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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km를 달려 다소 지친 상태에다 아킬레스건이 아픈 가운데 산을 넘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시는 몰랐다. 그래서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겠지?
 90km를 달려 다소 지친 상태에다 아킬레스건이 아픈 가운데 산을 넘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시는 몰랐다. 그래서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겠지?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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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엔 큰 산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경상남도 거창과 경상북도 김천을 가르는 수도산(1317km)이다. 이 산 오른쪽은 덕유산(1614km), 왼쪽은 가야산(1430m)이다.

2007년 9월 22일 오후 4시경, 김천을 떠난 자전거 위엔 내가 앉아 있었다. 19일 서울에서 출발했으니 벌써 4일째였다. 추석을 맞이해 서울에서 경상남도 마산까지 자전거로 간다는 목표를 세우고 여기까지 왔다.

이날은 충북 괴산에서 출발해 90km 정도를 달려온 터였다. 적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이 달린 것도 아니었다. 몸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큰 산을 넘다

문제는 저 산이었다. 거인처럼 떡 버티고 선 저 산. 원래는 김천에서 마산으로 바로 갈 계획이었다. 만나기로 한 선배가 거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방향을 틀었더니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가진 무기는 흔히 타는 자전거보다 바퀴 크기가 6인치 정도 작은 20인치 바퀴 자전거. 병풍처럼 늘어선 산을 보자니 흡사 돈키호테라도 된 기분이었다. 저 산은 거인이고, 자전거는 로시난테(돈키호테가 탄 늙은 말)였다. 4일간 고개를 여러 번 넘어 몸은 다소 지친 상태. 자전거 또한 오는 동안 비를 흠뻑 맞은 데다 거친 주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한 상태였다.

우리나라는 산과 언덕이 얼마나 많은지. 서울에서 김천까지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개를 넘었는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산과 언덕이 얼마나 많은지. 서울에서 김천까지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개를 넘었는지 모른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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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안장높이가 맞지 않아 아침부터 아킬레스건이 슬슬 아픈 게 변수였다. 고개를 여러 번 넘으면서 다소 무리를 한 탓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거니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통증이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퍼진다. 아킬레스건에서 시작된 통증이 종아리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여기서 그냥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가고 싶었지만, 아쉬움이 문제였다. 김천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3시 30분밖에 되질 않았고, 달린 거리도 100km가 되지 않았다. 몸은 '더 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남은 거리도 70km. 버스를 타면 1시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아무리 지쳤어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는 말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놓쳤다. '애걔 1시간 20분밖에 안 걸리네. 도착하면 5시도 안 되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60km를 갓 넘기는 거리를 버스가 1시간 넘게 걸린다는 걸 왜 생각 못했을까.

일단 산을 넘어야 하니 근처 가게에서 찹쌀떡 네 개, 양갱 하나, 보리차 하나를 사서 준비를 한 다음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김천 시내를 벗어나자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 몸이 무거워지니 조금씩 속도가 떨어진다. 급기야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제 경사가 시작이다. 길은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한다.

고개를 하나 넘고 나니 아무리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어도 체력회복이 되지 않는다. 땀과 비가 뒤범벅된 몸은 물먹은 솜뭉치 같다. 평지 속도가 기껏 12km. 몸이 가벼울 때 속도의 절반에 불과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은 아주 편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일단 오르막만 오르면 된다고 생각하니 남은 거리가 60km가 아니라 30km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했지만 당시엔 그걸 믿었다.

이런 내 바람과는 달리 비는 점점 더 거세진다. 산에서 바람을 타고 내리는 비다. 이제 해도 떨어진다. 김천에서도 꽤 멀어졌다. 비옷 속으로 비가 들이친다. 이제 포기해야 겠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다 이젠 껌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차가 지나가면 태워달라고 부탁해야지'라는 생각과 '지금까지 온 게 있는데 조금만 더 가서 부탁하자'는 생각이 싸운다. 정말 힘들다는 건 본능이니 누가 차를 '끽' 세운 다음 '타세요' 했다면 냉큼 탔을 것이다. 일부러 차를 세우지 않겠다는 것은 자존심이라기보다는 관성이다. '차를 세우려면 어떻게 하지'와 같은 생각도 돌아가질 않으니 그냥 힘겨운 상황에 몸을 맡기고 가는 거다.

보통 상황이라면 오후 7시 정도는 돼야 날이 흐려진다. 그러나 지금은 비도 오고 산이다. 오후 6시가 안 됐는데 벌써 하늘이 심하게 흐려진다. 이대로 해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빨리 이 산을 벗어나야 한다. 산꼭대기에만 도착하면 그다음부터는 내리막이니 어떡하든 될 것이다. 작은 고개 밑에서 마지막 남은 간식과 물을 털어 넣고 페달을 밟았다.

드디어 찾아온 어둠... 장거리 여행과 폭우로 녹초가 되다

산 속에서 맞은 어둠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무조건 저 어둠을 뚫고 산을 넘어야 했다.
 산 속에서 맞은 어둠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무조건 저 어둠을 뚫고 산을 넘어야 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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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포기할까 싶은데, 눈앞에 큰 고개가 하나 나타난다. 김천 대덕면과 거창군 웅양면을 가르는 우두령(해발 580m)이다. 보기에도 높다. 저것 하나만 넘고 이제 포기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기 전에 그래도 저 큰 언덕은 넘어야 후회가 안 될 것 같았다.

긴 고개를 넘을 때는 요령이 있다. 본디 몸이란 게 눈을 통해 먼저 느끼는 법이다. 가파르고 길다는 걸 보게 되면 먼저 몸이 퍼져버린다. 그래 땅만 보고 간다. 땅만 보면서 페달을 젓기 시작한다. 주변엔 집도 없고 가게도 없고 불빛도 없다. 지나가는 차도 없다. 이 고개를 넘지 못하면 그냥 비 내리는 산에서 미아가 된다. 미아 수준이 아니다. 무섭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무리 긴 고개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어쨌든 그 짜릿한 내리막을 맛보기 위해선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 이제부턴 내리막이다. 내리막이지만 경사가 완만하니 의외로 속도가 나지 않는다. 곧이어 웅양면에 도착했다. 식당이 세 군데 눈에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찮다. 배가 무척 고팠지만, 좀 더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조금 더 내려가면 마을이 있단다.

표지판을 보니 거창읍까지 남은 거리는 29km. 몸이 최적인 상태라면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지금은 평속 10km에 불과하다. 3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다. 오기가 생겨 남은 거리를 10km대로 줄인 뒤 한 번 더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10km를 못 갈까.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그렇게 한 마을을 지나고 또 한 마을을 지났다. 시골에선, 특히 이런 산동네에선 일찍 불이 꺼진다. 집도 가게도. 도시처럼 새벽까지 장사를 하지 않는다. 아까 웅양면에서 밥을 먹었어야 했다.

몇 개 마을을 지났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한참 달렸나 싶었는데 달린 거리 겨우 4km. 아직도 거창읍까지 25km가 남았다. 비록 완만하지만 내리막에서 이렇게 속도가 나질 않으니 힘이 빠진다. 자전거를 타고 거창에 들어가는 걸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몸이 힘이 넘치는 상태로 회복이 된 것이다. 박카스에 우루사 10개를 털어놓고 산삼 한 뿌리를 잘근잘근 씹어 먹으면 이런 힘이 솟아날까. 피로함이 싹 가셨고 페달질은 갑자기 가벼워졌다. 평지에서 속도가 33~35km가 찍혔다. 그런데도 전혀 숨이 가쁘지 않았고 다리에 무리가 가지도 않았다. 속도는 30km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마라톤에서 말하는 '사점(死點)'을 넘겼기 때문일까. 비가 기운을 불어넣은 것일까. 1km 달리기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금세 6km를 달렸다. 남은 거리는 19km. 자신감이 생겼다. 10km까지 줄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이 쓰이는 점이라면 밤이라서 주위가 어둡다는 점과 비가 와서 바닥이 미끄럽다는 점. 그러나 몸에 힘이 붙으면 조종능력이 좋아진다. 몸에 힘이 떨어지면 의식이 흐려져 사고가 날 확률이 높아진다. 비 오는 날 운전엔 익숙하고, 지금 몸엔 힘이 넘친다. 어둠에도 이미 익숙해져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자동차는 거의 보기 힘들었다. 산속의 고요는 무서웠지만 힘이 붙은 자전거는 어떤 적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게 거창읍을 8km 남긴 거리까지 쾌속 질주를 했다.

위기는 다시 한 번 찾아왔다. 이제 8km만 가면 읍내에 도착하는데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앞뒤 등을 다 켜도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지나는 자동차들이 비추는 앞등 불빛을 보면서 따라갔다.

눈에 힘을 주고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칫하면 수로에 빠질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수로에 빠지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머리가 어디에 부딪힐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조그마한 틈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남은 8km를 밟았다. 역시 거창은 쉽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둠과 사투를 벌이면서 마침내 거창읍 진입. 시간은 오후 7시 10분. 정확히 3시간 40분이 걸렸다. 1시간에 대략 18km 달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후유'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비에 젖은 손은 잔뜩 부풀어 올라 주름진 상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럴 수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거창에 못 갔다. 택시 타고 진주로 와라."

거창에 도착한 뒤 찍은 손 상태. 비에 젖어 쭈글쭈글하다.
 거창에 도착한 뒤 찍은 손 상태. 비에 젖어 쭈글쭈글하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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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벌써 5년 전 일이다. 까마득하다. 내가 어떻게 그런 모험을 했는지 신기하다.
그 이후론 그런 고행을 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많이 여행을 다녔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일을 복기하면서 당시 찍은 사진과 글을 뒤적여보니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삶이 편해진 것인가 아니면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어버린 것인가. 아마도 둘 다인 것 같다.


태그:#자전거,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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