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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어제(31일)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줘야 한다",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사모님 없었으면 번호도 땄을 것" 등의 발언으로 성추행 파문을 일으켰던 무소속 강용석 의원에 대해 제명안을 부결시켰다. 사건 초기 관련 내용을 보도한 모 언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가 문제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증언이 잇따르면서 무고 혐의까지 더해진 강 의원에게 법원은 지난 5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었다.

 

방청객과 취재진을 내보내고 국회방송과 인터넷 중계마저도 차단한 채 비공개로 이뤄진 본회의에서 투표 전 김형오 국회의장이 했다는 멘트가 '걸작'이다. "여러분 가운데 강 의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도저히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또 돌을 던질 것입니까"였다(양심도 개념도 결여된 듯한 의원 한 명을 예수에 비유하다니… 굳이 이 성경 문구를 인용해야 한다면 기실 작금의 '곽노현 교육감 사태'에 빗대고 싶다!)

 

어이없지만 '익숙한' 결론과 마주하고 보니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지난 5월 입원한 여자 환자에 전신마취제를 몰래 투여한 뒤 그 옆에서 잠을 잔 의사가 첫째요, 다른 하나는 공교롭게도 같은 달에 발생한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이다. 발생 시점도 비슷하지만 두 사건의 가해자 모두 오리발을 내밀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해당 의사는 "술에 취해 당직실로 가려다 병실로 잘못 들어갔으며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했고 덧붙여 "케타민(마취제)은 수술 환자에게 쓰려고 약제실에서 타온 뒤 반납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고 했다. 당직이란 것이 만에 하나 긴급상황을 대비해 서는 것인데 병실과 당직실을 구분못할 만큼 술을 마셨다는 것도 문제지만 십분 양보해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럼 방도 구분 못 하는 의사가 여 환자에 마취제를 투여한 것은 과도한 직업정신의 발로라 할 것인가!

 

 

자고 있는 여자 동기를 성추행하고 촬영까지 한 고대 의대생 3명 또한 사건 직후 피해자를 대한 태도나, 특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B씨의 경우 결백을 증명하려는 과정에서 되레 그 사람 됨됨이를 의심케 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죄를 인정한 다른 두 학생의 경우 피해자가 '너희들이 했던 거 기억난다'고 보낸 문자 메시지에 '네가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 '우리는 망했다'고 답했다 한다. 피해자의 들춰진 상의를 내려주고 잠만 잤을 뿐이라는 B씨는 같은 과 친구들을 대상으로 '피해자는 평소 사생활이 문란했다', '피해자는 사이코패스다' 등의 설문조사를 펼쳤다.

 

국회의원이나 된 사람이 '여자는 다 줘야 한다' 식의 저질 인식을 드러낸 것부터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의사가 여자 환자에 마취제까지 투여해 불미스런 행동을 시도했다는 사실, 대한민국 명문사학을 자청하는 고려대 의학과 학생들이 여자 동기를 상대로 추잡한 짓을 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 사태에 대해 누군가 회초리를 들어 따끔하게 혼내줬음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하지만 그 바탕을 살펴보면 씁쓸한 웃음만이 떠오른다.  

 

'고대 사건' 초기 그 가해자의 부모들은 이 낯부끄러운 사건에서 자식들을 구제하고자 말만 들어도 '움찔' 하는 거대 로펌들의 변호인들을 선임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B씨의 경우 그 수가 무려 일곱이었다. 또한 피해자 집을 찾아가 "이런 게 알려지면 가해자도 끝난 거지만 피해자도 끝나는 거다"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부모가 늙고 힘없어 자식을 통제할 수 없으면 사회가 나서 법으로라도 바로 잡아야 할 텐데 고대생은 고대가 봐주고 국회의원은 나라가 봐주고, 의사가 되니 법원이 봐준다(현행 의료법상 성범죄는 의사면허취소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

 

참으로 없는 사람들만 서러운 세상이다. 참으로 수치심 없는 세상이고, 참으로 쓴웃음 짓게 만드는 세상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비슷한 듯 다른 세 사건을 떠올리고 있자니 마치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겠으나 생각나는대로 시나리오를 구성해본다.

 

#1. 의사와 변호사, 국회의원이 직업인 세 남자가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 얼근하게 취한 셋은 대학 시절 자신들이 성추행했던 여자 동기가 '지금은 뭐하고 사나' 궁금해하며 그때 받았던 면죄부를 영웅담처럼 얘기한다. 

 

#2, 즐거운 밤을 보낸 세 남자, 다음날 각자의 직장으로 출근한다. (병원 진료실)의사가 된 남자는 최근 입원한 얼굴 예쁜 여자 환자를 힐끔거리며 그녀의 신상명세를 훑고 있다. (국회 의원실)의원인 남자는 공개석상에 모인 모 대학 여학생들을 두고 어젯밤 2차를 함께 한 술집 도우미를 떠올린다. (택시 안)변호사 남자는 술 먹고 같은 과 여학생을 성폭행한 청년을 변호하려 법원으로 가고 있다. 언젠가 자신이 옷을 들춰 가슴을 만졌던 그 밤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태그:#고대의대생, #고대성희롱, #강용석, #마취제의사, #곽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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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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