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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반장 선거에서 겨우 이겼다. 많은 아이들이 명숙이를 지지했음에도 같은 아파트 촌에 사는 아이들이 대동단결하여 적들을 물리치고 대 역전극을 이룬 것이다. 내가 누군가? 잘생겼으며 키도 또래보다 훤칠하지 뭐 나무랄 게 없는 내가 감히 저 명숙이 같은 촌 아이에게 아슬아슬하게 이기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문제가 또 발생했다. 부반장만 빼고 분단장, 각 부장들이 전부 명숙이 편으로 채워진 것이다. 평소에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뉴 책걸상 운동, 분수대 르네상스, 디자인 교실 등해서 1학기 내내 쾌적한 환경을 위해서 일해 왔건만 지렁이가 어떻게 살모사의 뜻을 알며 병아리가 어찌 독수리의 뜻을 알랴! 물론 학급회비가 올라가긴 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 쾌적한 학습활동을 위한 길인데 명숙이패는 그 돈으로 우유급식을 무상으로 하자고 한다.

내가 누군가? 학급 반장 아닌가? 나 없이 어디 결론 내보라 하고 수업 후 임원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마음대로 학급회비를 우유무상 급식비 보조로 돌린 것이 아닌가? 내 참… 어이가 없다. 일 분 일 초가 급박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학교를 홍보하고 학습의 질을 올려야할 시점에 우유무상급식 지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운영위원들이 대거 쏠려버렸다.

그 뒤에는 노현이(작년 학생회장이었던 무현이랑 이름이 비슷한 놈이다)라는 학습부장이 있다. 둘이 생긴 것도 비슷한 게 어떻게 애들을 매수했는지…. 거기다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 사람들 특성상 우유를 무상으로 준다고 하니 다 빡 돌아버렸다. 특히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근근이 학교 나오는 놈들은 좋다고 하겠지.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사원 아파트 사는 친구들은 별로 관심도 없는 일이었다.

이대론 근혜한테도 밀리고 학규한테도 밀리는데...

8월 21일 오전 서울시청 기자실에서 긴급회견을 열어, 오는 24일 실시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밝힌 오세훈 서울시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8월 21일 오전 서울시청 기자실에서 긴급회견을 열어, 오는 24일 실시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밝힌 오세훈 서울시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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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 결심했다. 내 모든 것을 걸기로. 내년 전교학생회장을 바라보는 내가 저런 찌질이들의 무상우유급식에 밀리면 5반 근혜한테 안 그래도 밀려 있는 상황에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 전교학생회장 명박이 형과 근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기에 무상우유급식 안을 전체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오늘은 표정관리 잘해야 한다. 같은 아파트 단지 친구들을 제외하면 반대가 상당히 심하다고 들었다. 내가 바꿔준 책걸상에 앉아서 공부하면서 내가 이쁘게 꾸민 분수대 앞에서 명숙이파 애들은 고무줄 놀이만 잘도 하더만. 촌구석에서 온 애들은 내가 학급회비로 대납하겠다고 이야기했건만 말을 못 알아듣는다. 있는 집 친구들은 급식비 내고 없는 집 애들 안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 아닌가? 가장이 무능한 것을 학급회비로 보상해준다는 이 얼마나 지극히 합당하고 순리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근데 저 꼴통들은 그러면 없는 집 아이들이 차별받는다고 한다. 원 별 쓰레기 같은 생각을 다 봤나! 어제 명박이 형, 준표 형하고 의논도 했는데 반장직을 걸지 말라고 한다. 반장직을 걸어서 지면 10월 반장 재보궐선거, 내년 4월 학교 전체 선도위원 선거, 연말 전교학생회장 선거까지 워험해진다는 거였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나의 명석한 두뇌로 밤 꼴딱 새며 생각한 결과는, 반장직을 걸어야 한다는 거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5반 근혜한테 밀린다. 사실 3반 학규한테도 밀리고 요즘 2반 재인이도 쑥쑥 크고 있던데 이대로는 안 된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아닌가! 내년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명박이 형이 중학교 올라가고 나도 내년이면 6학년인데 기회는 이번 딱 한 번 뿐이다.

여기선 조금 비굴해져도 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인데 이미지 조금 구겨지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은 늘 엄마가 해주는 나비 넥타이도 안 하고 왔다. 난 최대한 눈물을 쥐어짰다. 그리고 나의 비장의 무기. 꿇어 앉았다. 같은 아파트 사는 영희는 울기 시작한다. 그렇지! 누가 지금 끓어앉았는데 저 정도 반응은 나와야지.

난 최대한 비통한 표정을 지었고 조금을 떨리는 어조로 나의 학급과 학교를 위한 진정성을 알아 달라고 호소했다. 당장 우유를 공짜로 주면 학급 운영금 적자가 쌓여서 내년 학급 운영에 부담을 줄 것이고 여기서 막지 못하면 다른 학급으로 불 붙듯 퍼지게 되며 급기야 점심밥도 공짜로 주게 되면 학교가 망할 것이라고 간절히 어필했다.

통했을 것이다. 난 느긋이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아이들이 표를 모아줄 것이고 나같은 빠지는 것 없는 엄친아가 무릎을 꿇었으면 여자들은 이미 나한테 뻑 갔을 것이다. 느긋하자. 느긋하자. 느긋하자….

어?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다. 생각보다 친구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투표하면 되는데 조금만 조금만…. 망, 했, 다! 아! 33.3퍼센트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반장직을 걸었는데…, 정말 진심으로 무릎까지 꿇었는데…, 망했다. 완전 망했다.

학교 마치고 준표 형 집에 찾아갔다. 문 앞에서 개망신 당했다. "이제 니하고 안 논다" 한 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내일 오후면 다른 학교 모임에 갔던 명박이 형이 오는데 기다려야 하나 그냥 바로 그만둔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된다. 좀 더 끌었다간 명숙이 일당이 난리칠 건 뻔하고, 그냥 명예롭게 퇴장하자니 이제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고…. 하긴 명박이 형 만나봐야 별 방법이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친구들 앞에 섰다. 침통한 표정으로 오늘부로 반장직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학교는 조퇴하고 일찍 집에 왔다. 결국 명박이 형 못 만나고 왔다. 문 닫고 내 방에 들어왔다.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참았던 눈물이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이야.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명숙이, 노현이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조금만 있으면 명박이 형이 온다. 원수를, 이 원수를 명박이 형이 갚아줄 거야. 꼭 형이 갚아줄 거야….


태그:#오세훈, #무상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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