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거리는 항구, 녹동항국도 2호선을 벗어나 고흥반도로 들어선다. 국도 27호선은 고흥반도를 가로지른다. 27호선에서는 신호등을 만나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최근에 종점이 녹동항에서 소록도를 지나 거금도까지 연결됐다. 오늘 목적지는 거금도. 다리가 놓이기 전에도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차로 갈 수 있다니 더 가고 싶어져 여행길에 올랐다.
고흥은 반도지만 산세가 좋다. 산들이 첩첩이 겹쳐지는 풍경들을 둘러보며 녹동항까지 달린다. 녹동항은 아주 정겨운 항구다. 선창가 분위기가 물씬 난다. 어수선하고 북적거리는 기분. 작은 어선들이 줄지어 묶여있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날아다닌다. 바로 앞에 소록도가 가로막고 있어서 그런지 바다는 평온하다.
바닷가 선창에 닿았으니, 싱싱한 회가 먹고 싶었다. 횟집이 줄지어 있다. 어디를 들어갈지 고민이다. 횟집들을 휙 둘러본다. 수조 앞에서 일손이 분주한 곳을 찾아 들어선다. 모듬회를 시키니 밑반찬으로 돌멍게, 낙지, 굴, 소라, 가오리가 덤으로 나온다. 곧 광어와 농어가 섞인 모듬회가 나온다. 살이 두껍다. 씹는 맛 역시 차지다.
배를 채우고 녹동항 주변을 둘러본다. 좌판에는 마른 생선들이 널려 있고, 갓잡은 싱싱한 물메기가 눈을 부라리고 있다. 수협 건물로 들어서니 활어를 즉석에서 썰어서 판다. 광어들이 무척 크다. 가격이 얼마인지 궁금해 물어보니 생각보다 싸다. 이외의 가격이다. 펄떡펄떡 살아있는 광어 한 마리가 5만 원이란다. 여기서 먹을 걸….
옆 칸으로 가니 경매가 한창이다. 낮인데도 경매가 이뤄진다. 경매 대상은 낙지. 낙지를 망에 담아 차례를 기다리고, 차례가 온 낙지는 바구니에 담긴다. 마이크에서는 알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순식간에 낙지가 주인을 만나게 되는 경매는 신기하기만 하다. 낙지들도 놀랐는지 바구니를 탈출하기도 한다.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녹동항을 나와 다시 국도 27호선을 타고 소록대교를 건넌다. 소록도는 '작은 사슴을 닮은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록도에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국립 소록도병원이 있다. 한센병? 쉽게 말하면 천형(天刑)이라는 병, 문둥병이다. 유식한 말로 나병이라고도 한다. 그곳에 왜 가냐고?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중앙공원'을 보러 간다. 중앙공원까지는 주차장에서 1.3km를 걸어야 한다. 찻길 옆 해변으로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해송 숲 사이로 난 길은 운치가 있어 걷기 좋다. 겨울이라 바닷바람이 거세다. 길을 걷다 보면 현대식 병원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길 한가운데는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출입금지 푯말'이 서 있다.
국립소록도병원은 1917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병원으로, 한때는 환자들이 6천 명이 넘기도 했단다. 현재는 7백 명 정도가 이곳에 있다. 병원 뒤로 가면 공원이 나온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어째 으스스하다.
길 양편으로 붉은 벽돌 건물들이 있는데 분위기가 스산하다. 칙칙한 느낌. 아니나 다를까 건물들 이름이 섬뜩하다. 검시소 건물로 들어서니 기분이 이상하다. 검시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검을 검사하는 곳이란다. 방에는 주검을 눕혀 놓았을 작은 단이 있다. 위로 백열전구가 빠진 소켓이 힘없이 걸려있다.
옆방에는 나무로 만든 기구가 있다. 단종대란다. 이름도 끔찍하다. 말 그대로 '생식을 중단시켜 버리는 곳'이다. 정관수술. 죄를 지은 자들에게 강제로 시술을 했던 곳이다. 환자에게 가하는 벌치고는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이다. 형틀처럼 생긴 기구에 묶인 채 고통에 몸부림치던 전율이 느껴지는 듯하다. 햇살이 창으로 살며시 파고든다. 적막이 감싼다.
"가는 곳마다... 한 맺힌 곳 뿐이요?"
옆 건물은 감금실이다. 쉽게 말하면 감옥이다. 창살이 있고 방은 시멘트 바닥이다. 변기도 덩그러니 있다. 소록도 자체가 감옥이었을 텐데 그 곳에 또 하나의 감옥이 있었다니. 녹슨 창살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멀게만 보인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중 새로 부임해 온 원장과 보건과장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 섬엔 도대체 시원한 내력이 담긴 곳이라곤 한 곳도 없는 모양이구려. 가는 곳마다 그렇게 온통 원망이 어리고 한이 맺힌 곳뿐이란 말요?""실상은 이 섬 전체가 커다란 한(恨)의 덩어리가 아니겠습니까. 철조망을 넘어서면 환자도 건강인도 드나들지 않는 바로 그 망각의 완충 지대에서부터 시작해서…."
중앙공원은 아름다운 공원이다. 지금은 아름다운 공원이지만 1936년 이 공원이 조성될 당시 환자들에게는 '고통의 공원'이었을 것이다. 공원 안의 이국적인 편백나무들이 아름답다. 공원 가운데에는 탑이 있다. 구라탑(救癩塔)이다. 나병을 치료하는 탑. 천사가 악마를 제압한다는 동상이 서 있고, 밑단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절박함이 새겨져 있다.
해안길이 아름다운 거금도
소록도를 나와 거금대교를 건넌다. 복층사장교로 건설된 다리는 제법 웅장하다. 이층으로 된 다리다. 광안대교 정도는 아니지만, 아래로는 사람과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 다리 끝에는 벌써부터 관광지가 갖춰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구경하고, 노점들이 들어서 있다. 다리 하나 놓였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섬으로 넘어들어 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섬에서 육지를 바라본다.
거금도는 큰 섬이다. 우리나라 섬 중에서 10번째로 큰 섬으로 마치 고구마처럼 생겼다. 거금도에는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있다. 가는 길에 김일 기념체육관이 보인다. 건물은 웅장하다. 왜 작은 도시에 이렇게 큰 기념관을 조성했을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원래 김일 체육관이었는데 김일 체육기념관으로 바뀌었단다.
내부에는 전시관이 따로 없었다. 김일 선수 생전 레슬링시합 사진자료만 전시해 놨다. 기념관 측은 "유품들은 조금 더 기다려야 볼 수 있다"며 양해를 구한다. 사진 속에서는 박치기 왕 김일의 모습이 생생하다. 나도 한 두 장면 정도는 보았던 것 같다. 향수일까?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들 구경하고 나간다. 단순히 사진만 보는 것인데도 말이다.
면 소재지를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마치 바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돌아가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풍광이 좋다. 이곳 해안 경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거금도 너머는 완도군이다. 금당도, 비견도, 충도, 금일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수평선 위에 뾰족뾰족 뚫고 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면 위로는 양식장 부표들이 가득하다. 마치 바다를 점령이라도 한 듯.
해안선을 따라가는 길 오른편으로 바다가 보인다. 해수욕장이 있는 아름다운 해안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마늘이 푸르게 자라는 남쪽 마을은 겨울에도 생기가 넘친다. 가는 길 중간 중간 차를 멈추고 바다를 바라본다. 다시 가다가 해변을 만나면 걸어도 본다.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다. 거금도 한 귀퉁이에서 국도27호선 종점 표지석을 만난다. 물론 종점이라고 더 갈 수 없는 길은 아니다. 길은 거금도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거금대교로 이어진다. 섬은 여전히 섬으로 남는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2월 31일, 국도 27호선을 타고 고흥 거금도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