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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회사원 10년 차에 시작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올해로 6년째가 됐다. 첫 기사를 비롯해서 지금도 주로 복싱 관련된 기사를 쓴다. 과거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였던 복싱이 야구, 축구에 내주고 초라한 신세로 몰락한 것이 안타까웠고, 한국 챔피언이 되고도 기사 한 줄 실리지 못한 한국 챔피언 유망주 선수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체육관들을 방문하며 인터뷰 기사를 썼다.

 

서른 무렵에 시작한 취미로 복싱을 7년째 배우고 있던 내가 전국복싱대회에 출전해서 프로선수를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둔 내 이야기를 직접 기사로 쓰기도 했다(관련기사 : 몇대 맞으니 생존본능이 솟았다). 그 기사로 인해 작은 유명세를 타고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정도만해도 <오마이뉴스> 기자 활동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린 사람으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사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TV 드라마에 직접 출연을 하게 됐다.

 

프로복싱선수 출신으로 연기자 활동을 해오고 있는 조성규를 지난 2009년 20년 만의 복귀전 기사를 쓰면서 알게 됐다. 또한, 선수 출신답게 복싱 장면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그에 대해 '복싱 장면에선 내가 챔피언'이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내가 드라마에 출연하다니...

 

어느날, 그가 전화를 해오더니 KBS 창사특집 드라마에서 본인이 복싱 장면에 관한 섭외를 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며 자신은 주인공 선수의 트레이너로 등장하고, 내가 상대방 선수 트레이너 역할을 맡아보는 것은 어떤지 물어왔다. 엑스트라도 아닌데다가 내가 기사로 출연소식을 알리던 배우에게 함께 출연해 보자는 제의가 들어와 믿어지지 않았지만, 꿈은 아니었다.

 

촬영이 평일인 탓에 하루 휴가를 얻어 중구 구민회관 강당에 설치된 촬영장으로 향했다. 링이 세워져 있었고, 관중석에는 2백 명 가량의 엑스트라들이 앉아 있었다. 촬영 스텝들만도 30여 명은 족히 넘을 듯. 오전 9시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영하 16도의 강추위가 몰아친 날이었지만, 잡소리가 들리면 안 된다며 히터를 전혀 가동하지 않은 탓에 처음부터 몹시 추웠다. 하지만,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TV 문학관 <찰나>는 소설가 김훈의 <강산무진>을 드라마화 한 것이란다. 총 90분 분량 중에 복싱 장면은 기껏해야 5분 가량. 하지만 촬영장에는 300여 명에 가까운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모여 있었다.

 

나한테 심판, 트레이너, 선수가 서 있는 위치, 예비종이 울리고 종이 울리는 타이밍 등 극중 리얼리티를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연출 선생님이 바로 <토지> <삼포 가는 길> <길 위의 날들> <밤주막> 등 내가 감탄하면 봤던 드라마를 만든 김홍종 PD라는 사실 또한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5분도 안 나오지만, 나는 주연이다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오후 3시가 돼서야 점심을 햄버거로 먹자고 한다. 저녁에는 끝나겠거니 했지만 대가 김홍종 PD의 주문은 참으로 혹독했다. "복싱을 보여줘야지, 이건 씨름이잖아" "야, 오버하지 마. 맞기도 전에 왜 고개를 젖히니?" "다시 해봐. 방금한 거랑 똑같이!"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촬영은 계속 됐고, 맘에 드는 장면이 나오면 그 장면을 그대로 하되 소리 없이 박수치고 응원하는 시늉만 내서 그 장면을 또 연기하라고 했다.

 

관중석에 앉은 탓에 움직임이 별로 없는 엑스트라들은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게다가 소리 없이 동작만 가야 하는 상황을 깜빡 잊은 내가 "일어나, 일어나"하고 혼자만 소리를 내자, "누구야"하는 PD의 불호령과 함께, 관중석에서 떨고 있는 엑스트라들의 싸늘한 시선이 화살이 되어 내 등에 꽂히는 듯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보조 트레이너를 맡았던 연기자가 바뀌어 있었다.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오후 9시 반이 돼서야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저녁식사로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복싱선수 눈두덩 부은 분장이 1시간 걸리는 덕분에 그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결국 촬영은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끝났다. 나를 비롯한 전 한국 챔피언 출신 임철현 선수를 섭외한 조성규는 "촬영이 예상보다 힘들고 늦어져서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 했지만, 난 그저 내 식대로 상상했던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경험해 봤다는 생각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제목인 <찰나(순간의 깨달음)>처럼 내가 나오는 장면은 90분 중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이겠지만, 이 찰나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컸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찰나의 장면을 구성하고 있는 무명 배우들의 고충과 소중함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고생한 보람은 충분했다.

 

KBS 창사특집극 <찰나>는 3월 3일 KBS 1TV 오후 9시 50분에 방송될 예정이다. 안재모, 서갑숙, 서인석 등이 출연하는데, 사실 내가 만날 기회는 전혀 없었다. 드라마 90분 중 비록 짧게 등장하는 복싱 코치 역할이지만, 이날 15시간 촬영장에서만큼은 내가 주연급 배우였다는 걸 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태그:#TV문학관 찰라, #이충섭, #조성규, #임철현, #복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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