 대물림ㅎㄹ 수 있도록 기록한 '홀기'를 들고 있는 문인석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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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는 의미와 절차입니다. 귀찮다고 바꾸고, 성가시다고 생략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변할 수는 있지만 근본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장례나 제례를 지내는 절차를 흔히들 가가례(家家禮)라고 해 참견하는 것을 삼가고 있습니다.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 제각각이다 보니 시나브로 가가례라는 말까지 생겼나봅니다.

하지만 홀기 없이 치러지는 제례나 장례를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말이 좋아 가가례이지 횡설수설에 우왕좌왕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억에만 의존하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의식절차라면 한 번 쯤 되짚어봐야 합니다. 인간의 특성상 깜빡하거나 착각하는 순간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들 '우리집 내력'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홀기 없이 내려오는 가풍이라면 한 잔 술에도 훌떡 뒤집어 질 수 있는 엉터리 예법일수도 있습니다. 

나라의 의식절차를 기록한 '의궤'

집안이나 가문의 의식절차를 기록한 것이 홀기라면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것을 의궤라고 합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런저런 큰일이 한두 번 치러진 것이 아니니 의궤 또한 다양하게 다수로 제작되었겠지만 일부는 불행한 역사의 풍랑에 침탈당해 국외로 밀반출 된 것도 다수입니다.

명성왕후국장도감의궤를 환수하기까지,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수행중인 혜문스님이 쓰고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출판한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는 일본 강점기에 강탈당해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던 <명성왕후국장도감의궤>을 비롯한 조선의 보물들이 환수되기까지의 여정을 담을 내용입니다.   

우리가 환수운동을 통해 찾고자 했던 것은 '종이와 먹으로 쓰인 실록'이 아니라,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과 '실록에 기록된 역사의 정신'이었다. -19쪽-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혜문 씀, 동국대학교출판부 펴냄, 2011년 8월 10일, 12,000원)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혜문 씀, 동국대학교출판부 펴냄, 2011년 8월 10일, 12,000원)
ⓒ 동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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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는 실록과 짝을 이루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입니다. 실록이 글로 이루어진 기록이라면, 의궤는 글과 그림으로 의전 절차를 기록한 것이지요. 조선에서 세계 최고로 꽃피운 기록문화의 전통을 입증하는 것이 실록과 의궤입니다. -224쪽-

잘된 보고서는 내용도 좋지만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형식도 또렷합니다.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는 잘 기록된 실험노트 만큼이나 내용과 구성이 또렷합니다.

환수운동을 하게 된 동기나 이유를 설명해주는 배경이 분명합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 때 그 때 벌어지던 사회적 상황이나 배경, 취했던 방법이나 절차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만큼 진행하는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절차와 방법에 따라 얻어진 '결과'가 바로 환수운동으로 되찾은 <명성왕후국장도감의궤>와 같은 조선의 보물 환수입니다.

결과야 목표로 하였던 조선의 보물들을 반환한 것이지만 반환운동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깬다"는 진리입니다. 

실용주의 정부, 실용적 생각의 소유자였던 '이토'

그런데 정부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뜻밖에도 이번 일본 방문에서 과거사 문제는 거론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실용주의를 앞세운 '경제협력'에 비중을 두다 보니 그런 결론이 도출된 모양이다. -153쪽-

이토는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할 것이 아니라, 통감정치를 통한 반식민지 상태에서 경제적·문화적 지배를 잘하면 충분하다는 실용적 생각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54쪽-

환수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은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과 '실록에 기록된 역사의 정신'을 찾고자 했지만 실용주의를 앞세운 경제논리에 좌절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음을 어림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보통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진보 및 발전을 이룬다. 그런데 최근 평화헌법의 개정을 둘러싼 일본의 움직임, 팽창주의가 가속화되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100년 전의 사건과 연관성을 느낀다. -209쪽-

이 책을 쓴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누구라도 이런 책을 쓰게 하는 일, 일본의 침략과 문화재 강탈과 같은 불행한 일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사실입니다. 이런 불행한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는 또 다른 웅변이자 호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성왕후 '시해' 표현, 반드시 수정되어야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혹자는 시해란 용어가 정확하게 맞지 않는다 해도 명성왕후가 '국모'이기 때문에 높임말로 시해란 용어를 써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弑'란 단어의 용례에 대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시弑는 왕이나 왕비의 죽음에 대한 높임말이 아니라, 반역을 일으킨 자의 패륜을 꾸짖고 경고하기 위한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왕후 시해'란 표현은 적절한 용어로 수정·대체되어야 마땅하다. 시해란 용어는 '조선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해 조선인들이 명성황후를 죽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일본의 증거 조작과 허위 문서로 인한 농간에 빠져 버린 듯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한자어를 일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명성왕후 시해'란 표현은 다분히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해 조선인들이 명성왕후를 죽였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215쪽-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깬다

스님께서는 환수운동에 그치지 않고 왜곡되거나 오해 될 수 있는 역사적 용어까지 올곧게 바로 잡으려 했음을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의궤와 같은 실록이 아닐지라도 '역사의 정신'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에게는 사전 답사기가 되고,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 회복하려는 사람들에겐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법을 그리는 밑그림으로 소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인 혜문 스님이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를 통해 진짜로 방점 찍고, 역설하고자 했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 진실'과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깬다.'는 진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혜문 씀, 동국대학교출판부 펴냄, 2011년 8월 10일, 12,000원)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

혜문 지음, 동국대학교출판부(2011)


태그:#의궤, #명성왕후국장도감의궤, #혜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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