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 민주화운동의 원로, 통일운동가, 지역 인권운동의 선구자'그의 이름 앞에 붙는 접두사다. 이명남 목사(71, 당진장로교회 목사). 그가 오는 11일 목사 은퇴식(오전 11시 당진장로교회)을 갖는다. 이같은 소식에 곳곳에서 '벌써?'라는 의문부호가 찍혔다. 지역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는 언제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사를 지난달 31일 당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대전 토박이인 이 목사는 당진에서만 31년간 목회활동을 했다. 첫 목회지인 충북 옥천 동이교회(동이면), 충북 진천군 문백교회(문백면), 전북 임실군 성수교회(성수면)는 당진에 터를 잡기 전 그가 거쳐 간 곳이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독재권력에 날선 비판을 가했다. 1980년대 초 당진에 정착하자마자 대전충남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84년에는 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을 맡았고, 85년에는 충남민주화운동본부 상임의장을 맡는 등 저항운동의 선두에 섰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78년인가 임실군에서 목회를 하면서부터야. 그때 농촌은 피폐화된 데다 이농현상이 심각했어. 농촌과 농민문제를 들여다보다 보니 가톨릭농민회와도 연관을 갖게 됐고…." 농촌 목회하다가 '농촌문제' 접하고 사회운동 6월 항쟁으로 전국이 들끓었던 1987년에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상임의장을 맡아 30여 명의 다른 목사들과 서울 서대문에서 13일간 삭발 단식농성을 벌였다.
"아마 목회자 수십여 명이 집단으로 삭발단식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 아니었나 싶어. 그때 <조선일보> 네컷 만화 '고바우영감'에 '목사를 만나려면 교회에 가지 말고 이발소로 가라'는 내용이 실렸어. 죄 삭발하러 갔다고 비꼬는 내용이었지만 그만큼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정의평화실천협의회 일을 주도하는 동안 여러 일을 벌였다. 민정당사는 물론 전경련 사무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대전에서도 대학생과 청년단체들이 시위를 많이 벌였어. 그러다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많았지. 목사가 앞장을 서니까 학생들 연행되는 걸 막는 효과가 있었어. 그러니 안 나설 수가 있어? 연행된 학생들 경찰서에 가서 데리고 나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 시대가,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지."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매진하던 그는 일찌감치 통일운동에 눈을 돌렸다. 가택연금과 집회불허도 뒤따랐다. 당시 그의 앞에 붙은 수식어는 '운동권 목사' '빨갱이 목사'였다.
"남북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도, 인권도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어. 깨달은 이상 통일운동을 안할 수 있나. 한국교회가 통일운동 물꼬를 튼 82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어"반독재 운동에서 인권·통일운동으로
그는 기독교계에서 국가보안법철폐운동을 주도했고, 남북인간띠잇기를 비롯해 '통일'을 위한 일이면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지난 2005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평화통일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에서 개최된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방북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진지역민들은 이 목사에게 누구도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경찰에서 '좌경' 이미지를 붙여줬는데 지역에서 목회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 '좌경'보다는 지역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바른 말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더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실제 이 목사는 1980년 당진에서 처음으로 새마을금고를 만들었다. 당시 직원 1명으로 시작한 당진새마을금고는 현재 자산 800억 원대의 튼실한 지역금고로 성장했다.
"그때만 해도 은행도 구경하기 힘들었지만 문턱도 엄청 높았어. 고리대금업이 성행했지. 자녀등록금 장만한다고 소 팔고 논 팔던 때였지. 가난한 농민들과 소상공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새마을금고를 만들었어."이 밖에도 충남환경운동연합의장, 재일동포인권선교위원회위원장, 사형제폐지위원회 공동의장, 지방분권운동연대 공동상임대표 등 궂은일을 도맡아왔다.
"후배들도 통일운동에 좀 더 집중했으면..."
지난해 그는 통일운동에 헌신하고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애써온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현 정부 들어 북한을 적대시하고 무시하는 정책이 너무 많아. 어디에서도 동족애가 느껴지지 않아. 동서독이 분단돼 있었을 때 서독이 동독을 돕지 않았다면 통일은 없었어. 시민들도 북한에 조금만 지원해도 '퍼주기'라고 하는데 동족애로 봐줬으면 좋겠어. 어디든 어려울 때 돕지 않으면 적대감과 갈등이 더 커지는 법이야. 시민사회진영도 통일문제에 소홀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 통일운동에 보다 집중했으면 좋겠어."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노근리 사건 대응사업'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노근리사건 유가족들이 찾아왔어. 아무도 미국이 관련된 일이라고 나서지 않는다는 거야. 바로 '노근리사건진상조사단장'을 맡아 조사에 착수했어. 노근리 사건이 쟁점이 되기 전의 일이야. AP통신이 사건을 다루면서 쟁점이 됐는데 그 전에 AP통신 기자를 만나 사건을 설명하기도 했어." KBS 시청료거부운동에 대한 일화도 소개했다.
"90년대 초경인가 KBS 시청료거부운동이 벌어졌는데 처음 시작은 광역시 중심으로 시작했어. 그런데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다음에 당진이 이름을 올렸어. 대전이 첫 시작을 하기 어렵다고 해서 내가 '당진'에서 한다고 했어. 열심히 했고…." "한국교회 세속화 심각... '루터'가 돼 교회 바꾸자"그는 한국교회 현실을 질타하고 종교개혁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강도높게 내고 있다. 최근에는 한 기독교계 신문에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제목의 글을 통해 한국 기독교계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회가 물량위주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어. 교회세습에다 명예욕, 금권… 각 교단의 총회장 선거는 금권선거로 중세 성직 매매와 다를 바 없어. 영적인 순결의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양적인 확산에만 급급해.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부패한 종교정책에 대항했듯이 우리도 루터가 되어서 교회안의 비종교적 요소들을 과감히 개혁해야 해." 지난해 당진에서는 군수가 거액을 횡령하고 축재한 일이 드러나 떠들썩했다. 전임군수에게는 징역 8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이 목사는 전임군수가 구속 수감되자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또 구속된 전임군수를 면회하며 위로하고 있다. 이를 두고 지역사회에서 그가 '정의'와 '윤리'의 잣대보다는 '사적인 관계'에 치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우선 구속된 전임군수는 열린우리당으로 군수에 당선됐다가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어. 당시 내 정치적 성향이 열린우리당 쪽이여서 정치적으로 그를 후원한 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이후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뒤부터는 관계가 단절됐어."개인적인 관계로 그를 돕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전임군수가 어려워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모두 그를 외면하고 버리더라구. 내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목회자인 나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듯, 양이 웅덩이에 빠졌는데 '나쁜 양'이라고 '미운 양'이라고 외면하면 안 되는 것 아니겠나. 그가 나를 원하는 이상 출소할 때까지 면회를 다닐 생각이야." 그에게 목사 은퇴 후 계획을 물었다. 그는 현재 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인권·통일운동에 정년이 없잖아. 문익환 목사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통일운동을 벌였는데… 통일문제든, 종교개혁 문제든 할 일이 있다면 여력이 있는 한 끝까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