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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계평야. 교과서에도 나오는, 경상북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 지대이다.
 안계평야. 교과서에도 나오는, 경상북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 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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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은 경상북도의 한복판에 있는데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넓은 들판, 안계평야까지 거느리고 있어 예로부터 자연스레 정치적·경제적 요지가 되었다. 신라가 514년(지증왕 15)에 소경(小京)을 설치할 때, 안계 일대로 여겨지는 아시혜현(阿尸兮縣, 757년에 安賢縣으로 이름이 바뀜)이 '작은 서울' 대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점과, 단북면의 월봉산에 '서울 뒷산'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점도 당시 의성 지역이 차지했던 비중을 잘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중요 지류 중 하나인 안계평야의 위천(渭川) 주변에는 삼한 시대부터 이미 상주 공검지,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나라의 5대 저수지였던 '대제지(大堤池)'가 있었다. 그만큼 의성은 중요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성 지역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나라가 있었다. 중국 <후한서>의 기록에 나오는 삼한 시대 12개 나라 중 하나인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東國)이 안계 평야의 일부를 차지하는 단밀면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나, 조문국(召文國)이 신라의 왕관과는 아주 다른 금동관(金銅冠)까지 출토된, 무려 200여 기에 이르는 고분(古墳)을 밀집해 남기고 있는 것 등을 미뤄볼 때, 풍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큰 세력이 의성 지역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의성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 의성 지역이 아득한 옛날 강대한 세력지였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의성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 의성 지역이 아득한 옛날 강대한 세력지였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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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금성산 일대의 조문국은 상당한 강국이었다. 하지만 조문국은 185년(신라 벌휴왕 2) 대규모 공격을 해온 신라를 이기지 못해 언제부턴가 '조문군'이 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우리 땅에 중국식 이름을 붙이는 조치에 따라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뀐다. 문소군은 비옥(현재의 의성군 비안면), 안현(안계면), 단밀, 진보 등 4개 현을 거느렸다.

그런가 하면, 통일신라 시대인 700년 무렵, 금성산 아래에 장대한 탑―국보 77호인 '의성탑리5층석탑'이 세워진 것도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경주 분황사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건축된 이 모전석탑(模塼石塔)이 통일신라 그 넓은 국토 가운데서도 유독 의성에 세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중요한 곳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돌을 벽돌처럼 네모나게 다듬어 차곡차곡 쌓았기 때문에 마치 전탑(塼塔)처럼 보이는 탑리5층석탑은 처음엔 '조문탑'이라 불렸다. 조문탑이라는 이름에는 조문국의 고토(故土)인 조문군에 세워진 탑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탑리5층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나아가는 우리나라 탑 건축의 변천사를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의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929년(경순왕 3), 후백제왕 견훤의 5천 대군이 문소군을 공격해 온다. 왕건을 지지하여 고려의 장군으로 활약하던 문소군 성주(城主) 홍술이 용맹하게 맞서 싸우지만 결국 전사한다. 홍술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 왕건은 940년(태조 23년) 문소군을 '의성부(義城府)'로 개명(改名), 승격시킨다. 홍술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기려 문소'군'을 나라 안에 10곳에 지나지 않았던 부(府, 현대 용어로 하면 '시' 정도)로 승격(昇格)시켰고, 또한 '의(義)로운 지역[城]'이라는 새 이름을 주어 찬양했던 것이다.

의성에는 '국보'가 있다. 의성탑리5층석탑.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모전석탑이다.
 의성에는 '국보'가 있다. 의성탑리5층석탑.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모전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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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의 인구는 2011년 현재 약 6만 명이다. 땅은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하는 관계로 많은 시‐군과 닿아 있다. 동쪽은 청송군, 서쪽은 상주시, 남쪽은 구미시와 군위군, 북쪽은 안동시와 예천군으로 바로 통하는 사통오달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상북도의 요지에 앉아 있는 의성, 군청 건물 앞면에 커다랗게 '할 일 많은 의성, 함께 뛰는 군민' 구호를 내건 채 오늘도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의성군은 의성읍과 17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성'면'이 의성'읍'이 된 것은 1940년 11월 1일의 일이다.

의성의 대표적 답사지를 추천하면

의성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모전석탑인 '의성탑리5층석탑'이 있다. 국보 77호인 이 석탑 근처에는 조문국 유적인 금성산 고분군이 있고, 우리나라의 공룡발자국 중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도 있다. 제오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死火山)인 금성산 아래 마을로, 목화를 대대적으로 재배하여 우리 겨레를 백의민족으로 탄생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곳이다.

또 의성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피면 온 세상이 금빛으로 보이는 '산수유마을(사곡면)'도 있다. 산수유마을인 화전리는 탑리5층석탑에서 동북쪽 산골 안에 조용히 숨어 있다. 그리고 화전리와 탑리5층석탑 중간쯤에는 의성의 명소인 빙계(氷溪)계곡이 있다. 한여름에도 한여름에 고드름이 어는 빙혈(氷穴)을 거느린 신비의 땅이다. 이미 최치원이 머무른 적이 있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임진왜란 때 이곳의 경치에 감탄하여 계곡 복판의 바위에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왜가리가 훨훨 날아드는 신평면 중율리의 숲과 들 또한 중요한 답사지이다. 5월 말에 이곳에 가면 하늘과 들을 하얗게 덮은 새들의 아름다운 날갯짓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왜가리는 의성군의 군조(郡鳥)로 존경(!)받고 있다.  

다인면 효천지에서 바라본 비봉산
 다인면 효천지에서 바라본 비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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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에는 올라가 보고 싶은 산들도 여러 곳 있다. 대곡사에서 오르는 비봉산, 고운사 북녘 갈라산, 조문국 산성과 봉화대의 유적을 밟는 금성산, 만장사의 예쁜(!) 불상이 신기한 화장산, 낙동강변의 낙정 나루터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만경산,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청화산, 공민왕이 피신해 있었던 금학리 성터의 황학산 등이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의 내용을 갖춘 명산들이다.     

의성이 생산하는 대표적 농산물에는

의성 군내에서 보는 마늘 모양의 버스 정류소
 의성 군내에서 보는 마늘 모양의 버스 정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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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가 1986년에 펴낸 <한국의 발견- 경상북도>를 읽은 독자들 중에는 지금도 다음의 내용이 기억난다는 분들이 있다. '의성마늘은 여덟 쪽의 논마늘로 크지는 작지만 맵고 찐득찐득한 즙액이 많아서 서울의 경동시장 같은 데에서도 높은 값을 쳐준다. 그래서 마늘값이 한창 뛰었던 해에는 "의성 사람 마늘 한 니야까(리어카) 싣고 나가서 돈 한 니야까 싣고 온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이다.'

그만큼 의성은, 전국 제1의 품질에 힘입어 최고의 명성을 휘날리고 있는 '의성마늘'이 재배되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한지(寒地) 마늘을 생산하는 곳이다. 의성은 '마늘 먹인 소'로 전국 쇠고기 시장을 공략하고 있으며, 대구광역시와 가까운 봉양면 도리원에 '마늘소 먹거리 타운'도 만들어 두었다.

안계평야 일대의 안계, 다인, 구천, 단밀 등지에서 생산되는 쌀은 깨끗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의성군은 이 쌀에 '의로운 쌀', '의성 황토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옥성면 산간지대에서 생산되는 사과도 '옥사과'로 많이 알려졌다. '산수유'와 '의성 홍화씨'도 좋은 약재로 명성을 얻은 지 오래되었으며, 그 외에 자두와 포도도 의성의 우수한 농산물로 인정받고 있다.


태그:#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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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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