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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라면 뭔가 누려야 할 것 아닌가? 내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누렸나?"

 

'권력실세'라는 세간의 평가를 들이밀자 그의 항변이 쏟아졌다. 지난 10일 대구 남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남들이 가지 않는 아프리카, 중남미, 중앙아시아 등 오지만 다녔다"며 "그런 지역을 다니는 게 권력이라면 권력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박 전 차관은 MB정부 4년 동안 '권력실세', '왕의 남자', '왕차관', '실세차관', '이상득의 양아들' 등으로 불렸다. 본인은 "권력을 누린 적 없다"고 항변하지만,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지식경제부 차관'으로 압축된 '회전문 인사'는 그가 MB정권의 '실세'였음을 뒷받침한다.

 

또다른 권력실세였다가 권력중심에서 밀려났던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박 전 차관을 두고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 노무현 정부의 안희정·이광재를 다 합쳐 놓은 것 같은 힘을 가졌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오마이뉴스>는 그런 박 전 차관을 지난 10일과 11일 각각 대구와 서울에서 두 차례 만났다. 그는 작심한 듯 총 6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선뜻 내주었다(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전문 참조).

 

"이상득 의원을 진작 떠나왔다... 내 정치 시작한다"  

 

먼저 박 전 차관은 앞서 언급한 정 의원의 평가와 관련해 "예능적 소질이 있는 정 의원이 좀 재밌게 표현한 것일 뿐 대통령이 특정 개인에게 그런 힘을 준다는 것은 난센스"라며 "나는 힘보다는 설득을 통해 일을 많이 했다"고 반박했다. 특히 자신이 여전히 '이상득 의원 보좌관'으로 불리는 점에도 분명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내가 기업에 9년간 있다가 이 의원을 11년간 모셨다. 그 분을 떠나온 지 7년이 지났는데도 '이상득 의원 보좌관' 얘기를 하나? 나는 (이미) 대통령 사람이다. 조직인은 자기가 모시는 사람이 바뀌면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기존에 모시던 사람을 되돌아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전히 '이상득 양아들'로 불리고 있는 박 전 차관의 '정치적 독립선언'인 셈이다. 그는 '이제 이 의원으로부터 독립할 시기가 온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제 왔다가 아니라 진작 이 의원을 떠나왔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골프로 비유하자면 나는 그동안 캐디 역할만 했다. 플레이어를 돕는 참모의 역할만 해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플레이어로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내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박 전 차관은 "이명박 대통령한테서도 독립한다고는 표현할 수 없다"며 "이 대통령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 정책방향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즉 '이상득 의원으로부터 독립한 MB 계승자'라는 얘기다.

 

"일을 하기 위한 기반을 이 의원에게 배웠다면, 그걸 현실에 적용하고 실행, 실천하는 것은 대통령에게서 배웠다. 모신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을지 몰라도 내가 역량을 키워내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부분에서 대통령이 훨씬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민주파 정부로부터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온 MB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인한 '촛불시위'였다. 박 전 차관은 "당시 청와대에 상당한 위기감이 있었다"고 전했다.

 

"촛불시위는 초기 국정방향에서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MB는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고 봤다. 그런데 촛불시위가 등장했다. 우리의 대국민홍보가 미숙한 탓도 있지만 정권을 상실한 쪽이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발화점으로 결집한 측면이 있다.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하다 보니까 정권 상실로 인한 박탈감이 컸던 것이다. 그것이 정권을 운영하는 데 상당한 부담으로 느껴졌다."

 

물론 박 전 차관은 정부의 촛불시위 대응 방법이 상당히 미흡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국민을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며 "좋은 정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국민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를 그 이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전문가그룹에 의한 사실전달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국민 여론이 한쪽 방향으로 형성되고 나니까 정부나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가 안 먹혔다. 우리가 성능이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과 그것을 구매자한테 매력있게 얘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MB정부에서 없애버린 국정홍보처의 역할이 절실했다. 박 전 차관은 "기자실 대못질 등 부작용도 많았지만 그런 부작용만 보고 국정홍보처를 없애버린 점이 아쉽다"고 토로했다. 결국 그는 국무차장으로 복귀한 뒤 청와대 일부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각 부처의 대변인실로 구성된 '국정홍보회의체'를 만들었다.

 

"지금처럼 대통령 맘대로 욕하는 시절 있었나?"

 

 

하지만 박 전 차관은 'MB정부에서 언론의 자유 등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시절만큼 대통령을 그렇게 맘대로 욕하는 시절이 있었나?"라며 "심지어 대통령을 동물에까지 비유하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하회탈춤에서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친 게 있다. 국민이 선택한 리더인데 거기에서는 최소한의 선을 지켜줘야 하지 않나?"

 

그럼에도 끊임없이 'MB정부의 역사후퇴론'이 제기된 것과 관련, 박 전 차관은 "87년 체제 이래 정권 말기에 나오는 평가를 보면 거의 유사하다"며 "지난 10년간 반복적이다"라고 꼬집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권위주의마저 없어졌다. 그게 노무현 정부의 성과였다. 그런 분위기에 있다가 MB정부가 들어서 국가원칙을 세우고자 했고,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권위가 깨진 분위기에 있다가 새로운 원칙과 기준이 생기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체감하는 것이 강하지 않겠나?"   

 

특히 MB내각 1기 인선을 주도했던 박 전 차관은 정치권과 언론, 시민사회 등으로부터 쏟아진 '고소영-강부자' 비판에도 "할 말이 많다"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1기 내각에서 고대 출신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소망교회 출신도 강만수 등 두 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영남 출신 비율도 (이전보다) 한두 명 더 많은 정도"라고 반박했다.

 

"박미석 수석의 남편이 고대 교수라고 그를 고대 인맥에 넣었다. 소망교회 신자로 포함시킨 곽승준 수석은 대대로 불교신자다. 또 '강부자 내각'이라고 하지만 노무현 정부 말기 아파트값이 폭등하면서 공시지가가 올라 (후보자들의) 재산이 늘어난 것뿐이다."

 

박 전 차관은 "23명의 차관 중에서 고대 출신은 1명뿐이었다"며 "고대교우회에서 '고대학살자'라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어 박 전 차관은 "우리나라에서 인사할 때 지역, 여성, 학교, 종교, 재산 등 고려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아 적임자를 선택하기 어렵다"며 "게다가 고위직 인사의 자질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눈높이가 엄청 높아져 그런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고르려면 (인사풀이) 정말 협소해진다"고 지적했다.

 

박 전 차관은 "인사와 관련, 지금의 기대 수준을 계속 가져가면 어떤 정부라도 한계에 부딪친다"며 "국회나 언론에서 인사검증의 원칙과 기준, 범위 등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내가 인사를 했을 때는 10명한테 제안하면 한두 명 거절했다. 그런데 인사청문회가 까다로워지면서 10명 중 8명은 안한다고 한다. 길어야 1~2년 장관 하는 건데 청문회에서 완전 박살나니 누가 하려고 하겠나? 이런 문제도 심각하다. 현실적 한계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청문회 대상 기간을) 최근 10년으로 제한하자고 제안한다."

 

"국무총리실의 김종익씨 사찰은 완전한 법이탈행위"    

 

정권을 창출하고, 대통령을 보좌했던 역대 정권 '실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 전 차관도 현재 모든 의혹의 중심에 서 있다. 인사전횡 의혹에서부터 민간인 사찰 배후 의혹, 해외자원개발 권력비호 의혹 등에서 그의 이름이 계속 거론되고 있다.

 

박 전 차관의 인사전횡 의혹을 가장 강력하게 제기한 인사는 공교롭게도 정두언 의원이었다. "국정농단세력"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는 "한때 모든 걸 행사하다가 아침에 모든 권한을 놓게 되니까 거기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며 이런 일화를 전했다.

 

"2008년 1월 초엔가 당선자가 파리에 있던 류우익 실장을 불러들였다. 류 실장이 당선자를 독대하고 나온 뒤에 나를 불렀다. 당선자가 '기존의 인사위원회를 해체하고 당신이 새롭게 구성하라, 다만 그동안 진행된 인사 히스토리(과정)을 알아야 하니까 박영준만 남겨두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각을 하고 있어서 나도 놀랐다."

 

박 전 차관은 "자기하고 일했던 사람 중에 유일하게 나만 남은 것을 정 의원이 오해한 것 같다"면서도 "중간에 일을 하다가 잘못했든 배려를 덜 받았든 간에 한 정권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정권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 전 차관은 민간인 사찰 배후 의혹과 관련해서도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생긴 때나 김종익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나는 야인이었다"며 "(오히려) 국무차장으로 복귀해 국무차장 산하에 있던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사무차장 산하로 편재했다"고 해명했다. 다만 그는 김종익씨 사건의 경우 "완전한 법이탈행위"라고 규정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수십 년 지속되어온 조직이었는데 박재완 수석이 총리실 규모를 줄인다며 날려 버렸다. 그러다가 공무원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며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지다 보니 국민은행을 공기업으로 알고 조사한 것 같다."

 

해외자원개발 권력비호 의혹은 현재진행형이다. 박 전 차관이 씨앤케이와 케이엠디씨를 지원해 각각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과 미얀마 가스 개발권을 얻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주가가 폭등해 권력 주변에서 그 차익을 챙겼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박 전 차관은 "당시 카메룬 현지에 갔던 직원들에게 '여러분은 물론 친인척이든 누구든 씨앤케이 관련 주식을 사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며 "나하고 같이 일한 사람 중에는 (주식투자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씨앤케이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권 획득과 관련된 보도자료를 낸) 김은석 대사의 동생인가 처남인가가 주식을 좀 했다고 한다. 씨앤케이 오너가 청주 사람인데 김 대사의 처가가 청주다. 그 오너가 김 대사 누나하고 친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처음 문제가 됐을 때 김 대사 본인이 수차례 감사원 자체 감사를 요구했다. 자신있다고 했지만 실제 조사를 해보니 그의 친인척 일부가 주식투자를 했다."

 

일각에서는 권력실세들(이상득-박영준)이 자신들이 주도한 해외자원개발외교를 통해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박 전 차관은 "463만명의 선진국민연대를 조직하면서도 단 한 건의 금전사고도 없었다"며 이렇게 일축했다.

 

"철저히 자기 돈 쓰게 했다. 그 원칙 만드느라 정말 고생했다. 처음에는 욕을 많이 얻어먹고 고생했다. (역대 정권에서) 사조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구속됐다. 하지만 나 구속되기 싫었다. 감옥가기 싫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엄청나게 노력했다. 내가 정치자금을 만들 이유가 없다."

 

한편 박 전 차관은 지난해부터 대구 중-남구 총선 출마를 준비해왔다. 그는 "한나라당 공천 못받는 것을 상상하지 않고 있다"며 "대구 남구에 33평 아파트를 아예 샀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태그:#박영준, #이명박, #이상득, #정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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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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