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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누리길 중 일부. 서삼릉과 원당종마목장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
 고양누리길 중 일부. 서삼릉과 원당종마목장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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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월 9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은 '고양누리길'이다. 경기도 고양시가 지정한 도보여행길 중 하나다. 지하철 3호선 원당역 부근에서 시작해, 삼송역 부근에서 끝난다. 원래 도보여행 코스로 지정한 곳이지만, 길 대부분이 아스팔트로 연결돼 있어 걷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게 더 적합하다. 날 맑은 가을 날, 부담 없이 다녀올 자전거여행 코스로 제격이다.

원당역(1번 출구)을 나와 길을 건너면, 코앞에 사근절천 표지판이 보인다. 고양누리길은 바로 천변의 시멘트길을 따라가면서 시작된다. 삼송역까지 가는 길 역시 길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는 길 중간 중간 고양누리길이라고 쓰인 표지판과 리본이 길가 전봇대나 나무 몸통에 붙어 있는 걸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이 처음부터 너무 순조롭게 풀린다. 이러다 중간에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생각은 기우다. 고양누리길은 한마디로 참 속이 편한 여행길이다. 급할 것도 힘들 것도 없는 여행길, 자전거 안장 위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이 이렇게 편해 보이는 것도 참 오래간만이다.

고양누리길이 시작되는 곳.
 고양누리길이 시작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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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에 달아놓은 고양누리길 표지판.
 전봇대에 달아놓은 고양누리길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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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다리술박물관'이 나온다. 채 500미터도 달리지 않은 거리다. 박물관 앞마당에 거대한 술통이 버티고 서 있는 게, 여기는 술박물관이라고 말해준다. 술박물관답게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척지근한 술지게미 냄새가 풍긴다. 왠지 시작부터 술에 취해 몽롱해지는 기분이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 안쪽 벽에 '오덕삼반(五德三反)'이라는 제목이 적힌 액자가 걸려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액자치곤 글이 조금 긴 편이다. 그 내용을 줄이면 막걸리는 '오덕'으로 다섯 가지 좋은 점이 있으며, '삼반'으로 반유한적∙반귀족적∙반계급적인 성격을 가진 술이라는 설명이다. 막걸리야말로 서민지향적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쌀'막걸리 애호가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

술맛이 좋기로 유명한데, 정작 배다리술박물관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4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1966년 박 전 대통령이 고양시 소재 H골프장에서 골프를 하고 나오다가 삼송리에 있는 주점 '실비옥'에 들러 막걸리를 마신다. 그때 그가 마신 술이 배다리 술도가의 모태인 능곡 양조장에서 만든 것이다.

막걸리 맛이 좋았던지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돌아가서도 능곡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를 정기적으로 받아 마신다. 그러자 양조장에서는 '대통령 전용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박 전 대통령이 마실 막걸리를 양조장 한 곳에서 특별히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일은 박 전 대통령이 10·26으로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배다리술박물관 전경.
 배다리술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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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은 살아 있을 때, 안가에 당대의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다놓고 고급 양주를 마시며 수시로 유흥을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살다간 박 전 대통령이 반유한적∙반귀족적∙반계급적인 막걸리를 즐겼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막걸리를 마신다고 다 친서민적일 수는 없다. 그래도 친서민적인 면을 강조하는 막걸리 박물관에서 서민 위에 군림했던 '박정희'와 맞부딪혀야 하는 일이 결코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실비옥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실비옥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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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2층에 박 전 대통령이 실비옥에서 북어포와 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밀납인형이 있다. 밀납인형 뒤로는 박 전 대통령이 한 허름한 촌가에서 측근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도 걸려 있다.

박정희 정권은 한때 국민들이 쌀막걸리를 마시는 걸 금지했다.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어 마시게 했다. 몰래 쌀막걸리를 만들어 마시다 들통난 이야기가 종종 신문에 나오곤 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 무렵 박 전 대통령이 마신 막걸리는 밀가루막걸리였을까, 쌀막걸리였을까? 정답은 쌀막걸리다. 양조장에서 '대통령 모르게' 쌀로 막걸리를 만들어 '납품'했다고 한다(문화일보, 2010.2.3).

박 전 대통령은 쌀막걸리를 마시면서 밀가루막걸리도 쌀막걸리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나?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젠장 그랬거나 말거나, 배다리술박물관에 와서 150년이나 되는 전통을 가진 막걸리를 맛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게 아쉽다.

배다리술박물관에서 서삼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배다리술박물관에서 서삼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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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어 면적이 1/10로 줄어든 왕릉

배다리박물관을 지나면 바로 수역이마을이다. '마을 앞에 너른 들판이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 2000년대 들어 먹거리촌으로 변했다고 한다. 수역이마을로 가는 길에 몇 마리 개들과 조우한다. 이 개들과 마주치는 일을 피하려면 이정표가 지시하는 산책로를 버리고 아스팔트길을 따라 마을을 관통하는 게 좋다. 음식점거리를 지나 바로 오른쪽 길로 돌아들면 고양누리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서삼릉 입구 삼거리 정류장.
 서삼릉 입구 삼거리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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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역이마을에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서삼릉이다. 서삼릉은 효릉, 희릉, 예릉과 같은 왕과 왕후들의 무덤을 비롯해, '역대 조선조의 왕과 왕비, 공주, 대군 등의 태'를 모신 곳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후궁들과 옹주, 공주, 대군들의 무덤까지 무더기로 자리잡고 있어 '단일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왕실 묘소'가 들어서 있다.

이곳의 묘소와 태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도굴을 피해 전국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를 불문한다. 서삼릉은 희릉과 예릉, 효창원 등 극히 일부 묘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공개지역으로 남아 있다. 효릉은 아쉽게도 비공개지역에 속해 있다.

비공개지역이 넓은 탓인지, 능소가 왕릉치고는 상당히 협소해 보인다. 서삼릉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 서오릉이나 동구릉과 같은 규모의 왕릉군을 염두에 두고 간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원래 서삼릉은 그 면적이 지금보다 10배 이상은 큰 곳이었다고 한다. 그 면적의 일부가 지금 종우와 종마 목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삼릉과 원당종마목장으로 들어가는 언덕 길. 언덕을 내려가면 능과 목장이 나온다.
 서삼릉과 원당종마목장으로 들어가는 언덕 길. 언덕을 내려가면 능과 목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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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푸른 초원이 아름다운 종마 목장

'서삼릉입구' 버스정류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능 입구까지 들어가는 길이 매우 아름답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 장소로 자주 등장하는 길이다. 고양누리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은 아무래도 원당종마목장이다. 목장은 서삼릉과 이웃해 있다. 입구마저 나란히 붙어 있어 서삼릉에서 나와 바로 종마목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왕릉 옆에 바로 말 목장이 들어서 있는 건 시대가 남긴 비극이다. 시대가 바뀌어서 지금은 왕릉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종마목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종마목장은 데이트 명소로 알려진 까닭에 젊은 연인들이 자주 찾는다. 연인들 못지 않게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이들이다. 목장 한쪽에서는 소풍을 나온 유치원생들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소란스럽게 뛰어다니고 있다.

원당종마목장 벤치가 있는 나무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원당종마목장 벤치가 있는 나무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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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바람처럼 뛰어다녀야 할 말들이 오히려 가만히 멈춰 서서 그런 인간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종마목장은 사람들이 평소 가까이 하기 힘든 독특한 장면과 광경을 보여준다. 흰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초록색으로 뒤덮인 넓은 초원을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있는 하얀색 목책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눈앞을 가로막는 사물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당종마목장의 푸른 초원.
 원당종마목장의 푸른 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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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종마목장의 근육질 종마들. 몸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느라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다.
 원당종마목장의 근육질 종마들. 몸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느라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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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초원에 점점이 서 있는 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기 저기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에 아랑곳 없이 유유자적 풀을 뜯고 있다.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이다. 천고마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가을날에 이처럼 잘 어울리는 풍경이 또 있을까 싶다. 종마목장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개장한다. 입장료는 무료다.

종마목장을 나와 삼송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농협대학 앞을 지난다. 농협대학 역시 가을날 단풍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단풍이 절정을 지났지만, 여전히 여기 저기 붉은 기운이 남아 있다. 교정이 매우 조용하다. 낙엽을 밟으며 사색을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농협대학 안 단풍나무. 주변이 피를 쏟은 듯 붉은 단풍잎으로 덮여 있다.
 농협대학 안 단풍나무. 주변이 피를 쏟은 듯 붉은 단풍잎으로 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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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누리길은 전체적으로 매우 한적한 편이다. 아스팔트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가끔 나타나지만 여행에 방해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흙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길은 마을 앞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숲 속을 가로질러 지나가기도 한다. 전체 거리 약 8km. 길은 짧지만, 중간 중간 머물렀다 가야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거리는 그보다 더 늘어날 수 있다. 농협대학에서 삼송역까지 가는 길에 대규모 아파트 공사 현장을 지난다. 공사 차량이 많이 지나다니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서삼릉 내 희릉.
 서삼릉 내 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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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에 자전거를 실을 때 유의할 점. 자전거는 원칙적으로 주말이나 공휴일에만 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만 접이식 자전거는 평일에도 가능하다. 이때 접이식 자전거는 손에 들 수 있는 수화물로 간주된다. 자전거를 가지고 전철에 오를 때는 출퇴근 시간 같이 사람들이 많은 시간대를 피한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한 한, 객차 양 끝 칸에 올라타는 게 좋다.


태그:#자전거여행, #원당종마목장, #서삼릉, #배다리술박물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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