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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텃밭의 고추를 바라보는 심정이 묘하게 복잡해진다. 매년 고추를 조금씩은 심었지만 유기농을 고집하다 보니 이맘때 쯤 고추 수확량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풋고추나 밥상에 올리고 고춧잎이 영양가 최고라며 몇 번 뜯어 먹다 보면 고추는 포도농사에 밀려 풀이나 제대로 매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즘 그쪽은 고추가격이 얼마 하니?"

올해 텃밭에 심은 고추가 결국은 탄저병에 걸려 시들거리고 있다.
▲ 텃밭의 유기농 고추 올해 텃밭에 심은 고추가 결국은 탄저병에 걸려 시들거리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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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포기에 5~6천 원 하던 배춧값이 주춤하는가 싶더니 무 한 개에 4천 원까지 올라가는 요즘, 주름진 서민들의 가계에 고추마저 대란을 일으키고 있다. 작년에 비해 고추 한 근 가격이 무려 3~5배까지 치솟으면서 주부들은 고추 앞에서 망연자실, 이곳저곳 가격을 물어 볼수록 놀란 가슴만 쓸어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구두로 예약한 고춧값, 날이 갈수록 폭등하자 '다른 데서 알아봤으면…'이란 생각이 앞선다.

매년 이맘때면 어머니는 선산에 벌초하러 오시는 아버님과 함께 고추도 살 겸 내려오신다.
아들이 짓는 텃밭 수준의 고추농사에 기대할 것 없다는 어머니는 인근 지역에서 고추 농사를 짓는 사돈 벌 되는 분에게 고추를 매년 구매하셨다.

올해도 그 분에게 전화로 고추를 사겠다고 예약을 하셨는데 작년 대비 두 배에 해당되는 한 근에 만천 원으로 구두예약을 하고 서울로 올라 가셨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 요즘 그쪽은 고추가격이 얼마 하니?"
" 글쎄요. 장에 나가보니 한 근에 1만5천 원에서 1만8천 원까지 하는 것 같던데요."
" 서울은 하루 다르게 고춧값이 뛰는데 오늘은 2만 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 그럼 지난번에 예약한 고추는 어떻게 됐어요?"
"안 그래도 전화를 하니 올해는 다른데서 고추를 샀으면 어떠냐고 하더라."

결국 사돈 벌되는 분 입장에선 구두로 예약한 고춧값과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고춧값의 격차가 너무 커지다 보니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사돈 벌되는 어머니에게 대책 없이 오른 고춧값을 그대로 요구하기도 어려워, 그만 다른 데서 샀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나름 속이 상하신 것 같았다. 돈 때문에 사람 관계에 보이지 않는 금이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차로 와서 싣고 가라고 했을 때 갖고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팔고 나서 왕창 오른 고춧값을 보면 그 분은 또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결국 직접 가서 살 때 시세에 맞춰 적당하게 가격을 절충하는 게 좋겠다며 얘기를 끝냈다. 며칠 전 벌초 일행 따라 내려 오신 어머니는 그나마 고추 한 근에 1만7천 원으로 흥정을 끝내고 무거운(?) 고추보따리를 들고 올라 가셨다.

부르는 게 값인 고추, 급기야는...

올해 지겹도록 내린 비 때문에 농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약통을 들고 논과 밭을 오가야 했다. 진딧물과 탄저병에 약한 고추 농사는 습기에 더욱 취약했고 결국 고추농사의 태반이 탄저병 등으로 수확이 감소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지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시장엘 가도 고추가 귀하다는 소리만 무성했고 금값이 돼버린 고추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급기야 중국산 고추가 대량 수입된다고 하지만 이미 중국산 저질 고추를 불신하는 주부들은 적게 먹더라도 국산 고추를 구입하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다. 덕분에 국산 고추 가격은 한 근에 2만 원을 가볍게 넘어서는 중이다.

얼마 되지 않은 고추를 조금씩 딸 때마다 평상에 말리고 있다.
▲ 금값이 돼버린 고추 얼마 되지 않은 고추를 조금씩 딸 때마다 평상에 말리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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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약이니 유기농고추, 태양초 고추는 고사하고 이 땅에서 생산된 고추만이라도 먹고 싶은 욕구가 더욱 가격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것이다.

한 근 평균 5, 6천 원 하던 고추가격이 어지러울 정도로 널뛰기하고 있지만 생산량이 대폭 줄면서 농부 입장에선 그게 그거라는 반응이다. 물론 다행히 고추농사가 평년 수준이라면 말은 달라지겠지만 내 주위에 그런 농가는 별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고춧값이 폭등하면 배춧값은 폭락?

자급자족할 정도의 고추 농사만 지었어도 올해는 돈 벌었다며 위안 삼는 농가도 많았다.윗집의 고추농사는 나와 비교하면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 불과 세 평 정도의 텃밭 고추 농사지만 얼마나 야무지게 키우는지 삼십 근 이상을 수확하고도 남을 정도란다. 물론 적절하게 약을 쳐주지만 유기농만 고집하다 초라한 수확량으로 농사를 마감하는 나로선 유구무언이다.

먹고 남는 고추의 판매를 놓고 부부간에 티격태격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들려오곤 한다.
가격의 폭등이나 폭락은 서민들의 주머니에만 타격을 주는 게 아니라 원만하던 인간관계까지 금을 내는 경우가 있어 그 후유증이 적지 않다.

다가오는 김장철을 대비해 가을배추에 정성을 기울이는 농가를 흔히 볼 수 있다.

작년 같은 배추대란을 의식해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한편에선 고춧값이 오르면 배춧값이 떨어진다고 한다. 고추값이 오르니 사람들이 아예 김치를 덜 담그게 되고 배추 수요가 떨어져 배춧값이 폭락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배추가 풍작일 경우 폭락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텃밭 수준의 농가야 맘 편히 농사짓지만, 수 천 평 이상의 배추 농가는 농사일보다 가격 추이에 더 신경을 곤두 세워야 한다며 씁쓸한 웃음을 날리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없는 농산물의 가격 변동에 순박했던 농심은 투기꾼의 심성으로 변질되고 있다. 거듭되는 이상 기후로 하늘마저 농사를 버린 게 아닌 가 걱정이 깊어지는 요즘, 작년 배추대란에 이은 고춧값 폭등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도시인, 농부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다.


태그:#고추 , #유기농,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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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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