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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로 오르는 길의 성곽
▲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로 오르는 길의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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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된 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이미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오랜 시대에 걸쳐 한강유역 및 수도에 대한 방어를 하였던 곳으로, 단 한 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라고도 한다.

남한선성의 전체 길이는 11.7km(본성 9km, 외성 2.71km)로 5개의 옹성과 4대문 등이 노송군락 주변 자연경관과 함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조선시대 인조, 숙종, 영조, 정조기의 다양한 축성기법의 표본이 잘 남아있는 곳이다.

좁은 통로를 성곽 밑에 내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평거식 암문
▲ 암문 좁은 통로를 성곽 밑에 내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평거식 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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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암문을 성 안에서 본 모습
▲ 제6암문 제6암문을 성 안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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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수축 결과로도 대단한 성곽

인조 2년인 1624년, 총융사 이서에게 옛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축성하도록 하였다. 수축 결과 남한산성은 성의 둘레가 6,297보가 되었고, 성곽 위에 여장이 1897개, 옹성 3개, 대문이 4개, 암문이 16개, 그리고 '군포(軍砲)'가 설치되었다. 또한 성 내에는 우물 80개와 샘 45개가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왕이 거처할 행궁도 함께 축조되어 상궐 73칸 반, 하궐 154칸  등 모두 227칸이 건립되었고 객관인 화관도 함께 지어졌다.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이자, 광주 읍치를 관리하는 행정부서인 관아시설이, 1917년 광주 경안동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290여 년간 운영되던 조선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지역이기도 하다.

삼전도의 굴욕

조선조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12월 14일 왕은 강화로 피신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청군에 의해 길이 막힌 뒤였다. 인조는 소현세자 등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하였다. 12월 16일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제7암문은 성벽의 굴곡진 안에 숨겨져 있다
▲ 암문 제7암문은 성벽의 굴곡진 안에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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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을 지나 남제1옹성을 보호하기 위해 낸 암문. 횽예식이다. 성벽이 방향을 바꾸어 길 아래서는 보기가 함들다
▲ 제7암문 남문을 지나 남제1옹성을 보호하기 위해 낸 암문. 횽예식이다. 성벽이 방향을 바꾸어 길 아래서는 보기가 함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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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 안에는 1만3000여 명의 군사들이 있었으나, 20만이 넘는 청군과 교전을 할 수는 없었다. 더욱 산성으로의 피난이 급박하게 이루어져 미쳐 식량을 운반하지 못하고, 전국 각지에서 구원병들이 일어났으나 남한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궤멸 당했다.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찾아와 굶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더욱 강화도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아가 송파구 삼전도 부근인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였다. 강화조건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부인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 그리고 김상헌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되었다.

두 가지 형태로 조성한 암문

1월 8일 일요일. 남한산성에 올랐다. 볼 것도 많은 곳이다. 남한산성은 두 번에 걸쳐 꼼꼼히 답사를 하리라 마음을 먹고 올랐다. 남문주차장에서 출발을 하여 서장대를 거쳐, 남문을 지나 옹성까지 걷기로 했다. 이곳에 있는 옹성과 암문을 보기 위해서이다. 남한산성의 옹성과 암문은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어떻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이다.

홍예식인 제7암문. 사진 시계장향으로 성안에서 본 7암문. 문틀의 아래와 위, 그리고 숨겨진 암문의 모습
▲ 7암문 홍예식인 제7암문. 사진 시계장향으로 성안에서 본 7암문. 문틀의 아래와 위, 그리고 숨겨진 암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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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를 지나 먼저 만난 것은 '제6암문'이었다. 화성의 암문과는 달리 남한산성의 암문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홍예식 암문과 평거식 암문이다. 홍예식 암문은 대다수의 암문의 형태이며 문을 달아내는 암문이다. 그와 달리 평거식 암문은 좁은 통로를 만들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암문이다. 제6암문은 제2암문과 더불어 단 두 곳뿐인 평거식 암문이다.

평거식 암문은 좁은 통로를 만들고 그 앞을 위장을 해 군사들이 빠르게 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암문이다. 이 제6암문은 밖으로 노출이 되지 않으며, 북동쪽의 성벽이 돌출되어 암문으로 다가오는 적을 공격할 수가 있다. 인조 15년인 1637년 1월 23일 한 밤중에 습격한 청병을 암문을 통해 나간 병사들이 크게 물리쳤다고 하여, 이곳을 '서암문 파적지'라 한다.

남제1옹성은 파손이 된 채로 아직 복원하지 못했다
▲ 옹성 남제1옹성은 파손이 된 채로 아직 복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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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은 7암문으로 부터 병력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연결을 하였다. 산 등성이까지 연결이 되어있어 양편으로 적을 공격할 수가 있다
▲ 옹성 옹성은 7암문으로 부터 병력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연결을 하였다. 산 등성이까지 연결이 되어있어 양편으로 적을 공격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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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을 지나면 제1남옹성이 있다. 이 옹성으로 군사들이 이동을 편리하게 낸 암문이 바로 제7암문인 옹성암문이다. 이 암문은 홍예식으로 조성이 되었으며, 남한산성의 성벽을 따라 옹성까지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암문은 조성된 곳은 갑자기 성벽의 방향이 바뀌는 곳으로 발견하기가 쉽지가 않다.

포를 발사하는 옹성의 위용

수원 화성에는 네 곳의 옹성이 있다. 이 옹성들은 모두 4대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남한산성의 옹성은 그것과는 다르다. 문을 보호하는 성곽이기 보다는,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한 구조물이다. 이러한 형태는 딴 성곽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제1남옹성은 파손이 된 채로 있다. 하지만 그 일부 남은 성곽으로만 유추해도 상당한 위력을 보였다는 알 수 있다. 산의 능선이 높아지는 끝까지 뻗어있는 옹성은 양편 골짜기를 따라 높은 곳으로 오르는 적을 막아낼 수가 있다. 더욱 옹성의 끝에는 8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옹성의 끝에는 포를 쏠 수 있는 포구가 나 있다
▲ 포구 옹성의 끝에는 포를 쏠 수 있는 포구가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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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암문에서 병력이 옹성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상 밖에 또 다른 외성을 쌓았다
▲ 연결통로 7암문에서 병력이 옹성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상 밖에 또 다른 외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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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에서 직접 제7암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는 남한산성의 옹성과 암문. 이런 구조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남한산성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다. 눈길을 밟으며 찾아간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예전 인조 때 식량만 충분했다면, 삼전도의 굴욕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수원인터넷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남한산성, #암문, #옹성, #사적,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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