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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비서실에서 휴대폰 문자로 연락이 온 건 10월 30일, 박원순씨가 시장으로 당선되고 처음으로 맞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후보시절보다 오히려 시장이 되고 나서 더 바쁠 것인데 무슨 일 때문에 내게 연락을 했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혹시, 그동안 지지했던 사람들 중에서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돌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점심 때가 지나서 문자를 보낸 신영희 비서관에게 전화를 했다. 용건은 간단했지만 무척 놀랄 만한 것이었다. 시장님께서 나를 따로 한 번 보고 싶다는 거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책방 문을 열기 전 시청에 들렀다. 그때 비로소 시장님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를 알았다. 시장 집무실을 새로 꾸며야겠는데 내 아이디어를 좀 빌리고 싶다는 얘기였다. 신영희 비서관은 집무실이 있는 7층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도대체 답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집무실 상황은 더 심했다. 눈대중으로 봐도 100제곱미터 가까이 될 만한 공간인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벽이며 집기들을 온통 진한 갈색으로 덮어버린, 말하자면 회사 중역 사무실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부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크기는 백제곱미터 남짓에 사방이 모두 갈색 벽으로 마감돼 있고 의자와 탁자 모두 그에 맞추었다. 고풍스러운 원목 책장에 들어 있던 <서울 600년 역사> 시리즈 책은 전임 시장 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라는데 꺼내보니 그 중 몇 권은 책 없이 빈껍데기만 있었다.
▲ 처음 시청에 가서 참고용으로 찍은 집무실 사진 크기는 백제곱미터 남짓에 사방이 모두 갈색 벽으로 마감돼 있고 의자와 탁자 모두 그에 맞추었다. 고풍스러운 원목 책장에 들어 있던 <서울 600년 역사> 시리즈 책은 전임 시장 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라는데 꺼내보니 그 중 몇 권은 책 없이 빈껍데기만 있었다.
ⓒ 윤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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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부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시장님은 내가 전에 희망제작소 사무실을 디자인 해 준 것을 기억하고 다시 내게 도움을 요청했나 본데, 지금 집무실은 그때와는 너무 다르다.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사무실은 시장 집무실과 비교하면 크기가 오분의 일 정도 밖에 안 된다. 내 역량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1월 첫 주 목요일에 다시 시청에 찾아가서 압도적인 집무실 규모와 현재 인테리어 상태로 봐선 좀 더 그 방면에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일을 맡는 게 옳지 않느냐고 말했는데, 시장님은 한사코 내가 그 일을 해주길 바랐다. 책방 운영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시청 직원 몇 명을 붙여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시청에는 사실 굉장히 많은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전기나 목공 같은 기술 부분을 맡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해볼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시장님이 특별히 부탁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후보시절 서울시민들로부터 받은 크고 작은 쪽지들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일 것. 둘째, 희망제작소에 있던 책과 자료집을 대부분 채워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책장을 구성할 것. 셋째, 이 모든 작업은 최대한 기존에 있던 가구나 기물을 재활용하면서 만들 것.

나는 주말에 줄자를 들고 시청에 다시 찾아가 집무실을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모든 작업을 마치려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집무실 전체를 대강 눈으로 보고 빠르게 그렸다.
▲ 처음 그린 집무실 스케치 집무실 전체를 대강 눈으로 보고 빠르게 그렸다.
ⓒ 윤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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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장 큰 문제가 생겼다. 11월 16일에 집무실에서 온라인으로 취임식을 하겠다고 발표가 난 것이다. 그렇다면 집무실 작업은 그 전에 모두 끝내야 한다는 결론이다. 한 달로 잡았던 계획을 일주일 반으로 줄여야 했다.

무척 고민했다. 시간이 없다고 해서 오랫동안 쓸 집무실을 대충 만들 수는 없다. 모든 책장은 작은 크기로 모듈화 시키고 대한문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 쪽은 나무판자와 벽돌을 쌓아올려 비용과 노력은 줄이면서 책을 더 많이 놓을 수 있도록 계획했다.

작게 나눈 책장들은 쉽게 만들 수 있고 나중에 각각을 합치면 어떤 형태로든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주로 쓰는 방법이다. 이것들은 일단 설계도를 그려서 만들도록 넘겨주고 은평씨앗학교 쪽에는 일주일 동안 집무실 벽에 걸어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학교 선생님과 아이들은 가로가 삼 미터 조금 넘고 세로는 일 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합판에 '시민이 주인인 서울'이란 글자를 기본으로 삼아 벽화 작업을 했다. 전체 밑그림 대부분은 신승호 학생이 그렸고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은 거기에 색을 입혔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나눠서 하니까 취임식을 앞두고 있는 주말에 책장과 벽화, 그리고 포스트잇이 붙은 벽은 전부 완성했다. 문제는 집무실로 책을 옮겨와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가져온 책은 이삿짐센터에서 쓰는 상자로 자그마치 280개 분량이다. 거기에 커다란 노란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은 책이 추가로 30개 정도 됐다. 어마어마한 책과 자료집에 압도되어 그걸 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다. 직원들과 함께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다행히 저녁에는 시장님이 직접 나와서 작업에 동참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가장 독특했던 것은 책장 두 개를 기울인다는 거였다. 자칫 기울임 각도를 잘못 생각하면 책장의 원래 용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생각대로 된다면 더 실용적인 책장이 될 것이다.
▲ 아이디어를 낼 당시에 그린 그림(기울어진 책장 부분)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가장 독특했던 것은 책장 두 개를 기울인다는 거였다. 자칫 기울임 각도를 잘못 생각하면 책장의 원래 용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생각대로 된다면 더 실용적인 책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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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도면 중에서 기울어진 책장 부분이다. 이 도면에 맞춰 목공방에서 작업을 했다.
▲ 자세하게 그린 스케치(기울어진 책장 부분) 여러가지 도면 중에서 기울어진 책장 부분이다. 이 도면에 맞춰 목공방에서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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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책장은 양극화되는 세상, 대립하는 소통의 주체들 사이에 서서 조율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 온라인 취임식에서 기울어진 책장을 설명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기울어진 책장은 양극화되는 세상, 대립하는 소통의 주체들 사이에 서서 조율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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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주말 동안 책장 정리를 마무리하고 이제 남은 건 수요일에 있을 온라인 취임식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장 취임식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놀랍다. 그동안은 세종문화회관 같이 넓은 곳에서 딱딱한 분위기로 하던 것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인터넷으로 옮긴 것이다.

나 역시 아침에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생중계 서비스로 취임식에 참여했고 지금까지 백만 명 가까이 그 영상을 다시 봤다. 함께 취임식을 보던 씨앗학교 아이들은 함께 그린 벽화 그림이 나오자 "와!" 하고 떠들썩하게 환호성을 질렀다. 돈은 덜 들었지만 지금껏 있던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시장 취임식이다.

박원순 시장 취임 한 달... 잘 하는 시장을 뽑은 것이면 좋겠다

원래 이 자리에는 값비싼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것을 떼고 은평씨앗학교 아이들이 힘을 모아 그린 큰 그림을 걸었다. '시민이 주인인 서울'이라는 글자를 기본으로 삼아 아이들이 생각하는 서울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사진에 나온 아이는 밑그림을 담당했던 신승호 학생이다.
▲ 비싼 그림을 떼내고 아이들이 새로 그린 그림 원래 이 자리에는 값비싼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것을 떼고 은평씨앗학교 아이들이 힘을 모아 그린 큰 그림을 걸었다. '시민이 주인인 서울'이라는 글자를 기본으로 삼아 아이들이 생각하는 서울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사진에 나온 아이는 밑그림을 담당했던 신승호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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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하듯 도와주지 않았다면 다 이루지 못했을 이번 집무실 작업이다. 수업시간 틈틈이 벽화작업을 해준 은평씨앗학교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거의 매일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작업했던 시청 총무과 직원들이 무척 고맙다. 나야 집무실 디자인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낸 것뿐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만든 것은 거의 다 이들이 한 일이다.

이제 박원순씨가 서울특별시 시장이 된 지 한 달이 되었다. 초등학생 무상급식, 비정규직 직원들 정규직 전환 추진, 시립대학교 반값 등록금, 내년도 예산안 발표까지…. 벌써 많은 일을 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앞에 놓인 큼직한 산들이 많다. 전임 시장들이 남긴 엄청난 빚더미와 이미 벌여놓은 사업들, 그리고 곧 닥칠 공공요금 인상문제 등등. 당장에 해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새로운 시장이 어느 때보다 잘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이번 만큼은, 우리가 잘 하는 시장을 뽑은 것이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담아 글로 남긴 포스트잇 쪽지처럼 사람 사는 향기 가득한 좋은 서울이 되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윤성근 기자는 이번 박원순 서울시장 집무실을 디자인한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운영자입니다.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원순, #서울시장,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이상북, #취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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