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진보연대 안지중 사무처장은 사회운동의 길을 25년간 걸어왔다.
 한국진보연대 안지중 사무처장은 사회운동의 길을 25년간 걸어왔다.
ⓒ 이원규

관련사진보기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희망 한 줌 찾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 우직한 이들이 조금씩 앞으로 옮겨 왔는지도 모를 터. 안지중(45) 한국진보연대 사무처장은 이 우직함의 상징적 인물이라 하겠다. 1987년 6월 항쟁의 세례를 받으며 학생운동을 시작한 이후 노동운동, 청년운동, 지역운동, 전선운동을 두루 거치면서 25년을 살아왔다.

지난 3월 20일 오전,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한국진보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운동을 하면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말로 기자를 주눅 들게 했다. 꾸준하고 집요한 성격 탓이란다.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FTA범국본) 공동집행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말 꺼져가던 한미FTA 반대의 촛불이 다시 타오르던 한가운데서 한결 같이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봤다. 3월 15일 한미FTA 발효를 앞두고 3월 1일부터 단식농성도 했다.

그의 생활신조는 딱 하나, '약속을 잘 지키자'다. 요즘 4·11 총선을 앞두고 후보들로부터 한미FTA 재협상 약속을 받아내느라 바쁘다는 안지중 사무처장은 인터뷰 내내 한미FTA를 입에 올렸다. 역시 그는 FTA범국본 공동집행위원장이었다.

밤새 FTA 농성장 지켜준 네티즌 잊지 못해

- 15일이나 단식을 했는데 몸은 괜찮나.
"단식은 회복식만 잘하면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한다. 회복식 식단대로 잘 지켜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직은 먹는 양이 적어서 늘 배고프다. 배가 고파서 요즘은 잠도 일찍 잔다."

그는 생두부 한모를 앞에 두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간식이라고. 1/4모가 정량이라고 했지만 금세 1모가 사라졌다.

- 지난 3월 1일부터의 단식농성에 대해 어차피 발효가 될 텐데 단식을 해 하냐는 의견도 있었을 것 같다.
"한미FTA가 국내법상 마무리되는 절차가 3월 15일 발효였다. 그 발효를 앞두고 한국진보연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10월 5일 한국진보연대가 대한문 앞에 농성장을 차리고 박석운 공동대표가 24일 간의 단식농성에 들어갈 때만 해도 한미FTA가 국민적 투쟁을 일으킬 거라고 전혀 예상을 못했다. 다만 국회에서 한미FTA 비준안이 한나라당(현재의 새누리당)에 의해 통과될 게 뻔한데 민주당은 그걸 지켜볼 거고, 소수 정당인 통합진보당은 몸부림치면서 싸울 게 그려지는 조건에서 우리라도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에는 우리가 단식을 하든 말든 기성 언론은 신경을 안 썼다. 트위터 여론도 한미FTA 보다 제주 강정해군기지 문제가 더 뜨거웠다. 그런데 서울시장 선거를 이기면서 이제는 한미FTA라는 느낌이 왔다."

그의 느낌은 적중했다. 지난해 10월 28일 한미FTA 저지 총력결의대회 참가자들이 국회 담을 넘어 들어가면서 네티즌을 시작으로 여론이 한미FTA로 쏠렸다. 그는 "'99%의 분노로 국회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민주노총, 전농 등 대중단체 회원들이 그대로 실행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연일 촛불시위가 계속 됐다. 한겨울에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시위대는 '한미FTA 반대'를 외쳤다. 하지만 결국 지난해 11월 22일 한미FTA 비준안은 날치기 통과됐다.

마지막 발효만 남겨둔 상황에서 그는 "우리가 한미FTA를 제2의 한일합방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한미합방일이 3월 15일로 정해진 마당에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고 절박했던 심정을 전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만약 노동이나 청년학생 등 대중 동력이 살아있었다면 단식이라는 투쟁방식을 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현장이 어려우니까 상징적인 투쟁을 한 거죠."

- 상징적인 투쟁이긴 했지만 너무 관심을 못 받아서 아쉽지는 않았나.
"일단 관심을 못 받았다는 건 정정해야 겠다. 관심을 외면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기존 언론이. 심지어 <한겨레>나 <경향신문> 같은 진보적이라는 언론조차도 한미FTA 발효를 앞두고 별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에 참여연대가 회원 만 명한테 19대 국회에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물었을 때 한미FTA가 뽑혔다. 그만큼 바닥여론은 들끓었다는 뜻이다."

- 농성장으로 전해진 바닥여론은 어땠나.
"사실은 2012년 한미FTA 사업계획을 짤 때 큰 집회를 두 번 잡았었다. 설 명절과 2월 MB 취임4주년 즈음으로. 그런데 네티즌 등의 요구로 매주 주말에 집회를 여는 걸로 바꿨다. 그러면서 청계광장이 하나의 한미FTA 거점이 되었다. 많은 분들이 찾아오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꼭 들리는 명소가 됐다.

특히 토요일엔 천막을 쳤다. 내 기억으로는 청계광장에 천막을 친 게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도 당황해했다. 침탈까지 하려고 했다. 나는 경찰이 들어오면 다치고 사지가 들려나가더라도 이곳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네티즌 4명이 집에 가지 않고 남았다. 굉장히 추운날이었는데 2명씩 서로 꼭 부둥켜안고선 30분마다 돌아가면서 밤새 불침번을 섰다.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따뜻한 밤이었다."

- 혹자는 안 사무처장이 네티즌으로부터 인기가 많다고 얘기하더라.
"지난해 계속해서 한미FTA 집회 사회를 봤던 영향인 것 같다. 현재의 한미FTA 투쟁은 2008년 광우병 투쟁 때와 비슷하다. 2008년엔 광우병대책위, 다음 아고라와 네티즌, < PD수첩 >이 있었다. 이들이 한데 섞여서 폭발적인 대중투쟁을 벌였다면 지금은 FTA범국본, 트위터와 네티즌, 나꼼수가 있다. 다시 삼박자가 맞으면서 크게 일어난 거다.

근데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2008년엔 자발적인 시민이 먼저 뛰쳐나온 후에 광우병대책위가 꾸려졌다면, 지금은 FTA범국본이 이 싸움을 시작했다는 거다. 아무도 시선을 안 주던 시점에 대한문 앞에서 초라하게 농성을 시작해서 싸움을 여태껏 이끌어 온 데 대해 일정정도 신망을 얻은 것 같다. 또, 과감한 투쟁도 많이 했다. 국회 진격도 하고 광화문도 뚫고, 명동에서 물대포도 맞고. 이런 데서 진정성을 인정받지 않았나 싶다."

- 계속 한미FTA 집회 사회를 봐서 구속 등의 우려도 있었는데.
"약간 아이러니한데 진보연대에서는 구속이 확실하다고 송별식까지 했었다. 날치기 통과 이후 체포영장이 떨어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얼마 간 민주노총 건물 안에서 먹고 자면서 준수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멀쩡하다.

내가 보기에 경찰이 구속까지 못 시키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소환에 응했다는 거다. 구속을 하려면 증거인멸, 도주의 위험이 있어야 하는데 난 내가 한 건 다했다고 했고 도망갈 일도 없으니까 경찰쪽에서도 약간 난감해진 것 같다. 또 하나는 나를 법정 구속시킴으로써 한미FTA를 재점화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겠다는 경찰 수뇌부와 공안기관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것 같다. 물론 여전히 경찰의 소환장은 계속 날아오고 있다. MB정부 이후 벌금만 1300만 원 정도 나왔다."

- 구속을 예상하면서도 계속 집회 사회를 봤던 이유는?
"가정사인데, 직장이 한국진보연대이다 보니 구속 같은 건 항상 따라 다닌다. 근데 실은 최근까지는 진보연대에서 일하면서도 구속 등은 안 당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연로하셨고 치매도 앓으셨다. 그랬는데 2008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머니께 내가 장례식장에서 그랬단다. 이제 구속될 거라고. 어머님이 연로하신 게 조금 걱정은 되지만 같이 사는 친구도 운동을 하니까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가정에 대한 부담보다는 이 책임을 진보연대가 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컸다."

- 한미FTA 투쟁만 벌써 6년이다. 기억에 남는 세 장면을 꼽는다면.
"첫 번째는 택시노동자 허세욱 열사의 분신이다.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갑자기 누군가 분신했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아는 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 주위에 있지만 티내거나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던 분이다. 두 번째는 국회에서 비준안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기진맥진해 있었는데 진보연대 오종렬 상임고문이 홀로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농성에 들어가셨을 때다. 그때 열댓 명이 모여서 촛불을 밝혔다. 마지막은 지금이다. 작년 한미 FTA 투쟁으로 광화문으로 들어갔을 때. 여론이 돌아서서 뿌듯하다."

"강정의 구럼비와 한미FTA는 같다"

안지중 사무처장은 "한미합방일이 3월 15일로 정해진 마당에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면서 3월 1일부터 한미FTA발효일인 15일까지 단식농성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안지중 사무처장은 "한미합방일이 3월 15일로 정해진 마당에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면서 3월 1일부터 한미FTA발효일인 15일까지 단식농성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 SNS 페이스북에 보니 제주 강정의 구럼비와 한미 FTA는 같다고 썼더라. 두 사안은 어떤 공통점이 있나.
"하나는 MB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행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점은, 지금은 민주당이 점수를 많이 까먹긴 했지만 총선 이후 여소야대를 점치는 지점에서 한미FTA와 강정해군기지는 총선 이후에 백지화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이다. 한미FTA는 경제적인 미국의 속박을 예정하는 거고 강정해군기지는 미국에 의한 동북아 패권전략의 일환이니까."

- 4․11총선을 앞두고 있다. 야권단일후보 선출과정을 보면서 고민과 기대도 있을 것 같다.
"여태껏 이렇게 선거를 기다리게 하는 대통령과 정당은 없었던 것 같다. 많은 국민이 이번 총선을 기다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명박과 새누리당 심판. 국민은 그 대안으로 야권이 연대하라고, 더 나아가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 민주통합당이 제1당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까지 하고 있는 거다.

국민의 바람은 이러한데 민주당이 부실한 공천 등 그 바람에 제대로 부응 못하고 있다. 쓴소리를 하자면 각 당이 좀 편협한 것 같다. 자당 이익 우선으로만 생각하고. 이번 야권연대도 시민사회단체까지 묶어서 했으면 국민의 시선을 더 사로잡고 감동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많이 아쉽다. 부족함은 있지만 야권연대가 된 건 환영할 일이다. 이제 정권 심판 쟁점을 재점화해서 판세를 좀더 뒤집어야 할 거라고 본다. 분명 야권 바람이 불거다."

- 스스로 정치를 해야 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올 수도 있을 위치인데.
"주변에서 농담 삼아 '한미FTA로 떴는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야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스스로도 그동안 밖에서 많이 싸웠으니까 의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한미FTA 문제를 푸는데 한몫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피선거권이 없다. 정봉주 전 의원과 마찬가지로 BBK건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도 기회만 있다면 선거법 위반이 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주요 이슈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할 생각이어서 정치하고는 계속 멀어지고 있다."

배후세력 진보연대? MB시대에 보수의 공격은 칭찬

안지중 사무처장은 25년간 흔들리지 않고 운동을 해온 힘으로 "옳은 일을 하면 국민은 언젠가 온다는 종교에 가까운 신념"을 들었다.
 안지중 사무처장은 25년간 흔들리지 않고 운동을 해온 힘으로 "옳은 일을 하면 국민은 언젠가 온다는 종교에 가까운 신념"을 들었다.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 총선을 앞두고 진보연대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은?
"진보연대는 이번 총선에서 쟁점이 되는 이슈를 부각시킬 계획이다. 무엇보다도 계급투표가 중요하다. 노동자․농민․청년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걸맞은 선택을 하길 기대한다. 그건 각 정당의 공약이나 정책으로 반영될 거다. 반값등록금, 비정규직 문제, 쌀값이나 식량주권 문제, FTA 등. 이슈파이팅을 잘해서 진보정당이 크는데 밑거름이 되려고 한다."

- 큰 이슈가 뜰 때마다 보수세력은 진보연대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한다.
"그런 이유로 2008년 광우병 투쟁 당시엔 진보연대 간부 8명이 구속을 되기도 했다. 그런데 진보연대는 배후인 적이 없다. 늘 전면에 나섰으니까. 배후라는 말은 틀렸고, 진보연대가 중심이라는 말에는 수긍한다. 한국진보연대가 한국의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당연한 책무를 하고 있을 뿐이다. 또 한 가지. 이명박 시대에 보수진영으로부터의 공격은  칭찬 아닌가. 나는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 사회운동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
"나는 87학번이다. 대학에 가서 운동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87년 6월 항쟁과 7, 8, 9 노동자 대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자연스럽게 함께 했다. 옳은 일이니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고, 기라성 같은 동기, 선배, 후배들이 떠나가는 걸 보면서 나는 이 길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1990년 학내문제로 투쟁을 하다가 짧게 구속된 적이 한 번 있다. 그때가 인생의 전환기였다고 그는 말했다. "구치소에 있는데 화상을 입은 노동자 한 분이 들어왔어요. 프레스 공장에 다니는 분이었는데 노동조합을 만들다가 동료가 노조를 지키기 위해 분신을 한 거예요. 그분이 몸으로 덮어서 불을 끄느라 온몸에 화상을 입었는데 죄명이 자살방조죄였어요. 감방에 들어와서도 그분은 말을 내세우기보다는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주셨죠.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의지가 뭔지 확 와 닿았어요. 그때 평생 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 거의 25년을 운동을 한 건데 흔들린 적은 없는지.
"잘난 척 같은데 특별히 흔들린 적은 없다. 꾸준하고 집요한 성격이어서 중간에 잠깐 도망가거나 휴가를 얻은 적도 없다. 그렇게 제 길을 걸어오다 보니 어느 날 한국진보연대라는 한국진보운동 대표단체의 사무처장을, 현재 최대 이슈인 FTA범국본의 공동집행위원장이란 중책도 맡고 있었다."

- 그렇게 꾸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궁금하다.
"우선 국민은 우리한테 오게 돼 있다는 종교적 신념 같은 게 있다. 옳은 일을 하면 온다는 신념. 그 신념이 무너질만하면 진짜 국민의 뜻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87년 6월이 그랬고, 91년 열사정국, 2008년 광우병 투쟁 때도 그랬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처음엔 상당히 위축되고 위기감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또 터져 나왔다.

또 경찰이 항상 통제하는 집회와 달리 지금 SNS상은 거의 진보로 도배되는 상황이니 많이 오지 않았나. 처음에 우리가 무상의료, 무상급식을 얘기하면 빨갱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각 정당이 얘기할 정도로 보편화된 걸 봐도 점차 세상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거다. 다만 우리가 책임지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은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진보연대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진보연대가 하면 늘 국민 60% 이상의 지지를 받는다"고 자랑했다. 비정규직 철폐,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한미 FTA 등. 그 속에서 국민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서는지를 늘 피부로 느끼고 살아온 게다.

"저는 한미 FTA는 난공불락과 싸웠다고 생각해요. 도저히 함락할 수 없는 성을 뛰어넘은 거죠. 그중 하나가 미국이에요. 한국사회, 특히 분단국가에서 미국에 맞선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거니까. 또 하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FTA를 반대하는 미친 짓을 한 거죠. 두 미친 짓을 하면서 6년이나 지겹게 싸웠어요. 결국 국민이 우리한테 왔죠. 국민의 70%가 한미 FTA를 반대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역전을 만들어낸 겁니다."

바람도 덧붙였다. "저는 전선에서 매일 데모하고 추운 데서 굶고 있지만, 진보진영의 활동가들이 많이 공직자가 돼서 세상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국민은 우리한테 오게 돼 있다"

"총선 후에도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야권연대를 단순히 정치공약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대선 결과가 좋지 않을 거다. 오히려 총선 이후 야권이 커지고 그 지각변동 속에서 대중투쟁이 터져 나와야 한다고 본다."
 "총선 후에도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야권연대를 단순히 정치공약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대선 결과가 좋지 않을 거다. 오히려 총선 이후 야권이 커지고 그 지각변동 속에서 대중투쟁이 터져 나와야 한다고 본다."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 한미 FTA 관련 이후 활동은 어떻게 이어나갈 건가.
"총선까지는 대중운동으로 촛불을 질기게, 끈질기게 펴 나갈 계획이다. 총선 관련해서는 심판운동과 약속운동을 하고 있다. 한미FTA 비준에 앞장섰던 심판대상자를 밝히고, 후보자들로부터 19대 국회에서 한미FTA 재협상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거다. 최대 쟁점은 한미 FTA 한국협상대표였던 김종훈이 후보로 나온 강남을이 될 거다. 그와 관련해서는 따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더라도 민주당 내에도 온도차가 있어서 한미 FTA 폐기까지는 힘들 것 같다는 전망이 많다.
"한미FTA 관련 야권의 정책협약 내용은 MB때의 재협상은 문제가 있다는 수준이었다. 민주당 당론도 재협상이어서 당장 폐기로 가긴 어렵더라도 국민의 여론상 재협상의 제스쳐는 취할 수밖에 없을 거다. 다들 아는 얘기지만 민주당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벌여놓은 일을 되돌리기는 만만찮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FTA 범국본이나 한국진보연대, 통합진보당의 역할이 크다. 여전히 대중투쟁을 만들지 않은 이상 어렵다고 본다."

- 4․11 이후 야권이 커지더라도 대중투쟁을 벌여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가능했던 건 국민참여경선(오픈 프라이머리)이라는 정치개혁 속에서의 시민참여, 노사모의 역할도 있었지만 사실은 효순․미선 투쟁 과정에서 터져나왔던 '미국에도 당당한 대통령'이라는 국민의 요구와도 맞물려 상승효과를 냈던 거다. 이번 총선 후에도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야권연대를 단순히 정치공약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대선 결과가 좋지 않을 거다.

오히려 총선 이후 야권이 커진다면 그 지각변동 속에서 대중투쟁이 터져 나와야 한다고 본다.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 대학등록금 등 이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 안고 있는 부문들이 나서고, 그 힘이 정권교체로 이어져야만 진짜배기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 제대로 쉰 적도 없다고 했는데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하고 싶은 일은?
"농부가 땅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내가 돌아갈 곳은 노동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중앙에서 때가 많이 묻었으니까 때를 땀으로 씻어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기회가 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만약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안지중 사무처장은 인터뷰 중 습관에 대해 말했다.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는데 인간의 뇌가 습관화되면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지 않는다고 해요. 책 읽는 게 습관화된 사람은 뇌를 많이 안 써도 되는데 습관이 안 된 사람은 뇌를 많이 쓰니까 힘들어서 책을 보는 중간중간 책을 손에서 놓게 된다는 겁니다. 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거나 회의 등 약속에 안 늦는 건 습관화가 된 것 같아요."

그가 노동일을 하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뱄듯이 초등학교 4학년인 그의 아들 역시 그를 닮아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그가 단식농성을 하느라 집에 들어가지 못한 동안 그의 아들은 많이 우울해했단다.

"새학기를 맞아 적응이 안 된 가운데 같이 놀아주던 저까지 집에 안 들어오니까 스트레스가 쌓였었나 봐요. 안되겠다 싶어서 단식 중간에 아들을 불러 함께 청계천 주변을 거닐다가 동전을 던지면서 소원을 비는 곳에서 같이 동전을 던졌어요. 아들한테 '무슨 소원 빌었어?'라고 물으니까 '온 가족이 모여서 밥 먹고 싶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때 좀 마음이 아팠죠."

"회복식을 끝내면 온가족이 모여서 짜장면을 먹고 싶네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천상 운동가였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사회가 우울하니까 아들을 위해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더 크지 아들이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별로 없어요. 아, 평범했으면 좋겠어요. 평범함 그 자체가 좋잖아요. 평범해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 내가 빨리 그런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노동세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안지중, #한국진보연대, #한미FTA, #FTA범국본
댓글

노동자의 눈으로 본 세상, 그 속엔 새로운 미래가 담깁니다. 월간 <노동세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