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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괴물이다. 특히 화폐 혹은 금융경제로 대변되는 돈은 진짜 괴물중의 괴물이다."

뉴욕 입성 나흘째 되는 날, 나는 작심하고 아이들에게 어쭙잖게도 '경제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경제의 'ㄱ'자도 모르는 주제에 교육 운운하면 소가 웃을 일이라는 거 안다. 하지만 작금의 세계 경제, 특히 화폐, 금융 경제에 대한 내 분노의 뿌리는 그만큼 깊다. '아들 셋'이 화려한 뉴욕의 거리를 상대로 게릴라 전을 계획한 시간, 나는 내 나름대로 '뉴욕 전투'를 벼르고 있었다.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뉴욕에 완전하게 입성하지 못한 거였다. 대신 산속에 진지를 구축했다. 비버 폰드 야영장이 그 근거지였다.

여름 성수기, 뉴욕과 보스턴의 방값은 말 그대로 눈이 튀어 나올 정도다. 미국 전체에서 단연 최고 수준이다. 값이 제일 싼 축에 드는 유스호스텔도 뉴욕에서는 1인당 50달러 이하 짜리는 사실상 찾을 수 없었다. 우리 4명의 하루 숙박비를 딱 100달러로만 어떻게 해볼 수 있었다면, 산속의 야영장에 진지를 구축하지 않았을 것이다. 뉴욕은 빈곤한 여행자들에게 여간 해서는 틈을 내주지 않는다. 도처에 아주 체계적으로 돈을 훑어내는 장치를 갖추고 있는 곳이 뉴욕이다.

월가는 맨해튼에서도 건물 사이 간격이 좁아 가장 답답한 느낌을 준다. 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증시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분이다.
▲ 답답한 월가 월가는 맨해튼에서도 건물 사이 간격이 좁아 가장 답답한 느낌을 준다. 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증시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분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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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 경제에 대해 한 말씀해 주세요."

어문학도인 선일이가 의외로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 게 궁금하다고 먼저 질문을 건네 왔다. 경제학이 전공인 병모나, 인류학을 공부하는 윤의는 한발 물러서 그냥 듣기만 할 태세였다.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전제했다. 각자 알아서 내 말을 주워담으라는 뜻이기도 했다. 윤의, 선일, 병모는 마침 월가(Wall Street)에서 뉴욕 입성 후 첫 게릴라 전을 치른 상태였다. 8월의 둘째 주 월가를 찾았는데, 보도진이 엄청나게 몰려 있는 걸 보았다고 했다. 월가는 워낙 중요해서 일상적으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전날 뉴욕 증시가 대폭락을 하는 바람에 TV방송 카메라 등이 몰린 거였다.

"화폐는 본질적인 기능이 뭐냐. 교환수단이고, 가치의 한 척도이고, 부를 저장하는 수단 아니냐. 실물 경제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단히 보조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 헌데 너희들 알지, 무슨 무슨 금융상품이니 해서, 돈이 아예 저 혼자 생명력을 갖고 제 맘대로 노는 것이다. 그 것도 실물 경제와 연동하지 않고 난리 같은 상황을 만들 수 있게 됐단 말이다."

개의 꼬리가 몸통을 움직이고, 로봇이 사람을 조종하게 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아이들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특히 전자 시대를 맞아 거의 광속으로 돈이 지구촌을 돌아다니게 된 게 화폐 혹은 금융 경제를 괴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를 하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경제학도인 병모는 내 말에 좀 더 깊이 생각을 하는 눈치였고, 선일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돈 버는데 별 흥미가 없다는 윤의는 멀뚱멀뚱한 모습이었다.

8월 들어 뉴욕 증시가 대폭락하면서 보도진들이 대거 월가에 몰렸다. 아들 셋은 월가의 비중이 높아 기자들이 자주 이런 식으로 취재를 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 월가의 보도진들 8월 들어 뉴욕 증시가 대폭락하면서 보도진들이 대거 월가에 몰렸다. 아들 셋은 월가의 비중이 높아 기자들이 자주 이런 식으로 취재를 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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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점점 뜨거워져 '빨갱이 교육'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 미국 사회 모두 '나'를 잘살게 하겠다는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다. 나처럼 '우리'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딱지를 붙이지 않느냐. 물론 '나' 모두가 잘살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다 잘 살게 되겠지. 헌데 '나' 모두가 잘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 금융 경제는 내가 보기엔 완전히 '나만 잘사는' 체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월스트리트는 특히 그런 화폐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세계적인 경제 석학들은 나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미친 놈이라든지 헛소리를 하는 작자로 취급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말하면, 월가로 대변되는 금융 시장을 '돈 놓고 돈 먹는' 놀음판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거기에 목을 매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불쌍하다. 얘기가 옆길로 새나가지만, 학창시절 이름을 접한 그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인류의 공영과 복지를 위해 무얼 했는지 시야가 좁고, 아둔한 나로서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내가 워낙 흥분해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짐짓 숙연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어쨌든 자위의 기쁨을 누렸다. 지금 내게 딸려 있는 '아들 셋'은 구조적으로 나와 불평등한 관계이다. '아들 셋'에 대한 이런 우월적 지위를 발판 삼아, 세계 자본의 심장, 월가에서 '빨갱이 교육'을 시킬 수 있었던 게 통쾌했다.

경제에 까막눈인 내가 일회성으로 횡설수설을 한 게 '아들 셋'의 사고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방 끈이 굵고, 긴 사람만이 작금의 한국,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세계 상황에 대해 입을 열 수 있는가. 이제는 우리도 좀 '우리'를 앞세워 생각하며 살자고, 아들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호황 장세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월가에 서 있는 황소 상 앞에 선 선일과 병모.
▲ 월가의 상징 황소 호황 장세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월가에 서 있는 황소 상 앞에 선 선일과 병모.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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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는 어째 좀 답답해 보이더라고요."

병모가 혼자 흥분해 떠드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슬쩍 위로성 멘트를 던진다. 맨해튼 남쪽의 월가는 골목이 좁기로 유명한 곳이다. 협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터질듯한 답답증을 호소할 수도 있다. 도로를 질식시킬 듯 빽빽하게 길 양쪽에 늘어선 건물들이 '월'이라는 단어 그대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넘지 못할 벽처럼 압박감을 준다. 해가 일찍 지는 늦가을부터 초봄 사이에는 특히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음험한 느낌마저 든다. 그 인상이 내가 예전부터 월가에 대해 가져온 이미지였다.

'산속의 진지'에서 출발, 월가에서 뉴욕 첫 탐색전을 치르고 온 '아들 셋'은 기차 삯이 비싼 걸 제외하고는 다 출퇴근 식 게릴라전이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내게 비버 폰드 야영장은 비용 면에서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최적의 근거지였다. 무엇보다 차로 20분도 채 안 걸리는 서펀(Suffern)이라는 산 아래 마을은 내가 '보급 투쟁'을 벌이기에 더 없이 좋았다.

산 속에 머무는 동안 먹거리를 챙길 수 있는 쇼핑 센터도 충분했고, 인터넷이 없으면 밥벌이가 오간 데 없는 나로서는 인터넷 접속도 원활하게 할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 뉴욕까지 1인당 하루 왕복에 15달러 남짓 하는 교통비, 그리고 술 좋아하는 아이들이 딸린 상황에서 새벽 3시까지도 다니는 기차가 좀 불길한 느낌을 주는 걸을 빼고는.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빨갱이, #게릴라, #뉴욕, #증시, #폭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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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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