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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FTA 비준안을 기습 상정하자 의장석으로 뛰쳐나간 최규성 민주당 의원이 의사봉 빼앗기를 시도하고 있다. 오른쪽에 마스크를 쓴 김진표 원내대표도 보인다.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FTA 비준안을 기습 상정하자 의장석으로 뛰쳐나간 최규성 민주당 의원이 의사봉 빼앗기를 시도하고 있다. 오른쪽에 마스크를 쓴 김진표 원내대표도 보인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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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26일 아침에 노동법을 기습처리한 뒤 당시 우리는 승리했다고 양지탕에 가서 축배를 들었는데 이것이 YS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고 곧바로 한보사건이 터지고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50년 보수정권을 진보에 넘겼다."

지난해 12월 13일,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던 홍준표 대표가 한 말이다. 홍 대표는 각종 서민예산 누락 등으로 여론의 반발을 산 한나라당의 '2011년도 예산안 날치기'를 비판하면서 "근본 문제는 당이 (청와대에 끌려 다닐 뿐)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2011년도 예산안 날치기'와 '1996년 노동법 날치기'는 '민심에 역행한 날치기'라는 공통점도 있고, '날치기 뒤 같은 식당에서 자축파티를 열었다'는 부분도 홍준표 당시 최고위원으로 하여금 유사성을 느끼게 했을 법 하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 된 2012년 11월 22일, 홍준표 대표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특공대의 비밀작전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한미FTA 비준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이날 밤 '양지탕 자축파티'는 없었지만 과정의 유사성을 보자면 이번 한미FTA 날치기 처리는 '노동법 날치기'와 훨씬 더 유사하다.

4개 호텔 합숙 뒤, 새벽에 관광버스 타고 국회로

1996년 12월 26일, 전국연합소속 회원 200여 명이 신한국당사 앞에서 노동관계법과 안기부 법 개정안 기습처리와 관련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1996년 12월 26일, 전국연합소속 회원 200여 명이 신한국당사 앞에서 노동관계법과 안기부 법 개정안 기습처리와 관련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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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26일의 '노동법 날치기 작전'은 그 전날부터 개시됐다. 신한국당 원내지도부는 25일 오전부터 지방에 있는 의원들에게 '전화대기'를 지시했고, 이날 오후 집으로 향하는 듯했던 신한국당 의원들은 서울시내의 가든호텔, 나이아가라호텔, 리버파크호텔, 팔래스호텔 등 4곳에 집결했다. 지방에 있던 의원들도 그곳으로 모였다. 서청원 원내총무는 야당의 눈과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오후 9시경 귀가했다.

오전 4시 국회 본회의 진행에 필요한 속기사 등 국회 직원들이 비상소집됐다. 신한국당 의원들은 각 집결지에 대기해 있던 관광버스를 타고 국회에 도착, 곧장 본회의장에 모였다. 오전 6시, 신한국당 의원 157명 중 154명이 본회의장에 있었다(늦게 도착한 이신범 의원 포함하면 155명).

김수한 국회의장 대신 오세응 부의장이 의장석에서 본회의 개의를 선언했다. 근로기준법, 노동관계조정법 등 4개의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등 11개 법안을 가결처리하는데 딱 7분이 걸렸다. 이때 날치기에 가담한 이들 중에는 초선의원이었던 홍준표 대표와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있었다.

이번 한미FTA 날치기에는 '호텔 합숙'이나 '합동 관광버스 등원'은 없었지만, 치밀한 계획 하에 야당과 언론을 따돌린 '전격 날치기'라는 점이 아주 흡사하다.

황우여, 김진표 기만 뒤 직권상정 요청

22일 오전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난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요구했던 '양국간 ISD 폐기·유보를 위한 재협상 서면합의'를 언급하면서 '서면합의를 갖고 오면 민주당은 어떻게 할 것이냐. 표결처리에 응하겠다는 것이냐. 어떻게 할 건지 손학규 대표가 청와대를 향해 얘길 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황 원내대표의 말은 민주당에게 '표결처리 약속만 하면 서면합의를 갖고 오게 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전히 여야합의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황 원내대표가 김 원내대표에게 강행처리 언질을 준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으나, 민주당측은 전면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 전날 한미FTA 날치기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고 홍 대표, 황 원내대표, 김정권 사무총장, 이명규 원내수석부대표 등 4명만 계획을 아는 상태였다.

김 원내대표에게 '희망의 끈'을 던져준 황 원내대표는 지방에 가 있던 박희태 국회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 원내대표는 본회의 소집 및 비준안의 본회의 직권상정을 요청했고, 박 의장은 이를 받아들여 오후 3시에 본회의장 문을 열기로 했다. 

'거사' 1시간 전,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회본의장과 30여m 떨어진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에 모였다. 홍 대표는 이날 '안 온 의원들 다 오라고 하라'고 성화했지만, 낌새를 눈치 채긴 어려웠다. 지난 17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홍 대표는 "한미FTA 처리에 대한 끝장토론을 벌이자"면서 "의원 모두 참석하라"고 강조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2012년도 예산안 처리에 대한 끝장토론 의원총회'를 명목으로 열린 의원총회는 약 1시간 뒤 '날치기를 위한 집합'으로 판명됐다.

'국가대사'라면서 국민과 언론 막은 한나라당

지난해 12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이 2011년 예산안을 강행처리를 시도하자,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과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이 4대강 예산 전액 삭감과 민생 복지 예산 확보를 요구하며 단상에서 버티다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붙들려 저지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이 2011년 예산안을 강행처리를 시도하자,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과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이 4대강 예산 전액 삭감과 민생 복지 예산 확보를 요구하며 단상에서 버티다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붙들려 저지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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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국회의장은 본회의 직권상정에 필요한 심사기일 지정, 경호권 발동 등의 조치들을 충실히 이행해주면서도 의사봉은 부의장에게 넘겼다. 이 점도 '노동법 날치기' 때와 유사하다. 그러나 언론취재를 원천봉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번 날치기는 '노동법 날치기'를 뛰어넘는다.

22일 오후 4시 23분 정의화 부의장이 개의를 선언한 직후 상정된 안건은 이 본회의를 비공개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 안은 가결됐고, 본회의가 비공개됐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국회 본회의장 진입이 시작된 오후 3시 5분부터 1시간 10분을 넘는 시간동안 본회의장 언론 방청석 출입구는 굳게 잠겨 있었다.

'본회의는 공개한다'는 국회법 75조에 따라 개의 순간부터 본회의 공개여부에 대한 표결과 가결 선포가 있기까지는 방청석은 열려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의사경호과 관계자는 "오늘 방청석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고만 했다.

국회의장과 여당은 처음부터 언론의 눈과 귀를 막고 한미FTA를 처리하려고 국회법조차 무시한 방침을 세워놨던 것이다. 그러나 야당 당직자가 4층 본회의장 방청석 출입구로 향하는 유리문을 깨고 기자들을 진입시키면서 비공개로 진행하려던 한나라당의 계획은 무산됐다.

'노동법 날치기' 땐 본회의 비공개 의결은 없었다. 언론이 '새벽의 기습'을 몰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한미FTA 날치기'는 자신들이 국익을 위해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했던 사안을, 국민의 눈과 귀를 막은 채 처리하려고 했던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 특히 외국과의 협정을 이렇게 비공개로 비준한 적은 없었다.


태그:#노동법날치기, #한미FTA 날치기, #홍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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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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