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제 '돈'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고 싶습니다.
▲ 하얀 정글 이제 '돈'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고 싶습니다.
ⓒ 송윤희

관련사진보기

1971년 2월 닉슨부통령과 민간보험회사 카이저는 의료보험제도를 민간회사가 운영하도록 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국민들에게 새로운 의료헤택을 가져다 줄 거라는 의료민영화였다. 의료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진 것이다. 미국 국민들은 국가보험이 아닌, 민영보험에 가입해야 했다. 민영보험에 가입할 여력이 없는 사람이 전 국민의 17%인 오천만 명이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cko)는 의료보험이 없는 릭이라는 남자에게 어떤 일이 닥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두 손가락이 잘렸다. 중지를 붙이는 데는 6만 달러, 약지를 붙이는 데는 1만2천 달러. 돈이 없는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포기했다. 보험에 들어놓으면 안심이라고? 감독은 또 다른 영상을 내민다. 갖가지 명목을 들어 보험급 지급을 거절하는 거대 보험사들의 횡포. 보험금 지급을 결정하는 위원회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지급 불가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는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영부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대통령의 포토타임 때나 볼 수 있는 허수아비 역할을 거부했다. 대신 그동안 왜곡돼 왔던 의료현실을 바꾸기 위해 해결사를 자처했다. 전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위한 대통령 산하 의료개혁 위원회의 장을 맡은 것이다.

미 의회에서 의료의 공공성 강화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고, 힐러리는 유머와 위트를 섞어가며 반대파를 설득해 나갔다. 딕 알미(Dick Armey) 공화당 의원의 반격에 '잭 케보키언 박사'(130명을 안락사시켜 유명해진 죽음의 의사)를 언급하며 좌중의 웃음을 유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보험사들의 로비가 시작되자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다. 보험회사는 의원의 수보다 4배나 많은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의원들을 매수하였다. 국가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은 좌초했고, 현재 힐러리는 상원의원 중 두 번째로 많은 돈을 보험회사에서 받는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있으면, 혜택은 없다

가진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마음에 송윤희 감독에게도 사탕을 건넸다.
▲ 이옥 할머니 가진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마음에 송윤희 감독에게도 사탕을 건넸다.
ⓒ 송윤희

관련사진보기


미국 의료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국가가 의료정책을 포기하면, 국민들이 생존을 위협받는다는 점과 한번 바뀐 제도는 다시 되돌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공공병상비율은 30%로 우리나라의 18%보다 높으며, 의료비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 또한 한국과 비슷하다. 다만 전국민의료보험제도가 미국에는 없다.

송윤희 감독의 <하얀 정글>은 의료영역에서마저 미국을 벤치마킹하려는, 아니 청출어람하려는 한국의 현재를 보여준다.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했다는 한 환자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시작한 촬영이었다. 

"거의 그 말기 암 환자 같은 그런 모습이셨는데, 배에 덩어리가 언제부터 있는데. 그거에 대해서는 뭔지 모른다... 몇 년 동안 병원을 안 가서... 놀랐던 게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못 갔다고 해서 놀랐지. 한 달에 몇 만원 하는 거가 힘들어서."

당뇨병으로 몇 년을 고생한 이길동씨는 몇 만 원의 경제적 부담도 버거운 사람이다.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병원문을 나서자 돈이 없어서 못 가겠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의료급여 제도가 있지만, 최저 2%에 들지 못하고 어설프게 가난하면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자기 집이 있으면 안 된다. 생계 수단으로 어쩔수 없이 쓰는 낡은 경차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다리 이렇게 내려오는데… 요기를 수술을 해야 돼요, 그러더라고. 근데 내가 안 한다고 그랬지 그때는. 의사 선생님이 왜 안 하냐고 그래서 무서워서 안 할래요 하고… 그래도 자존심은 살아서 허허... 그럼 하지 마세요. 평생 그렇게 사실래요? 그러대. 그래서 안 할래요.. 안 할래요...(눈물)"

이옥 할머니에겐 낳는 과정에서 뇌손상이 와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한 아들이 있다. 그 아들도 돈이 있었다면 수술을 받고 정상인처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두 노부부는 근근이 종이 박스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의료급여 헤택을 받을 수 없다. 집이 있기 때문이다. 타워팰리스든 월셋방이든 집은 집인 것이다.

멕시코와 미국 다음으로 꼴찌에서 세 번째인 한국

경제적 어려움은 건강을 크게 위협한다.
▲ 이길동 아저씨 경제적 어려움은 건강을 크게 위협한다.
ⓒ 송윤희

관련사진보기


중산층이라도 큰 병이 나면 버거운 것은 마찬가지. 박진석씨는 백혈병에 걸렸다.

"이식 수술하는데 7000만 원에서 1억을 갖고 오라고 하더라구요. 생각해봤죠, 1억이라는 돈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돈인가. 이식했다고 100% 사는 것도 아니고.. 고민 끝에 치료 거부 선언을 햇어요. 나 혼자 죽으면 그거 다 없애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 거죠. 남아있는 가족들한테 그나마 사망 보험금이라도 나오니까…."

돈은 있지만 가족을 생각한다면 쓸 수 없다. 결국 골수이식을 포기하고 저렴한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것도 3500~400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다행히 진석씨의 케이스는 항암치료와 골수이식의 완치율이 비슷했기에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운을 바랄 수 없는 환자들은 지금도 높은 병원문턱에서 좌절하고 있다.

병 한 번 나면 가족 전체가 패가망신이라는 비극은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병이 났을 때 나라에서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의료의 공공성은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하는데, 의료제공체계의 공공성과 의료재정체계의 공공성이다. 의료제공체계의 공공성 지표는 해당 국가의 전체 병원 수에서 공공병원 수의 비율 또는 전체 병상 수에서 공공병상 수의 비율을 따져 계산하는데, 우리나라는 병상수 기준 18%로 미국의 30%보다도 낮다. 의료재정체계의 공공성 정도는 국민의료비 중 공공지출의 비율을 사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의료비 공공부담률이 55%로 멕시코와 미국 다음으로 꼴찌에서 세 번째이다. 참고로 전체 OECD 국가 평균은 73%이다.

현 정부에서는 그 해결 방안으로 의료선진화를 내세운다.

"의료 산업발전, 의료서비스 질의 향상, 경제 구조의 변화. 의료 산업의 선진화는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이다. 그 과실은 모두 환자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한다. 사십년전 닉슨이 했던 말이 한국에서 다시 울려퍼지고 있다. 하지만 의료시장은 경쟁에 의한 가격인하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문화생활, 의복, 전자제품 등은 소득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구입을 미룰 수 있지만 건강을 찾기 위한 의료서비스는 매진되기 전에 사야 한다.

가격이 싼 제품은 할인마트에서 묶음제품으로 사지만, 의료시장에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KTX나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소재한 3차 병원의 진료를 받으러 간다. 미어터지는 대기실에서 2~3시간 기다리며, 고작 30초 진료를 받지만 아무 불평이 없다.

윤증현 장관은 의료민영화라 할 수 있는 선진화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 의료 선진화 윤증현 장관은 의료민영화라 할 수 있는 선진화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 송윤희

관련사진보기


MB정부는 영리의료법인 설립을 서두른다. 현재 의료법인은 비영리목적이다. 병원에서 벌어들인 돈은 병원에 투자되어야 한다. 영리의료법인이 되면, 번 돈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래서 투자자를 모집하고, 병원 수익에 따라 배당금을 지급한다. 주식회사의 출현이다. 그렇게 되면 내원하는 환자들은 견적서의 숫자로 평가될 것이다.

돈이 없는 환자는 환자가 아닌 것이다. 돈이 안 되는 환자는 쫓겨나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더 추가되는 옵션이 있다. 바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의 완화다. 지금 전국민이 가입해 있는 건강보험을 가진 환자를 병원에서는 무조건 받아야 한다. 당연지정제가 풀리면, 병원은 돈 많은 민간보험 가입자만을 가려받을 수 있게 된다.

한미FTA가 국회를 통과해서 발효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 포함된 ISD(투자자 국가 소송 제도)제도가 시행되면 국가의 공공정책에 대해 미국 투자자가 소송을 걸 수 있다. 공공정책의 합리성에 상관없이, 그 조치로 인해 투자자가 피해를 봤는지가 국제중재기구의 판단 근거다. 캐나다 정부는 2001년 담뱃갑에 '순한 맛(mild)'이라고 표기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도입을 검토했다. 이를 안 미국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이것이 자사의 수익을 떨어뜨릴 수 있는 간접 수용에 해당한다는 항의서를 보냈다.

캐나다 정부는 ISD 소송을 우려해 담뱃갑 규제안을 철회했다. 캐나다, 미국, 멕시코의 NAFTA보다 더욱 강력한 한미FTA에서는 공공정책의 위축이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원래 취약했던 공공의료 분야는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국민건강보험 자체가 민영보험사들에게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국방과 의료 만큼은 정부의 책임이다

의료개혁위원회장을 맡아 전국민건강보험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 힐러리
▲ 힐러리 로댐 클린턴 의료개혁위원회장을 맡아 전국민건강보험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 힐러리
ⓒ 송윤희

관련사진보기


<하얀 정글>이 더욱 더 무성해지는 미래. 송윤희 감독은 산업의학과 의사로서 의사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담아내려 했다. 쉽지 않은 인터뷰에 응해준 동료의사들. 모두가 문제에 대해 같은 인식을 하고 있지만, 제도적인 장벽에 부딪혀 관성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한 간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교수 회의 때 강당으로 갔는데 파워 포인트로 1등부터 순위가 쫙 나오면서 얼마 벌었고, 얼마 벌었고 이런 걸... 쭉 등수를 다 얘기 했다고 해요. 교수들이 그렇게 실적을 내야 되고 돈을 벌어야 되고 순위가 매겨지니까 과잉진료를 하게 되고... 돈으로 성적이 나오니까 교수님들도 다 스트레스 받아 하고..."

문제는 시스템이다. 의료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버리는 현실. 그리고 이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제도적 방관. 한국판 <식코>라는 <하얀 정글>은 신자유주의가 의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미국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마이클 무어 감독처럼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키지는 못 했지만 비장함만큼은 여실히 묻어난다.

지금도 계속되는 차가운 현실. 이옥 할머니는 척추관 협착증을 그대로 지닌 채 파지를 주우러 다닌다. 박진석씨는 부당한 의료비를 청구하는 병원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길동씨는 병원 밖에서 서성거린다. 의료급여 수급권자인 박금례 할머니는 의료급여 보장범위에 들어있지 않은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고 있다.

"국방과 의료 만큼은 정부의 책임이다." 영국의 공공영역을 크게 위축시켰다는 비판을 한 몸에 받은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도 이렇게 말했다.


태그:#하얀 정글, #식코 , #다큐멘터리, #의료민영화, #의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