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민의 뜻을 민주주의로 승화시켜야 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사이버 테러 집단에 인질로 잡혀버린 10월 26일, 시민들은 국가기관의 무능함에 속상해했다. 그것이 디도스 공격 때문이라는 발표가 있었을 때는 온갖 추측이 샘솟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가던 12월 2일, 경악할 만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선관위에 사이버 테러를 가한 사람이 다름 아닌 한나라당 현직 국회의원의 수행비서인 공아무개씨와 그 지인들이라는 것이다. 한미FTA 비준안 날치기 통과로 칼에 베인 듯한 상처를 입은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집권 여당은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려대듯 연이은 패착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따위 짓은 정부나 여당의 말대로 '북의 사주를 받은 좌파 세력'들이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무리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졌기로서니, 어떻게 집권 여당 당원이고 여당 국회의원의 비서가 국가기관을 마비시킬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하에 자행됐던 3·15 부정선거와 닮은꼴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 수준을 넘어섰다. 정권 탈취를 위해 국가 전복을 감행했던 전두환 일당과 서울시장 자리 탈취를 위해 국가 기관을 공격한 이번 사건이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디도스 공격으로 선관위 누리집을 멈추게 한 그들이 한 짓은 국가 전복 행위였고, 그들은 국가 전복 세력들이었다.

선관위 누리집 디도스 공격은 명백한 국가 전복 행위

10.26재보선 투표날 중앙선관위와 서울시장 박원순 야권단일후보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DDos) 공격이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실 직원인 것으로 경찰 수사결과 밝혀진 가운데, 지난 2일 오후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 정론관에 도착한 최 의원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10.26재보선 투표날 중앙선관위와 서울시장 박원순 야권단일후보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DDos) 공격이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실 직원인 것으로 경찰 수사결과 밝혀진 가운데, 지난 2일 오후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 정론관에 도착한 최 의원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한나라당은 '개인 범죄였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의 주범격인 공아무개씨를 수행 비서로 채용했던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은 "젊은 해커들의 치기어린 장난"이라고 일축했다. 또 홍준표 대표는 "큰집 살림하니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다. 게다가 전여옥 의원은 "한나라당이 한 것이 절대로 아니고, 최구식 의원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 누구나 안다"고 강변했다. 수사 중인 사건을 두고 '개인적인 범죄행위', '치기 어린 장난', '한나라당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손사래 치는 모습이 참 치졸하고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8일 공아무개씨는 경찰에 이번 일이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했다. 그러나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돈이 들고, 장기간 준비해야만 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이번 디도스 공격이 '개인의 치기'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다.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 자리에 있었고,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나경원 후보의 홍보본부장을 맡기도 했던 최구식 의원의 수행비서가 상대 후보에게 불리한 범법행위를 했다면, '개인적인 행위'와 '의도를 가진 특정 세력의 모의에 의한 행위' 중 어떤 추론이 근접 가능하고 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한나라당의 변명이 어떻든, 수사 기관의 수사 방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국민들이 내린 결론은 이미 분명하다. 한나라당은 이 사건에 책임이 있고, 자기 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국가 기관을 유린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위기의 발로일까? 한나라당은 벌집 쑤셔놓은 듯한 모양새다. 의원들이 공공연하게 당 해체를 주장하는가 하면,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벌이던 최고위원 자리에선 3명이나 내려왔다. 의원들의 이합집산이 노골적으로 행해지고, 너도나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쇄신을 말하지 않는 의원들이 없고, 아예 신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있다. 이에 홍준표 대표조차 8일 "현역 의원 전원 불출마를 배제하지 않는 자기 희생적이고 과감한 인재영입"을 통한 재창당을 들고 나왔다. 디도스 공격에 멈춰버린 것은 선관위 누리집만이 아니었다. 12월 7일, 한나라당 또한 방향타를 잃어버린 난파선, 그 모양새에 지나지 않는다. 

"쇄신! 쇄신! 쇄신!"...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7일 오전 사퇴의사를 밝힌 유승민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취재진에 둘러싸인 채 여의도 당사를 나서고 있다.
 7일 오전 사퇴의사를 밝힌 유승민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취재진에 둘러싸인 채 여의도 당사를 나서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모두들 '쇄신'이라고 이야기한다. 최고위원 자리를 던진 유승민, 남경필, 원희룡 의원도 '쇄신을 위한 결단'이라고 이야기하고, 남아 있는 홍준표 대표도 '쇄신이 먼저'란다. 그러나 한나라당 의원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쇄신'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위기만 닥치면 어김없이 등장했던 '쇄신'. 그러나 그것이 위기 돌파용 립서비스에 불과했다는 것은 한미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통과 때, 소위 쇄신을 표방했던 황우여 원내대표 및 쇄신파 의원들의 행보만 봐도 너무나도 자명했다.

"반값 등록금 실현"을 내세우며 화려한 조명을 받고 등장한 황우여 원내대표는 날치기를 주도했다. 쇄신을 외치며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남경필 의원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으로 날치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미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통과 때 국민들 눈에 비친 건 쇄신파의 모습이 아니라 거수기가 돼 원내대표를 뒤따르는 '좀비'의 모습 뿐이었다.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한나라당이 있었다. 한나라당이 2003년 기업으로부터 700억 원에 이르는 돈을 받아 대선자금으로 쓴 사실이 드러났다. 시민들은 분노의 표현으로 한나라당을 '차떼기당'으로 불렀다. 한나라당의 쇄신은 눈물겨웠다. 당사를 매각하고, 비가 새는 천막 당사로 들어갔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현판을 들고, 운동화를 신고 천막 당사로 향했다. 개헌 저지선만 만들어 달라는 호소에 시민은 121석의 국회 의원석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열심히 뛰겠다는 다짐으로 기자들 앞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신었던 운동화는 선거가 끝난 후, 쓰레기통에서 발견됐고 쇄신의 약속 또한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한나라당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인재 영입을 이야기한다. 신선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영입해 분위기를 쇄신해 재창당을 하겠단다. 이 또한 한두 번 듣는 소리가 아니다. 구국의 결단이라는 미명하에 적의 수장 격인 김영삼을 끌어들인 3당 야합을 시작으로 그들은 위기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인재를 내세워 바뀌겠다고 말했다. 새로 영입된 사람들은 쇄신의 주역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홍준표 대표,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 오세운 전 서울시장, 나경원 전 의원…. 이 사람들도 한때는 젊은 피였고, 들어가서 당을 쇄신하겠노라며 입당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 낸 쇄신은 미미했고, 당을 바꾸기보다는 당에 맞춰 변해갔다. 그런데 또다시 인재를 영입해 재창당을 하겠다니…. 수혈받지 못하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식물 정당'을 자인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젊은 피 수혈받아 살아온 노쇠한 보수정당, 한나라당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굳은 표정으로 참석하고 있다. 홍 대표는 이 자리에서 선관위 디도스 공격 파문과 관련, "4년 반을 끌어오던 한미FTA을 무난히 처리하고 난 뒤 최근 디도스 공격 사건이라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야당은 의혹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지만 우리는 수사당국의 요청이 있을 시에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떤 내용이라도 적극적으로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굳은 표정으로 참석하고 있다. 홍 대표는 이 자리에서 선관위 디도스 공격 파문과 관련, "4년 반을 끌어오던 한미FTA을 무난히 처리하고 난 뒤 최근 디도스 공격 사건이라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야당은 의혹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지만 우리는 수사당국의 요청이 있을 시에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떤 내용이라도 적극적으로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한나라당은 그간 너무 오만했다.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안중에도 없었고, 부자 곳간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면서 역사를 되돌리려 했다. 법과 제도를 '가진 자의 소유물'로 만들려는 노골적인 시도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이명박 정권하의 4년 남짓 동안 한나라당의 모습은 국민의 상식에 멀리 벗어나 있었다. 한나라당은 그런 행위들로 '영원한 주인공'을 꿈꿨을지 모르겠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거스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할 계산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듯하다. 난파 직전에 놓인 한나라당은 배를 갈아타자며 새로운 선원을 구해보자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큰 오만이다. 사익을 위해 국가기관을 멈춰 세운 '국가 전복의 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은 고사하고, 변명만 급급한 한나라당. 자기 썩은 살 한점 도려내는 것은 주저하면서, 무슨 쇄신을 말하고 인재 영입으로 재창당을 운운하는 것일까. 만약 이같은 일이 야당이나 눈엣가시 같은 시민단체에 의해 벌어졌다면, 한나라당은 지금과 같이 팔짱만 끼고 경찰 조사만 지켜보자고 할 수 있을까.

책임지는 자세가 먼저, 쇄신은 그 다음이다

쇄신?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들의 몫이 아니다. '쇄신의 대상'이 돼야 할 사람들이 쇄신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지르는 볼썽사나운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재창당? 낡은 집 버리고 새집을 짓는다고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디도스공격과 관련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한나라당 의원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석고대죄해도 모자라다. 쇄신이네, 창당이네 하며 목소리만 높이기 전에 올바른 진상규명과 통렬한 반성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국민들은 경찰 수사를 지켜볼 것이고, 특검이면 특검, 국정조사면 국정조사를 지켜볼 것이다. 형식보다 내용을 지켜볼 것이다.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사 결과, 그리고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것이 이뤄진 후에 쇄신을 말하고, 재창당을 논해야 최소한의 설득력이 생기지 않겠는가.

운동화로 갈아 신고, 현판을 떼 천막당사로 달려간 들 국민이 또 믿어주겠는가? 죽어야 살 수 있는 한나라당이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살릴지는 스스로의 선택하겠지만, 판단은 국민들의 몫이다. 한나라당은 이것만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다.


태그:#디도스 공격, #한나라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