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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날에 함께 노조활동 하던 동지들 모임 하는데 창기도 와라."

20여 년 전 같은 직장에서 만나 함께 노조활동 했던 동료들 만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때 그사람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은 했으나 가 볼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활발하던 노조활동으로 만난 사람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사람들 이지만 과연 그사람들이 저를 반겨 줄까가 걱정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는 현대그룹 이었고 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팔거나 원목을 가공해 팔던 큰 기업 쪽에 속하는 회사였습니다. 88년 1월 중순 경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직원이 모두 3천명이 넘는 규모 였습니다. 하지만 그 목재회사는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면서 94년에 1차, 96년에 2차, 97년에 3차. 이렇게 세차례에 걸쳐서 울산지역 다른 업종으로 전출을 보냅니다.

네비야 되어라~ 우리는 2시간 가까이 휴대폰으로 네비를 깔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 ▲ 네비야 되어라~ 우리는 2시간 가까이 휴대폰으로 네비를 깔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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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활동을 활발히 하던 저는 3차에 현대자동차로 전출을 가게 되었으나 면접과정에서 노조활동한 내용이 발각되어 전출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재회사는 저에게 현장으로 보낼 수 없다며 노무과에서 일하라 했습니다. 노무과는 노동자 입장에선 탄압부서로 알려진 부서였습니다. 한편으론 싫다고 했으나 한편으론 도대체 노무과는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 쪽 분야에서 일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생산직에서 사무직 근무. 제가 총무부로 일자리를 옮긴 게 알려지자 저에게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했습니다. 어떤 노동자는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기도 할 정도로 저에 대한 실망감을 강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당시 어떤 노동자들은 희망퇴직으로, 어떤 노동자들은 중공업이나 미포조선, 자동차 분야로 전출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울산에 머물다 부산 영업부로 갔다가 적응 못하고 다시 용인 공장으로 발령났습니다.

울산은 가구공장과 합판공장, 원목장이 있었으나 모두 문을 닫았고 용인에 있는 가구공장만 가동하기에 이르면서 미래가 불안했습니다. 생산직에 일하다 노무과에서 노사담당으로 일하니 적응도 안되었습니다. 노동조합 임원이 무슨 내용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하고 정보를 캐내다 주어야 했기에 저에겐 맞지 않았습니다. 해서 저는 98년 들어서면서 사직서를 내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선거캠프 진행하랴, 문상 다녀오랴, 우린 너무 피곤해요. 경산에서 잠시 잠을 청하는 모습
▲ ▲ 선거캠프 진행하랴, 문상 다녀오랴, 우린 너무 피곤해요. 경산에서 잠시 잠을 청하는 모습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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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부터 함께 힘들게 노조활동 해왔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때 앙금이 남아 있을 것 같았고 불만이 있을 것 같아 머뭇거렸습니다.

"그 때 일이 언제 일인데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노, 아무도 너에게 그런 감정 가지지 않으니까 와라."

위원장을 하다 구속되고 해고된 이 형과 수석부위원장을 지내다 해고된 최형이 꼭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두 분은 오래 전부터 저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저를 이해해주고 걱정을 많이 해주는 고마운 분들입니다. 고마운 마음이 들어 가보기로 했습니다.

12월 16일 금요일 저녁에 연락을 받았고, 모임이 있는 날은 17일 토요일 오후 7시 였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최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박성신씨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못 온다 하네. 오늘 저녁 모임은 그래도 하라네."

박 형은 함께 노조활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사물놀이 패를 이끌던 분으로 파업하면 항상 앞장서서 꽹과리를 치며 흥을 돋우던 분이었습니다. 나중엔 노조위원장까지 지낸 분이었습니다. 박 형은 저를 많이 아껴주던 형님 뻘 되는 분입니다. 산동네 우리 집에도 가끔 찾아 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박 형이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고 박 형이 울산 오신다 해서 기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친 상을 당하셨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녁 7시 모임 장소로 갔습니다. 10여 명이 모였습니다. 모두 반갑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무엇을 하며 사는지 물어 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비정규직 일자리 얻어 어렵사리 산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로 전출간 동료들은 아무도 안 보였습니다. 미포조선과 중공업으로 전출간 동료들은 보였습니다. 정규직이라 그나마 사는 형편이 좋은 동료도 있었고 위암 수술로 헬쑥해진 동료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식당을 차려 일하는 동료, 일당 받고 일하는 노동자, 중소기업 하청 노동자, 건설 일당 노동자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에 박성신씨에게 가 볼 건데 다른 분들은 어쩔 겁니까?"

밤 11시경 박 형 이야기가 거론되었습니다. 저와 이 형, 최 형은 오늘 밤 다녀 오기로 하고 몇몇 다른 분은 내일 아침 다녀 오기로 했습니다. 직장 출근 문제로 못가는 동료들은 대신 전해 주라며 5만원 짜리 현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20년 전 같이 직장에 다니며 지냈다고 함께 모였고 문상도 가보겠다니 이게 바로 진정한 의리와 우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형과 최 형을 따라 가보기로 했습니다.17일 토요일 밤 11시 경 우리는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충남 부여. 울산에선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네비가 있으면 안전하게 빨리 다녀 올수 있는데..."

우리는 다른 동료들에게 네비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한 동료 중에 휴대폰 가게를 하는 동료가 있어 도움을 받았습니다. 네비는 없고 네비 프로그램을 폰으로 다운받아 사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밤 12시가 다 되어 그 분 집 주변으로 가서 전화로 불렀는데 기꺼이 나와서 도와 주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결함인지 일요일 새벽 1시까지 다운받기를 시도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결국 네비없이 다녀 오기로 했습니다.

이 형과 최 형은 한 후보 선거 캠프에서 내년 총선대비 활동을 하고 있어서 무지하게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장롱 면허증이라 제가 장거리 운전을 하기엔 무리여서 이 형과 최 형이 번갈아 운전하고 갔다 오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피로누적인지 울산서 경산쯤 가다가 좀 자고 가자며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두 분은 앞 좌석에서 잠을 청하고 저는 뒷자리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잠시후... 두 분은 이 내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큰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했습니다.

 두 분의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에 저는 잠을 청하지 못하고
그냥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 ▲ 두 분의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에 저는 잠을 청하지 못하고 그냥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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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크고 덩치도 큰 두 분인지라 자리를 뒤로 많이 젖히는 바람에 저는 오그리고 앉아 잠을 청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하두 피곤하게 잠들어서 오토바이 경연대회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바람에 그냥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두어시간 후 두 분은 깨어 났습니다. 그리곤 다시 부여로 승용차를 달리기 시작 했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 잘 몰라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 갔습니다. 장례식장은 마을이 드문 산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착 했을 땐 아침 6시가 넘었습니다. 박 형은 자고 있었습니다. 형수님이 먼저 일어나 우릴 맞았습니다. 박 형을 깨우니 부시시 눈 비비고 일어나 우릴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 섰습니다. 우린 먼저 어머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상차림하여 주었습니다. 우린 밥을 먹으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 형은 20여년 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 늠름하고 멋진 풍채는 간데없고 얼굴은 반쪽이 되었으며 머리는 허옇게 샜습니다. 왜 그리 야위었는지 물으니 오래 전부터 당뇨를 앓아 왔다 했습니다. 오래 전 대전에 살 때 가서 한 번 뵌 후 한 번도 못 뵈었습니다. 지금 박 형은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물고기 가공공장에 들어가 일하며 생활한다고 했습니다. 울산서 올라간 우리는 박 형의 야윈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박 형, 거기서 힘들게 살지 말고 울산 오소. 우리가 먹고 살게 해 줄테니까."

이 형과 최 형은 노동인권센터를 진행중에 있습니다. 두 분은 또 사회적 기업을 만들려 하는데 성실하고 일 잘하는 박 형이 적임자라 여긴듯 합니다. 내년 5월까지 준비한다고 와서 책임자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박 형은 상 치르느라 정신없는 상태여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다시 울산으로 향했습니다. 박 형의 야윈 모습을 보니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갈 때 처럼 울산에 올 때도 달리다 쉬다를 반복하며 울산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9시 다 되어 출발한 승용차는 오후 1시가 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밤 새 잠 도 제대로 못자고 달려갔다 달려 왔으니 모두 피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밤 새워 달려가 20년 지기 직장 동료의 문상을 다녀 오는 것을 보고 '이런 것이 참된 우정이고 의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 대해 옛 감정 다 버리고 따뜻이 맞아준 동료들이 고맙고 기꺼이 밤 새 문상을 다녀온 동료들이 고마웠습니다.

 장례식장 도착 후 동료로 부터 받은 돈을 봉투에 넣고 있습니다.
▲ ▲ 장례식장 도착 후 동료로 부터 받은 돈을 봉투에 넣고 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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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회사동료,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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