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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하되는 오이상자에 '윤금순'이라고 찍히는데 감격스럽더군요. 판매대금도 내 이름으로 된 통장으로 입금되고…. 독립경영이 여성농민에게 꼭 필요하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출하되는 오이상자에 '윤금순'이라고 찍히는데 감격스럽더군요. 판매대금도 내 이름으로 된 통장으로 입금되고…. 독립경영이 여성농민에게 꼭 필요하구나를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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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엔 인생이 담긴다. 꼭 손금을 보지 않아도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지난달 13일 저녁, 서울 영등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윤금순(53) 통합진보당 농민위원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따뜻했다. 2001년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기념행사를 진행할 때, 북측의 최창숙 조선민주녀성동맹 부위원장이 남측 여성 공동대표로 참가한 윤 위원장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손'이라고 소개된 적도 있는 손이다.

20년 넘게 농사지어 자식들을 키어온 여성 농민의 '귀한 손'. 인터뷰 전, 그 손이 이루어낸 다양한 약력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농민단체인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 회장, 국제농민단체인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지역 공동대표, 전국의 여성단체들이 모인 전국여성연대의 상임대표에 2005년엔 노벨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었다. 한국의 시골 아낙네가 세계적인 여성 리더로 커온 힘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농업현실을 바꾸려면 농민이 정치를 해야

윤 위원장은 현재 경북 성주에서 남편 최진국(54)씨와 함께 참외농사를 짓고 있다. 최근 대외활동이 많아서 집을 비우기 일쑤인 그는 "노동력은 많이 못 대고 있긴 하지만 판매망을 뚫거나 경영계획을 꼼꼼히 짜는 건 내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다정한 남편, 최진국씨는 그가 출장을 갈 때면 구두도 닦아주고 귤, 계란 등 간식도 싸준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인터뷰 당일도 그는 어딜 다녀온 듯 보였다. 어깨엔 보라색 숄이 걸쳐져 있었다. 보라색은 통합진보당의 상징색이다. 그는 전여농 전북지역 대의원대회에 참가해 통합진보당 입당을 독려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통합진보당은 통합과정에서 농업정책분야 인력을 축소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똑같이 농업을 괄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전여농은 통합진보당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바도 있어서 농민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처음엔 농민들 분위기가 좀 안 좋았죠. 농업 정책분야 축소 문제도 그렇지만 농업의 피해가 불 보듯 빤한 한미 FTA를 추진했던 정부의 여당과의 통합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제, 많이 정리가 됐고 통합진보당으로 마음을 모으는 중입니다. 농업 현실을 바꾸려면 농민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큰 흐름을 멈출 수 없다는 의지가 강하죠."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과 전여농은 2003년 (구)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선언으로 정치세력화를 천명했다. 그동안 농민운동이 과격하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하자 윤 위원장은 "별로 안 과격했죠. 현실대로라면 세상을 뒤집어엎었어야 맞아요"라는 더 과격한 발언을 했다. 모든 물가는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만 떨어지는 걸 정부 등이 방조해왔다는 설명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다만 농민들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농민들도 조금은 단순했던 면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이니까 요구하면 정부가 해결해 줄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농민들도 다양한 세력들이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 뜻과 심지 있는 정치인이  법과 제도를 바꾸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 덕에 이름 지어


윤금순 통합진보당 농민위원장은 여성농민운동을 넘어 진보정치를 통해 농민들을 대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윤금순 통합진보당 농민위원장은 여성농민운동을 넘어 진보정치를 통해 농민들을 대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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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지만 뚝심이 느껴지는 윤 위원장의 답변을 듣다가 여성운동을 하는 여성들에게 꼭 하게 되는 상투적인 질문을 또 했다. 언제부터 여성문제에 눈을 떴냐는 이 질문에 그는 "태어날 때부터"라고 답했다.

윤 위원장은 강화도가 고향이다. 농사짓는 집안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넷째 딸이었는데 사실은 여덟째 딸이었다. 앞서 네 명의 언니들이 병으로 어려서 세상을 떠났던 것. 많은 딸들 속에서 그 역시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부모님은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름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원래 태어나서 2년 넘게 이름도 없이 갓난이로 불리었는데 어느 날 면서기가 인구조사를 나왔대요. 내가 출생신고가 안 돼 있으니까 바로 주민등록에 올리라고 했대요. 그 자리에 있던 할머니가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당시에 즐겨 부르시던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였대요. 그래서 '윤금순'이 된 거죠."

농촌의 봉건적인 집안 분위기가 "어려서부터 남녀차별에 민감했던" 윤금순을 만들었다. 할머니가 계란이나 고기반찬을 오빠들만 먹게 하면 "할머니는 왜 오빠들만 편애하냐"고 대들면서 밥상위로 숟가락을 던진 적도 있다.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여자니까 부반장을 맡으라고 해서 "왜 여자는 부반장만 하냐. 그럴 바엔 안 하고 말겠다"면서 거부하기도 했다.

그에 앞서 입지전적인 길을 닦은 둘째언니의 영향을 받았다. 둘째언니는 집에서 고등학교를 안 보내려고 하자 집안에 있던 돈을 들고서 홀로 서울로 올라와 당시 우등생들만 가던 서울여상에 들어갔다. 대학까지는 꿈꿀 수 없었던 둘째언니는 막내라도 공부를 시킨다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윤 위원장을 서울로 전학시켰다.

농사는 세상을 정직하게 사는 길

일찍이 여성문제에 눈 뜬 윤 위원장이 농부의 꿈을 키운 것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다. 남 안 속이고 정직하게 사는 게 뭘까 찾다 보니 농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농협에 빚내러 갔다가 대출을 못 받고 돌아오신 적이 있어요. 술을 드시고는 '빽' 있는 사람은 대출을 해주면서 당신은 안 해주더라며 한탄을 하셨어요. 그때 막연하게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꼈어요. 땅은 세상을 안 속이고 땀 흘린 만큼 소출을 내주니까 커서 농사를 짓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농민운동을 하면서 꼭 그런 건 아니란 걸 알았지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농사지을 고민을 했다. 아버지에게 농사지을 땅을 좀 달라고 청하니 노발대발이었다. 공무원, 교사를 최고로 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공무원이 싫으면 대학은 교대로 가야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 마저 거역할 수는 없었던 그는 교대로 원서를 쓰는 대신 시험날 아침에 손수 미역국을 끓여 먹고 시험을 치러갔다. 1점 차로 떨어졌다. 다시,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왔다고 하겠다.

결국 그는 서울시립대 환경공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때부터 당시 농민운동의 주축이었던 고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의 교육을 찾아다니면서 농촌에 갈 준비를 해나갔다. 대학 졸업 후 1년 동안 아버지와 농사를 짓기도 했다.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그의 농사짓는 꿈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아버지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를 놔주었다.

1984년, 충북 충주에 자리 잡고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스물여섯의 아가씨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지역에서 활동을 해야 했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교회를 빌려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만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충주시 농민회 준비위원회를 만들자는 심산이었다.

"아이들과 하루종일 뒹구는 게 피곤하긴 했는데 너무 즐거웠어요. 지금도 그때 애들을 다 기억합니다."

인터뷰 도중 잠깐 전화가 왔다. 당시 그 동네에 살던 중학생이었다. 몇 년 전 그를 잊지 못하고 어렵게 연락을 해온 친구다. 그때 중학생은 지금 40대 아줌마가 됐다.

처음에 충주시 농민회를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으니 그는 "많이 걸었다"고 회상했다. 차편도 변변치 않은 시절이었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서 오늘은 이쪽, 내일은 저쪽식으로 노선을 정한 다음 마을마다 들어가서 집집마다 선전물을 나눠줬었죠."

87년 9월, 3년 만에 충주시 농민회가 건설됐다. 그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여성이 농민회 사무국장을 하는 건 상상도 못하던 때다. 남성 활동가가 고향에 들어가 농민회를 만들어도  최소 4, 5년은 걸리는 일을 지역에 아무 연고도 없는 여성 활동가가 3년 만에 해낸 데 대한 인정이었다. 그는 이후 전농 충북 도연맹을 만드는 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오이 상자에 찍힌 '윤금순', 감격스러워

3년 만에 농민회 사무국장 자리를 내놓았다. 여성농민운동에 주력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였다.

"여성농민들은 농사일은 물론 투쟁에도 앞장서는 데도 농민회로 돌아가면 일개 실무자나 동원대상 밖에 안 되는 겁니다. 여성농민들도 자기 지위를 갖고 주도적으로 운동을 해나갈 수 있도록 집단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농민회 간부로 농가를 가면 저는 여성농민들에게 '우리집 아저씨의 손님'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직책은 내려놓았지만 전농 활동은 계속 했어요."

마을에서 여성농민 학습모임을 꾸리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7년 동안 충주에 깊이 뿌리내렸다. 과정에서 남편 최진국씨도 만났다. 88년 고추값이 폭락해 고추제값받기 싸움을 할 때다. 전국의 농민회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그는 충북대책위 책임자, 최씨는 경북대책위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사람이 굉장히 진중해보이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최씨의 모습에 끌렸다. 2년 연애 끝에 90년 결혼식을 올렸다. 최씨 부모님이 농사짓던 경북 성주군 대가면으로 내려가야 했던 상황. 그는 "충주분들이 여자는 키워봤자 결혼하면 다 떠난다고 배신감 느끼실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제부턴 자네 농사지으면서 농민운동하게 돼 좋겠다'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결혼하자마자 그도 육아라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결혼 다음해에 아들, 딸 쌍둥이가 태어났다. 참외농사가 순 치기나 꽃 수정 등 여성의 손이 많이 가는 농사여서 쌍둥이만 방안에 둔 채 문 잠그고 나와서 일하는 날도 숱했다. 93년, 충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가어린이집'을 열었다. "내 코가 석자"이기도 했지만 농촌 탁아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경북여성농민회 활동도 함께 하던 때다. 여성농민의 문제를 지역사회에서 풀어내는 경험이었다.

윤 위원장 부부는 농사를 시작할 때부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안 쓰는 친환경 농사를 지었다. 그가 대학 전공시간에 배운 환경학, 생태학 등이 "땅이 살아야 농사도 산다"는 고민의 단초를 던져줬다. 초창기엔 거의 소득 없어 빚만 늘어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생협 등과 연계해 판로를 개척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그 와중에 95년엔 농민후계자가 되기도 했다. 농사경영을 거의 남편이 좌지우지하는 가족농 구조에서 여성농민은 내일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는 여성을 굉장히 의존적으로 만드는 구조가 답답했다. 그는 "망해먹어도 좋으니 내 농사를 따로 짓겠다"고 선언했고, 농민후계자 지원제도를 신청했다. 남자들과 경쟁해서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에야 겨우 됐다. 성주군 전체에서 두 번째 여성 농민후계자였다. 지원금으로 비닐하우스를 짓고 오이와 피망을 심었다. 피망은 그가 살던 대가면에서 처음 손댄 작물이었다. 경남 진주를 수십번 왔다갔다 하면서 피망 생산 기술을 배웠다. 농사경영계획을 스스로 짜다보니 영농의욕이 샘솟았다. 책임감도 커졌다. 농작물이 세상에 나올 때는 더없이 뿌듯했다.

"출하되는 오이 상자에 '윤금순'이라고 찍히는데 감격스럽더군요. 판매대금도 내 이름으로 된 통장으로 입금되고…. 독립경영이 여성농민에게 꼭 필요하구나를 깨달았습니다."

당시 그는 전여농의 정책위원장이었다. 그의 실험 이후, 전여농이 계속 정부에 요구해서 지금은 농민후계자 중 20%를 여성에게 우선 할당하는 제도가 생겼다. 그 외에도 전여농은 농가를 하나의 법인으로 인정해 남편과 아내가 똑같이 연금을 받게 하는 등의 여성농민정책의 입안을 주도해왔다. 그는 전여농 사무총장과 부회장을 거쳐 2003년 회장을 맡아 4년간 전여농을 이끌어왔다.


6대륙 40여개국 돌며 전세계 농민 만나


윤금순 위원장은 전 세계 40여개국의 농민들을 만나면서 왕성한 국제연대활동을 펼쳐왔다.
 윤금순 위원장은 전 세계 40여개국의 농민들을 만나면서 왕성한 국제연대활동을 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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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농 회장을 맡았던 2003년부터 그는 국제 무대로 눈을 돌렸다. 전세계 농민운동단체인 비아캄페시나의 동남·동아시아 공동대표를 맡아 전세계 6대륙 40여 개국을 오갔다. 다른 나라 농민들의 삶은 어떠냐고 물으니 그는 "전세계 농민들의 현실은 똑같았다"면서 "전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수입개방이 돼서 몰락해가고 있었다. 땅에서 쫓겨나고, 자살하고, 정부·다국적 기업과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고 전했다.

국제연대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윤 위원장은 2005년 홍콩 WTO(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반대투쟁을 꼽았다. 그가 투쟁 총책임자였다. 바다에 뛰어들어 회의장까지 가는 투쟁도 하고, 세계인이 함께 3보1배도 했다. 여성 3400명이 세계 최초의 여성 행진을 하기도 했다.

시위는 점점 달아올랐고 홍콩 경찰도 예민해졌다. 결국 마지막 날엔 1천 명이 넘는 농민들이 연행되는 일이 벌어졌다. 홍콩 시내 감옥이 부족할 정도였다. 윤 위원장을 비롯한 비아캄페시나 지도부는 구속될 위험이 있어 연행 전에 시위대에서 미리 빠져나왔다. 본부로 와서 보니 현장 상황파악이 어려웠다. 윤 위원장은 다시 집회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본부를 나섰다. 한밤 중이었다. 홍콩 거리는 텅 빈 채로 경찰들만 죽 늘어 서있었다. 몇 사람만 함께 있어도 바로 연행을 해가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는 홍콩 지리도 잘 몰랐다. 물어물어 현장을 찾아가는 도중에 멕시코에서 온 농민을 만났다. 그는 시위현장을 찾아간다는 윤 위원장에게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말렸다. "현장에서 지도하기 위해 가야한다"는 윤 위원장을 말을 듣고 그 멕시코 농민은 "당신이 정말 지도자"라고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윤 위원장은 "그때 그 농민의 말이 나에게 큰 힘이 됐다"고 뿌듯해 했다.

홍콩 투쟁은 한국의 민중운동을 세상에 알린 계기이기도 했다. 투쟁 전 '한국의 폭도들이 온다'고 마타도어가 심했던 홍콩 언론들도 투쟁 과정에서 '한국에서 온 빨간 미녀들'이란 기사를 내보이면서 논조를 바꿨다. '빨간 미녀들'이란 전여농 회원들을 가리켰다. 100여 명이 빨간 조끼를 맞춰 입고 간 전여농 참가자들은 매일 저녁 중심가 백화점 앞에서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홍콩에서 유행한 <대장금> 음악을 틀고 풍물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벌여 인기를 모았다. 빨간 조끼는 단연 인기였다. 투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당시 홍콩투쟁이 벌어졌던 지역의 경찰청장 부인이 전여농에 전화를 걸어와 빨간 조끼를 구할 수 없냐고 문의했을 정도.

2005년 윤 위원장은 세계 150여개국 999명의 여성들과 함께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스위스의 민간단체인 '노벨평화상 1천 여성추천운동협회'가 노벨평화상이 주로 남성들에게만 돌아가 여성들이 차별받는 현실을 고발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계 여성들의 노고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1천명의 여성을 추천받아 노벨평화상 위원회에 후보로 제출했던 것. 한국에서는 당시 전여농 회장이던 그를 비롯해 신혜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등 6명이 추천됐다. 실제 수상은 못했지만 여성운동가들의 활동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2010년 UN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을 만난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해 12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리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 앞서 4월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개최된 '기후 변화 세계민중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반 사무총장에게 설명하기 위해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과 함께 UN을 방문했다. 설명이 다 끝난 후 그가 반 사무총장에게 한국말로 한마디 했다.

"반기문 총장이 사무총장 임기를 잘 마치고(당시는 연임이 결정되기 전이었다) 세계 지도자로서 한국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며 돌아오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세계 인류발전에 기여할 코차밤바 세계민중회의 선언문이 칸쿤 총회에서 통과될 수 있게 힘 써 달라."

윤 위원장은 "반 총장이 헤어질 때 악수하면서 '도와달라'고 했는데 뭘 도와달라는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근데 칸쿤 총회에서 코차밤바 선언문은 전혀 논의가 안됐다는 건 안다"고 덧붙였다.


대안사회, 농업 없이는 안 돼


그는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문제를 비롯해 농업을 빼고는 대안을 얘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는 이미 고갈되고 있습니다. 유한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약탈, 전쟁이 반복되고 있지요. 반면, 농업은 땅과 물, 노동력 등만 있으면 얼마든지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어요. 생태사회는 농업이 활성화될 때 가능합니다. 또한 먹을거리가 없으면 생명유지가 안 됩니다. 최근 벌어진 아랍혁명의 바탕에도 식량위기의 문제가 있어요. 사람이 사흘만 굶어도 법과 제도로 통제하기 힘든 법이에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은 사회의 민주적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가장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전여농은 '언니네 텃밭'이란 이름으로 농업의 대안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여성농민들은 친환경농사를 짓고 도시민들이 그 농산물들을 받아먹는 도농직거래시스템이다. 그는 대안적인 농업이란 "현재의 대규모 단작 중심의 생산구조를 친환경적 생산방식의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농을 중시하면서 생산자의 농산물이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유통방식을 지원하는 농업정책이 뒷받침 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2010년 민주노동당 농민부분 최고위원을 시작으로 진보정치활동을 벌여내면서 우리 농업이 살 방향을 구체적으로 구상해왔다고 한다.

그에게 정치인이 될 고민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더니 3월 입대를 앞둔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들이 대학에 막 입학했을 무렵 집회에 나가는 그에게 "엄마, 만날 그렇게 데모만 하면 세상이 바뀌겠어?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를 해야지"라고 한 마디 하더란다. 그땐 흘려보냈는데 막막한 현실에 부딪칠 때마다 새록새록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윤 위원장이 잊지 못하는 정치인은 누굴까.

"2007년에 베네수엘라의 외교부 장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집무가 늦어져 밤 12시가 넘어서 만났는데 그때까지 정부 청사가 불이 환하게 켜있더군요. 외교부장관 집무실에 들어갔는데 벽면 한쪽이 원주민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장관이 사진 속 원주민들을 가리키면서 '우리 조상이다. 나한텐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문화와 얼을 잇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인상적이었죠."

윤금순 통합진보당 농민위원장은 "농업 없이 대안사회를 논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윤금순 통합진보당 농민위원장은 "농업 없이 대안사회를 논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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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때 "우리에게도 조상들의 얼을 잇고, 헐벗은 서민들을 위해 밤늦도록 일하는 정치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단다.

인터뷰 내내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말을 잇던 윤금순 위원장에게서는 부드러움 속 강한 힘이 느껴졌다. 수십 년 땅을 일구면서 세상을 바꿔온 여성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흙의 카리스마에 매료됐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흙의 카리스마가 정치농사를 짓는다면...' 어떤 모습일지 자꾸 궁금해졌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윤금순, #통합진보당, #전여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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