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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옆의 갈대가 아름다운 길이다.
 길옆의 갈대가 아름다운 길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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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마지막 여름의 폭염속에서도 소리없이 다가와 땅 끝에 닿아 있다. 들판 길 언저리마다 피어 가을 바람에 흔들거리는 갈대의 노래가 벌써 가을인 것이다. 이 가을의 길에 들어서면 누구나 무작정 한 떠나고 싶어진다. 가을길 따라 들판 위에서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곳에 가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땅끝 해남. 땅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를 포근하게 안아줄 떠나간 여인의 숨결 같은 따스함이 있을 것 같은, 비록 거기에는 잡히지 않는 바람만 있다 해도 한번쯤 떠나보고 싶은 곳이다.

조선후기 문인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보는 가을길은 바람 많은 땅끝 해남땅으로의 가을여행이었다. 공재가 살아온 그리 길지 않은 생애의 또 작은 일부의 삶을 살았던 해남. 그가 살았던 녹우당과 백포 고택은 아직도 그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불멸의 명작 <자화상>은 아마 그가 당파에 휘둘리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자연에 묻혀 있을 때 완성된 작품이 아니었을까?

해남 미황사에서 시작하는 '공재길'

그의 자취를 찾아 떠나보는 날에는 가을날씨 같지 않은 늦더위가 실려 있었다. 공재길 걷기는 남도의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서 시작되었다. 미황사에 가면 아름다운 미황사 만큼이나 미소가 아름다운 금강스님이 있다. 금강산 만큼이나 아름다운 달마산 아래의 미황사에는 많은 사람이 잠시 속세의 시름을 놓고 찾아온다.

미황사에는 문화가 있다. 사찰의 르네상스와 같은, 이곳 해남의 대표 사찰 대흥사에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다산을 비롯 추사와 소치 허유와 같은 문인 석학들을 비롯 예술인들이 몰려와 문화의 창조시대를 연 것처럼 미황사에는 지금 그 시대가 다시 찾아 온 듯하다.

얼마 전 다녀간 신영복 선생님은 이곳 미황사 아래 서정분교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의 현판글씨를 기증하며 이곳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매년 열어온 미황사의 괘불재와 음악회는 올해 또 열두 번째로 오는 10월 8일 다시 열린다. 깊어가는 산사에서 다시 가을의 문화축제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미황사의 가을은 아직 설익어 있다. 아직은 짙푸른 나뭇잎들이 가을이 깊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미황사를 벗어나 들판 사이를 걷다보면 한해 농사의 성패를 가늠해 볼 벼들이 누렇고 탐스럽고 알차다. 태풍 무이파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태풍을 이기고 그 결실을 맺고 있다.

미황사를 떠나 공재의 생가가 있는 백포마을까지는 약 11km다. 따가운 가을햇살 아래서 걷기에는 녹록지 않은 거리다. 길을 걷다 보면 많은 사물이 가까이 다가온다. 승용차만 줄곧 타고가다 시골버스를 타고서야 시골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틈 속에서 진짜 이들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처럼 길을 걷다보면 빠른 시간속에서 놓처 버린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길을 걷다보면 어린시절 학교 가는 길에 캐먹은 고구마나 무가 생각난다. 지금은 모두 그리운 시절이다. 미황사를 벗어나 군곡 저수지를 따라 들판 길을 걷다보면 길가에는 갈대들이 춤을 춘다. 가을을 느끼기 좋은 광경이다.

군곡저수지 옆을 따라걷는 참가자들.
 군곡저수지 옆을 따라걷는 참가자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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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곡저수지는 과거 저수지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곳이다. 지금은 바닷길이 막히고 들판이 된 논들에 물을 대기 위해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군곡저수지 옆을 따라가면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 길 옆의 갈대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룬다. 가을 정취를 가장 멋지게 느낄 수 있는 곳 중에 하나다. 우리는 그 길을 줄곧 따라 걸었다. 이 길에서만큼은 가을길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군곡저수지를 따라 삼마 마을이 있는 곳까지는 그렇게 들길을 따라 난 갈대숲이 터널을 이루는 듯하다. 삼마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에서 잠깐 휴식, 삼마리는 마을 앞 세 곳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말(馬)과 연관지어 이름 붙여진 마을이란다.

삼마마을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어서면 군곡마을이 나온다. 군곡마을 앞으로는 지난 60년대 쯤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출렁이던 곳이다. 백포만의 초입에 해당하는 이곳은 먼 바다로 나가는 통로에 위치해서인지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로상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 군곡패총에서는 지난 1986년 목포대학교의 발굴에 의해 중국 신나라 시대의 화폐 동전인 '화천'이 발견된 곳이다. 신나라는 AD 9~22년까지 짧은 기간 존재했던 왕조다. '화천'의 발견은 당시 이곳 군곡을 중심으로 한 백포만이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로상의 중요한 지점이란 걸 보여준다.

우리 일행은 폐교된 군곡초등학교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수백 명의 학생이 학교를 뛰어다녀 풀들이 자랄 여유가 없었을 운동장에는 이제 잡초만 무성하다. 학교 초입의 정문에는 올 2011년 3월 학교가 폐교되었음을 알리는 설명문이 붙어있다. 이곳도 결국 아이들이 사라져 가는 농촌의 모습에서 예외가 아니다.

점심을 먹어 약간 몸이 무겁거나 느슨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다시 길을 걷는다. 군곡초등학교를 벗어나 오래 전 드넓은 바다였을 들판을 지났다. 예전에는 수많은 배들이 오가는 그 뱃길이다. 한중일 고대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진 백포만의 바다는 이제 너른 들판이 되어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마지막 수확의 결실을 태양의 자양분 아래서 만들어 가고 있다.

들판길은 지루하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바다가 육지로 변해 간척지가 된 너른 들판은 더욱 힘이 든다. 터벅터벅 그렇게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뒤로한 채 벌판으로 변한 백포만의 그 뱃길은 이제 긴 수로가 하천으로 변했다.

공재길 걷기의 찾가자들.
 공재길 걷기의 찾가자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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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백방포의 수로 위에서 가을 길을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뱃사람들의 혼령을 추모하듯 대금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길에 동참한 문재식씨가 가지고 온 대금소리다.

김지하가 노래한 백방

이 수로를 지나 배는 백방포에 배를 댄다. 배는 남편을 싣고 저 멀리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일행이 되어 떠난다. 그리고 여인은 중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백방산의 바위에서 떨어져 훨훨 새가되어 날아간다.

그렇게 백방포에는 먼 세계를 향해 떠난 남자, 그리고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사는 여인의 한숨이 묻어 있다. 시인 김지하는 땅끝 해남땅에서 백방포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백방산 나가미 위에
무수히 서 있는 저 연인들의
얼굴 얼굴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저 무수히 바람에 갇혀
옹송거리는 어깨 움직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이리 떠나고 떠나오던
그 숱한 작별의 이야기들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 김지하 백방1 -

김지하 시인이 시를 통해 그리움을 노래한 백방포는 오래전 중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렸다는 여인의 전설이 머문 포구다. 이제는 너른 들판만이 오래전 이곳이 멀리 중국으로 떠나는 뱃길의 출발지였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떠남과 기다림, 그리움의 자리에서 김지하는 백방포를 노래했다.

이제 그때의 흔적이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제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이제는 모두가 떠나고 노래할 이 없을 것 같은 이곳에서 논두렁의 억세만 가없이 바람에 휘날린다.    

연으로 가득한 신방저수지와 멀리 백방산.
 연으로 가득한 신방저수지와 멀리 백방산.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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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방포로 가는 수로를 지나 백포마을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 신방저수지를 지났다. 신방저수지는 온통 연잎이 들어찬 저수지다. 저수지를 가득 메운 광활한 연잎들의 세상, 하지만 연꽃이 피지 않은 이 저수지의 연은 생명이 부여되지 않은 것처럼 짙푸른 녹음으로만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신방저수지를 지나 이제는 마지막 종착지인 백포마을로 가는 길이다. 백포마을로 가는 옛길이기도 하다. 오래전 공재가 말이나 나귀를 타고 종가인 녹우당에서 이 길을 따라 들어갔을 마을의 초입길이다. 백포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는 백포마을은 한낮인데도 고즈넉하다. 백포마을은 공재 고택과 함께 주변에 여러 채의 고택들이 들어서 있어 아직도 공재가 살았던 옛 마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온 우리 일행들은 아무도 반겨 주는 이 없는 마을길을 따라 백포 고가에 닿았다. 백포마을은 공재가 살았던 전택이 있는 마을이다. 지금 윤두서 고택은 마을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공재가 이곳 백포마을에 전택을 짓고 살게 된 것은 해남윤씨가에서 이룬 언전 간척과도 상관이 있다.

가을길 걷기의 종착 백모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아래서 휴식.
 가을길 걷기의 종착 백모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아래서 휴식.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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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윤씨가는 이곳 백포마을 앞을 대규모로 간척 하였는데 간척을 하자 토지가 늘어나고 사람이 모여살게 되며 자연히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공재는 한해가 들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거나 유랑하는 신세가 될 때 마을 뒤 소나무를 배어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소금을 구워 마을 사람들을 구제했다고 한다. 공재의 애민사상을 알 수 있는 일화로 당시 이곳에는 마을을 이룰 만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백포는 흰포구다. 어느 예술가의 호와도 같은 이름이다. 배가 닿았을 이 마을 앞은 오랫동안 간척이 이루어져 너른 들판이 되었다. 해남윤씨 집안의 오랜 고가들이 남아있는 백포는 그렇게 오롯이 옛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백포마을 공재 고택에서는 오는 24일(토) 공재문화재가 열린다. 고택의 분위기를 살린 갖가지 공연과 체험행사 진행된다. 22일에는 <공재 윤두서>의 저자 박은순 교수가 내려와 해남문화원에서 초청강연도 가질 예정이다.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정신을 온전히 남기고 간 공재 윤두서, 그래서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 시간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시 이곳에 모인다.


태그:#공재, #미황사, #백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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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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