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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3월 5일 오전 10시, 마포아트센터 앞에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록달록 고운 색깔의 한복을 입은 중년 여성들이 일렬로 서서 반가운 목소리로 입장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성여자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중고등학생들. 이날 마포아트센터 대강당에서 제12회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강당에 들어서자 이미 1, 2층의 700여 좌석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식순을 진행하고 있다
▲ 일성여중고 입학식 모습 식순을 진행하고 있다
ⓒ 강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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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여자중고등학교는 과거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개인 사정으로 제때에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여성 만학도들이 공부하는 2년제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2012학년도 일성여중고의 신입생은 중학교 338명, 고등학교 223명으로 총 561명이다. 올해 최고령자와 최연소자로 중학교에는 80세의 이재옥씨, 19살의 조하이얀 양, 고등학교에는 77세의 이선례씨, 18세의 장현지 양이 입학했다.

올해 최고령 신입생이지만 공부 욕심은 누구 못지않다
▲ 80세의 이재옥씨 올해 최고령 신입생이지만 공부 욕심은 누구 못지않다
ⓒ 강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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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로 올해 최고령자 신입생인 이재옥씨는 친구를 통해 일성여중에 입학했다. 이씨는 앞으로 배울 게 너무 기대된다며 즐거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시절 6·25전쟁으로 학교가 없어지고 가정 형편도 좋지 않아 학교에 다닐 상황이 안 됐죠. 그래서 항상 마음에 배우지 못한 한(恨)이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학교에 오게 됐죠. 제가 나이가 많아 학교에서 받아주실까 걱정을 했는데 입학을 허가해줘서 너무나 고마워요."

이재옥씨는 어렵지만 영어에 관심이 많아 입학 후 영어시간이 가장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욕심 같기도 하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몸이 허락하는 한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다니고 싶다"며 "대학교 영문학과 진학을 꿈꾸고 있다"고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다.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된 입학식은 일성여중고의 교훈인 '진실, 근면, 검소' 제창과 신입생 선서로 이어졌다. 신입생 대표가 나와 선서를 외치자, 500여 명의 신입생은 일제히 손을 올리고 굳은 다짐을 하듯 큰 목소리로 선서를 따라 외쳤다.

이어 고등학교 재학생이 축시로 정호승 시인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중학교 2학년 선배의 1년 전 입학 소감을 듣는 순서에서는 객석에서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인 양 집중했고 몇몇 학생들은 손수건을 꺼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진지한 모습으로 입학식을 지켜보고 있다
▲ 일성여중고 신입생들 진지한 모습으로 입학식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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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에 젖어있던 분위기를 다시 즐거운 분위기로 이끈 것은 축가와 학교 국악부, 합창단의 공연이었다. 신입생들은 흘러나오는 노래에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추고 흥겨워했다.

주부학생들의 노래 솜씨로 입학식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 일성여중고 합창단 주부학생들의 노래 솜씨로 입학식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 강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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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왜 왔습니다?"..."모르는 것 배우기 위해서"

입학식에서 눈에 띈 점은 교장 선생님 말씀이 여느 학교처럼 훈화조라기보다 학생들에게 묻고 답하며 이야기를 나누듯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이선재 교장은 먼저 신입생들에게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며 눈으로만 인사할 게 아니라 입으로 다시 인사하자고 말했고, 신입생들은 웃으며 큰 목소리로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선재 교장은 "호응이 좋아야 공부가 잘 된다"며 "앞으로 수업시간에 반응을 잘해 달라"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어 "공부는 어디에서 배우느냐하는 점이 중요한데 여러분들은 운이 좋다"며 "일성학교에 온 것은 그냥 잘한 게 아니라 썩 잘한 거다"고 웃으며 말했다.

"학교에 왜 왔습니까?"

교장선생님의 질문에 객석에 있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그 말도 맞지만, 모두 따라 외치라고 말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러 왔습니다."

"모르는 것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죠? 그럼 다시 따라 외치세요. 모르는 것은 쉬운 게 아니라 어려운 것이다. 그럼 다시 말하면 공부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자주 하다보면 알게 됩니다.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요. 우리 학생들이 이 나이에 공부가 될까 걱정을 많이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공부는 저절로 됩니다."

그래도 짐짓 걱정이 됐는지 객석 여기저기서 웃으며 "그렇게 잘은 안돼요~ 노력해야 되죠"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이선재 교장은 "공부를 어렵다고 생각하기보다 재미있다고 생각해야 저절로 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하니 객석에서는 금방 "네"라고 대답이 튀어 나왔다.

콩나물 시루를 들어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 교장선생님 말씀 콩나물 시루를 들어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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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교장 선생님이 작은 화분 같은 것을 하나 들어보였다. 그것은 화분이 아니라 작은 콩나물 시루였다. 학생들은 웃음보가 터졌다. 이선재 교장은 콩나물 시루를 보라며 콩나물 시루 밑이 막혔는지 뚫렸는지 물었다. 그러자 주부인 학생들은 자신 있게 "뚫렸어요~"라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선생님들 잘 들으세요. 콩나물에 물을 줄 때, 콩나물 위에 손을 쫙 펴고 물을 주지요. 물을 고루고루 주기 위해서요. 이처럼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골고루 지식과 애정을 나눠줘야 해요.

자, 그럼 콩나물에 물을 주면 밑으로 물이 다 빠져나가죠. 다 빠져나가는데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있겠는가. 물을 그냥 한 번에 다 주면 콩나물이 알아서 크지 않겠느냐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러면 어때요? 콩나물이 안 길러지죠. 오히려 썩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나이 때문에 배운 걸 다 잊어버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싹 다 잊는 게 아니에요. 영양분을 흡수하고 나머지를 버리는 거예요. 당장 생각은 안 나도 머릿속 창고에 넣었다가 천천히 꺼내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선재 교장은 "일성 광산에는 보석이 많이 묻혀있다"며 "부지런한 사람은 많이 캐고 아닌 사람은 많이 캐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장은 "좋은 인연을 이어가서 모두들 보석을 한껏 가득 캐 갔으면 좋겠다"고 신입생들에게 당부했다.

"나라는 존재를 찾으려고 학교에 왔다"

맨 앞자리에서 입학식을 열심히 지켜보던 김옥환(78)씨는 올해 양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일성여중에 입학했다. 김씨는 "평생을 남편과 자녀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제 자신을 희생했는데, 이제는 내 스스로 나라는 존재를 찾으려고 학교에 왔다"며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저는 제 자신을 찾으러 학교에 왔어요"
▲ 78세의 김옥환 씨 "저는 제 자신을 찾으러 학교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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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초등학교 중퇴로 8남매 중 자신과 여동생만 공부를 못했다며, 이번에 3살 아래의 75살 여동생과 함께 나란히 중학교에 다니게 됐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문학 쪽에 관심이 있어 학교에 들어오면 글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이가 있어 10개를 들으면 하나밖에 모르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을 하나라도 배우면 그 재미가 커요. 배우는 걸 즐기는 거죠. 나이가 있어 어쩌면 때가 늦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저는 공부에는 자존심이 없다고 생각해요. 제 스스로 공부를 하고자 찾아서 왔으니 건강만 하면 하는 데까지 계속 해보고 싶어요."

김씨를 비롯해 이미 일성여중고 561명의 마음에는 새 봄이 시작됐다.


태그:#일성여자중고등학교, #입학식, #만학도, #주부학생, #최고령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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