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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물 안개가 끼어 수채화 같았다.
▲ 곶자왈 에코랜드 비가 오고 물 안개가 끼어 수채화 같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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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무소식이 희소식' 주의자. 출근하면, 집에 전화하지 않는다. 밤이 되면, 아이들과 내가 번갈아 가면서 빨리 오라고 애걸한다. 그런 남편도 며칠씩 집을 비울 때에는 달라진다. '출장 전화질' 병에 걸린다. 지난 봄에는 증상이 심해서 국제 전화요금이 수십만 원 나왔다. 내 통장에서 돈이 빠지니까 출장 가는 남편한테는 굽실거린다.

"나, 일할 때 전화 못 받아. 그러니까 자주는 하지 마. 밤에 애들 있을 때, 그때, 통화하자."

남편은 출장을 좋아한다. 차려준 밥만 먹으면 되니까 평온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런데 집 나서기 전까지는 밥걱정의 노예다. 출장 전날에는 짐을 꾸리면서 동시에 밑반찬을 예닐곱 가지 만든다. 아침상을 차리지만 본인은 시간에 쫓겨 한 술도 뜨지 못하고 간다. 큰 아이는 어릴 때에 제 아빠 출장하고 소풍하고 겹치면, 걱정에 빠져서 울었다.

"엄마, 내 도시락은 어떻게 해?"

큰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은 동생 지현이다. 지현은 "애를 왜 불안하게 만들어? 도시락 싸는 거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아닌 그 일을, 나는 아직까지도 못해낸다. 진짜로 어려워서 쩔쩔맨다. 매번 막막하다. 재료들을 조화롭게 만들지 못하는 칼질은 엉성하다. 늘 어색해 하고, 도망치려고만 한다. 

제주도 땅은 물을 품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런데 커다란 호수가 있다. 바닥에 방수처리를 한 인공 호수다. 기차에서 내려 가로질러 건너간다.
▲ 곶자왈 인공 호수 제주도 땅은 물을 품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런데 커다란 호수가 있다. 바닥에 방수처리를 한 인공 호수다. 기차에서 내려 가로질러 건너간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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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에 남편이 제주도로 출장 갔다. 내 전화벨은 어김없이 울렸다. 남편은 기차를 타고 가다가 호수를 걷고, 언덕을 오르고, 숲을 산책하는 곳에 왔다며 "배지영이랑 애들 데리고 오고 싶네"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출장 장소에 있을 때의 생각일 뿐, 막상 집에 오면 까마득해진다. 누구보다 남편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남편은 행동했다. 그곳에서 바로 항공권을 끊고 호텔을 예약했다. 우리 식구는 비 오는 금요일 날 비행기를 탔다. 남편이 무조건 첫 번째로 가야 한다는 곶자왈에 갔다. 제주도 땅은 물을 품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런데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바닥에 방수처리를 한 인공 호수랬다. 기차에서 내려 가로질러 건너갔다.

"엄마, 미끄러지니까 조심하세요."
"엄마, 계단 오를 때는 내 손을 꼭 잡아요."

세 살짜리 꽃얄리군의 말은 안개비와 섞여서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기차역이 나왔는데도 남편은 더 천천히 가자고만 하더니 큰 아이가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군것질 거리를 파는 풍차 모양 상점은 물안개에 휩싸여 수채화 그림 같았다. 그 속에서 걸어 나오는 남편은 활짝 웃고 있었다. 어여뻤다.

"저도 가야 해요? 집에 혼자 있어도 되는데요?"

큰 아이는 출발 전까지도 시큰둥했다.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이 훨씬 좋은, 뭘 물어보면 대답하는 것이 귀찮아서 짜증이 나 버리기도 하는 (집에서는) 과묵한 아이. 우산이 걸치적  거려서 비 맞는 편이 낫고, 물안개 낀 날씨가 어쩐지 좋은 열세 살 소년. 친구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는 얼굴 표정이 싹 바뀌어서 웃음이 흔한 10대.

집도, 놀이터도, 동물들도, 모두가 작은 마을이 있었다.
▲ 곶자왈 에코랜드 집도, 놀이터도, 동물들도, 모두가 작은 마을이 있었다.
ⓒ 우리집 남성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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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큰 아이는 배 지붕에 고인 물을 쏟아지게 하며 놀고 있다.
▲ 나, 소년이야.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큰 아이는 배 지붕에 고인 물을 쏟아지게 하며 놀고 있다.
ⓒ 우리집 남성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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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역에 내렸을 때 꽃얄리군은 "언덕이 있네?"라고 했다. 맑은 날이었다면 오래도록 놀 만한 곳, 미끄럼만 타도 충분히 재밌을 것 같은 기울기의 언덕이었다. 그 위에 올라서니까 집도, 놀이터도, 모든 것이 작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비가 오니까 사진을 찍고 서둘러 가는데 큰 아이는 '남성 호르몬'이 넘쳐서 배 지붕에 고인 물을 쏟아지게 하며 놀았다.

커튼 속이나 후미진 구석을 좋아하는 꽃얄리군은 집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엄마처럼 쑥쑥 자라고 싶다며 나를 장신 대접해 주는 아이는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엄마도 들어오면 좋겠어요, 빨리요"라고 초대해 주었다. 우산을 들고, 카메라를 걸친 채, 처자식이 가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따라다니는 남편은 자꾸만 물었다.

"재밌어? 배지영은 뭐가 재밌어?"
"지금 이러고 다니는 게 다 좋고 재밌어. 내가 집에서는 똥멍청이 같을 때가 많잖아. 애들이랑도 성질내면서 싸우고, 밥도 못하고."

남편은 우산을 들고, 카메라를 걸친 채, 처자식이 가는대로 사진을 찍으며 뒤따랐다. 그러면서 자꾸 재밌냐고 물었다.
▲ 꽃차남과 함께 남편은 우산을 들고, 카메라를 걸친 채, 처자식이 가는대로 사진을 찍으며 뒤따랐다. 그러면서 자꾸 재밌냐고 물었다.
ⓒ 우리집 남성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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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우리를 기차 역 뒤에 있는 곶자왈 숲길로 이끌었다. 흙길이었다. 나무들은 원시의 느낌이 났다. 남편에게 행동하라고 꼬드긴 곳이 여기겠지 짐작해 보았다. 먼 옛날 이곳에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은 쪼개지면서 요철처럼 쌓여 보온·보습 효과를 내고 있다. 그래서 열대식물, 북방한계,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함께 사는 독특한 숲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만화영화들에 나오는 숲 같아서 나도 정령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성싶었다. 제 아빠하고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나한테만 딱 들러붙는 꽃얄리군을 잠시 떼어놔도 울지 않을까. 아이는 선선했다. <뽀로로>에 나오는, "패티보다 더 안 좋은" 아빠 곁으로 갔다. 뛰어 댕기고,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한 마리 코끼리가 거미줄에 걸렸네. 신나게 그네를 탔다네."

아기 사람들이 늘 웃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대부분은 지시와 요구를 하며 찡찡댄다. 한 번 웃을 때, 한 번 노래할 때의 파괴력이 굉장할 뿐이다. 그들은 지배하려는 본능을 숨기지 않는다. 보드라운 몸, 기분 좋은 냄새로 자신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사람들한테만 거만함을 거둔다. 미인처럼, 아기 사람은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큰 아이가 어릴 때에 우리 둘이는 시멘트로 포장하지 않은 길을 찾아서 걸어 다녔다. <월령 공주>나 <이웃집 토토로>에 열광했다. 아이는 그때 기억을 소환했을까. 줄곧 혼자서만 먼저 가 버리더니 가만히 멈추어 서 있었다. 핸드폰이라는 것은 게임과 '카톡', 문자로만 쓰는 아이가 나무 사진을 찍기 위해 이리저리 각도를 맞추었다.

숲의 정령들이 있을 것 같은 곶자왈. '카톡'에 올리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특별 부탁했다.
▲ 곶자왈 숲 숲의 정령들이 있을 것 같은 곶자왈. '카톡'에 올리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특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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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곶자왈에서 뜬금없어졌다. 문익점이 생각났다. 고려 말, 그는 원나라로 가는 사신이었다. 그때 왕은 반원자주를 펴는 공민왕. 원나라는 공민왕이 못마땅해서 덕흥군을 새 왕으로 정하고는 고려로 출격했다. 원나라에 있던 대부분의 고려 사신들처럼 문익점도 덕흥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최영 장군은 완전 가열차게 싸워서 공민왕을 지켜냈다.

문익점은 역모가 패배로 끝나고 나서 고려로 돌아왔다. 엄중한 처벌이 기다리는 것은 기정사실. 두려웠을 법도 한데, 그는 목화씨를 갖고 귀국했다. 원나라에 드나든 수많은 사람들 중, 문익점만이 솜옷이 되는 식물을 눈여겨 본 거다. 그는 목화로 떼돈 벌기를 꿈도 꾸지 않았을 거다. 백성들이 따뜻한 옷 입는 것을 바랐을 것이다.

남편은 보통의 가장들과 같았다. "여기 좋네! 식구들이랑 와 봐야지" 결심해도, 돌아오면 항상 바빴다. 걸리는 것도 많았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자기 세계를 쌓아올리는 큰 아이, 아빠랑 단둘이 있으면 눈물 콧물을 쏟는 꽃얄리군,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으로 C형 간염 치료를 하는 아내와 곶자왈에 오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해 버렸다.

자연 그대로를 가깝게 끼고 달리는 기차 때문에 남편은 둘째 꽃얄리군을 꼭 태워주고 싶었다고 했다.
▲ 에코랜드 기차 자연 그대로를 가깝게 끼고 달리는 기차 때문에 남편은 둘째 꽃얄리군을 꼭 태워주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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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과 함께 곶자왈에 오고 싶었던 남편, 뜻을 이루다.
▲ 이런 순간을 원했던 거겠지. 식구들과 함께 곶자왈에 오고 싶었던 남편, 뜻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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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태그:#제주 곶자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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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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