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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40분 명동 거리. 한미 FTA 날치기 규탄 시위대가 모이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8시 40분 명동 거리. 한미 FTA 날치기 규탄 시위대가 모이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 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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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준 무효!"
"날치기는 무효다!"
"저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무슨 일 났나?"

22일 오후 8시 40분 명동. 쇼핑을 나온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3시께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한미FTA 협정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에 항의하는 500여 명의 시위대가 명동에 집결해서 구호를 외쳤기 때문이다.

구경하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일부는 시위 행렬에 동참했다. 불과 10여분 만에 시위대 규모는 1000여 명 이상으로 늘어 쇼핑 천국 명동을 점령했고 곧바로 명동성당 앞 차도로 향했다. "비준 무효"와 "명박 퇴진"이라는 구호가 퍼지면서 퇴근하던 시민들과 근처 직장인들이 합류해 시위대열은 더 커져갔다. 30여분 후에는 약 5000여 명 정도의 시민들이 모여 한미FTA 날치기 통과를 규탄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뉴스 보면 짜증나서 관심 끄고 있었어요. 근데 역시 한나라당이네요."

직장인 김민수(35)씨는 요즘 지속적으로 오르는 물가 때문으로 박봉으로 견딜 수 없어 하루하루가 스트레스라고 했다. 직장에서 관리팀장을 맡고 있지만, 비정규 계약직이라서 본사 정직원의 반도 안 되는 월급으로 생활한다는 것이다. 내년에 재계약 여부를 결정해서 회사에 남을지,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했다.

쇼핑을 하러 명동에 들린 시민들과 트위터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비준무효"를 외치며 명동성당 방향으로 이동 중인 모습.
 쇼핑을 하러 명동에 들린 시민들과 트위터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비준무효"를 외치며 명동성당 방향으로 이동 중인 모습.
ⓒ 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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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을 나왔다가 시위에 참여했다는 박미진(37)씨도 "감당이 안 되는 생활비 때문에 살기가 힘들다"며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정직원으로 근무하는 그녀는 "아이 양육비와 교육비만으로도 월급이 거의 다 나간다"고 말했다. 유치원비만 약 100만 원 정도가 들어가고 그 외 교육비까지 합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 역시 대기업에 다니고 있어 돈을 많이 번다는 주변의 인식도 억울하다고 한다. 벌수록 그만큼 들어갈 곳이 많은데 경쟁적인 사회구조가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학생들 가운데는 대출금을 걱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60대 노인은 대통령을 향해 욕설만 늘어놓았다.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한나라당이 날치기 통과시킨 FTA가 자신들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 것이라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도 살기 힘들어 짜증나는데 미칠 것 같다며 한숨을 쉬거나 열불을 토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이명박 심판"이라는 피켓을 다시 꺼내 들었다.

궁지에 몰린 서민들에게 드리운 그림자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동안 팍팍한 살림살이로 내몰린 서민들의 주머니를 채워준 것은 바로 대출이다. 그동안 은행권의 대출이 증가하자 정부는 규제 방안을 내밀었지만 21일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가계 빚 규모가 9월 말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은행권 대출이 어려워진 대신 신용카드사나 보험사를 통한 대출이 늘어났다. 특히 보험사 대출금액이 카드사를 앞지르면서 3조원이나 증가했다고 한다.

보험사 등의 금융사가 들어선 마포구 공덕역 부근.
 보험사 등의 금융사가 들어선 마포구 공덕역 부근.
ⓒ 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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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 한미 FTA 규탄 시위가 벌어진 다음날. 카드사와 보험사가 늘어선 서울 마포구 공덕역 근처로 향했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최모씨가 모인다. 보험회사의 추심원인 그는 오늘도 300여명의 연체 고객들에게 독촉 전화를 걸어야 한다. 짧은 오전시간 동안 만나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 보험회사 약관 대출이 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가?
"나는 주로 신용대출을 추심한다.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보니 약관 대출로 되어 있던데 사실은 신용대출이 더 심각하다. 금액도 더 크고..."

- 보험회사에서도 신용대출을 해주고 있나?
"그렇다. 우리 회사를 포함해서 삼성, 대한, 교보 등 보험사들이 고객들에게 신용대출도 해주고 있다. 나는 주로 2개월 정도 단기 미납된 고객들을 관리한다."

- 회수는 잘 되는 편인가?
"그렇지 않다. 갈수록 빚을 못 갚는 고객들이 상당히 많다. 100명 가운데 40명만 갚아도 엄청나게 많은 거다. 보통 회수율은 15~25% 정도가 평균이다. 대부분이 3~5개월 장기 미납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못 갚을 경우 채권추심으로 관리하다가 다른 회사로 팔아버린다."

- 고객들이 왜 돈을 못 갚는 것 같나?
"감당할 수 없으니까. 한번 연체했던 사람들이 계속 연체한다. 이미 다른 카드사나 보험사 약관대출은 물론이고 대부업체까지 끌어다 쓴 사람들이 많다. 일주일 정도 전화 걸다가 겨우 통화되면 대놓고 개인파산 해야겠다는 사람도 있다. 한 번 대출 받았던 사람들이 계속 빚을 내고 궁지에 몰린다."

- 연체된 고객들의 연령대가 주로 어떻게 되나?
"50대 이상이 가장 많다. 5~60대가 70% 이상은 된다. 60대 부터는 돈 없는데 어쩌겠냐고 오히려 따진다. 신용하락으로 인한 불이익도 전혀 신경 안 쓴다. 전화 안 받아서 현장 실사 보내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간혹 70대 이상 고객...한 번은 실사 나갔더니 치매에 걸려서 대출이고 뭐고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서울시의 일자리 플러스 센터(http://job.seoul.go.kr)에 올라온 고령자 채용정보들. 대부분이 박봉의 관리원이나 청소원, 급식실 배식원 등의 비정규 서비스업종들이다.
 서울시의 일자리 플러스 센터(http://job.seoul.go.kr)에 올라온 고령자 채용정보들. 대부분이 박봉의 관리원이나 청소원, 급식실 배식원 등의 비정규 서비스업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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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부터 생활 자금이나 사업비 조달을 위해 돈을 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기업의 동내 상권 진출로 자영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고령층들은 빌린 대출금을 갚지 못해 대답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H 카드사의 어느 대출 상담원은 며칠 전 3000만원을 대출해간 60대 자영업자 고객이 나중에 못 갚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을 한 것이 자꾸만 걸린다고 한다.

금융대국을 내세우는 대한민국의 가려진 그늘 속에는 궁핍의 나락에 빠져든 서민들이 있었다. 20~40대까지 주경제활동인구들은 실업과 고물가, 임금격차와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달리고 50대 부터는 생존을 위한 끈을 겨우 붙잡고 있다.

그동안 정부가 늘린 일자리들은 시민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이고 열악한 환경의 업종들이 태반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나라당의 날치기로 통과된 한미 FTA는 과연 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22일 오후 8시 30분 명동 거리에서 시작된 시위의 규모가 30분 만에 열배로 불어난 것을 보면 시민들의 마음은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태그:#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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