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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이 개봉한 후 우리 사회에 '90년대' 열풍이 일었다. 삐삐가 유일한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드라마 <질투>와 <모래시계>가 감성을 자극하던 그 시절 말이다. 잠시 잊고 지내왔으나 언제라도 꺼내보면 아릿하게 저며오는 추억의 그때. 이 기사들과 함께 그때를 떠올려 보시라. 비단 설레게 했던 첫사랑 뿐 아니라 당시의 추억이 '뭉게뭉게' 피어오를테니까. [편집자말]
'내일 오전 5시까지 부대로 나오라고?'

1994년 6월 경으로 기억한다. 당시 군 복무 만기 한 달여를 남겨두고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칼출근-칼퇴근이 생명인 나 같은 방위병(단기사병)까지 그 이른 시간에 나오라고 한 걸 보니 상황이 심각한 듯했다.

중대장은 비상대기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방위병을 포함해 전 부대원이 집결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일찍 나오기 어려운 방위병은 전날 내무반에서 자라는 지침까지 나왔다.

당시는 심심치 않게 전쟁 이야기가 나돌던 때였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1994년 3월 19일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간 특사교환 실무회담 자리에서 북측 박영수 단장이 유엔 안보리 제재란 말에 반발하면서 "대화에는 대화, 전쟁에는 전쟁"이라며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은 이 발언을 대서특필했고 일부 서울시민들은 라면 등 생필품을 사재기하기도 했다. 이어 6월 13일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했다. 이른바 1차 핵위기였다. 내가 '다니던' 부대도 이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완전무장을 하고 얼굴엔 검은색 군용위장크림까지 바른 채 내무반에서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방위 중에서도 그 '유명한' 피엑스(PX) 방위였다. 일명 새우깡 방위라고도 하며 부대에서는 주로 '피돌이'라고 불렸다. 피돌이, 참 귀여운 애칭이다. 뭐 하는 일도 귀여웠다. 새우깡 집어주고, 초코파이 집어주고…. 이렇듯 평소 과자만 팔다 보니 완전무장하고 앉아서 대기하는데 영 어색했다.

'전쟁 나면 난 뭐하지? 낮은 포복으로 전투병 옆에 가 새우깡을 건네야 하나? 전쟁터에서도 5시 정각이면 퇴근할까?'

뭐, 이런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중대장이 들어와서는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 '전방부대에서는 사병들에게 (전쟁에 대비해) 유서를 받고 있다' 등의 말을 했다. 그 외 몇 마디 더 한 것 같은데 이 두 마디만 기억이 난다. 그 말에 나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병들이 바짝 긴장했던 것도.

이날과 같은 비상대기는 이후로도 한 차례 더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고조될 대로 고조된 남북 간의 긴장이 일시에 해소가 되었으니 바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나오고 나서였다. 6월 28일 남북은 판문점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접촉을 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7월 25~27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발표했다. 다들 놀라면서 한편으론 안도했다. 전쟁 위기를 넘겼기 때문이다

이 발표 이후 부대 분위기는 예전으로 돌아갔고 나는 일주일 남짓 남은 제대만을 기다리며 룰루랄라 과자를 팔았다. 그나마 말년이라고 후임이 주로 팔고 나는 라디오 들으며 책만 읽었지만….

"소집해제 명 받았습니다"...그런데

"소집해제를 명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1994년 7월 9일 토요일 아침. 입대 동기 대여섯 명과 함께 대대장에게 소집해제 신고를 했다. 방위로 17개월간(1개월은 훈련소에서) 출퇴근한 정 들리 만무한 부대를 떠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현역 사병은 전역, 단기 사병은 소집해제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18개월간 소집됐던 거다. 거참!

누구는 제대하면 뒤도 안 돌아본다는데 난 자꾸 뒤돌아보았다. 그래도 17개월간 다닌 곳이었으니까. 내가 다닌 부대는 현역병 부대라 방위병은 극소수였다.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방위병은 서자 같은 존재였다는 말이다. 그 옛날 홍길동이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였던 것처럼.

부대를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을 때가 정오를 조금 넘겼을 무렵이었다. 맥주 한잔하자는 동기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가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뭐지' 하고 사람들 사이로 끼어든 나는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김일성 사망 호외를 낸 <조선일보>
 김일성 사망 호외를 낸 <조선일보>

속보! 김일성 사망

북한 <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 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심장혈관과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

이게 무슨 소리, 이제 겨우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죽다니!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렇게 무산 되는구나.

순간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탄식을 하며 사람들 사이에 끼어 뉴스를 보고 있는데 이어진 자막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전군비상경계령…휴가 군인 복귀'

휴가 군인 복귀? 난 휴가 군인이 아니라 소집해제 한 군인이니까 상관없겠지. 아니야, 그래도 소집해제 된 지 1시간도 채 안 됐는데 혹시….

지금에야 막 소집해제 한 피엑스 방위병을 다시 불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처구니없지만 그땐 혹시나 부대에서 다시 들어오라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정도로 언론보도가 호들갑스러웠다. 참나, 부대를 나서는 당일까지 긴장해야 하다니.

결국 그날 혹시나 부대에서 찾을까 봐 집에도 안 들어가고 나보다 한 달 앞서 제대한 절친한 친구를 불러내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다. 그날은 군 복무를 마친 날이었고, 김일성 사망이 발표된 날이었으며, 잘못해서 군에 다시 가지 않을까 반나절 전전긍긍한 날이었기에 그 모든 긴장을 내려놓기 위해 친구랑 부어라 마셔라 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 숙취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일어나 엄마에게 물었다.

"어제 부대에서 전화 안 왔어?"
"응."

에고, 이놈의 새가슴.

조문정국 그리고 잡혀간 지인들

1994년 여름, 그해 여름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더웠다. 툭 하면 불볕더위를 선보이는 요즘 여름도 그해 여름에겐 명함도 못 내밀 거다. 

7월 한 달간 대구가 최고기온 39.4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서울 부산 광주 강릉 등 7대 도시의 평균기온이 28.5도였다. 대구에서 35도를 넘긴 기간이 25일이었고 30도를 넘긴 기간도 광주 30일, 서울 24일이었다.

밤시간의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인 열대야를 보인 날도 광주 23일, 서울 20일, 대구 18일 등으로 한마디로 한반도는 밤낮없이 찜통이었다. 게다가 가뭄 피해도 극심했다.

제대 후 빈둥거리던 나는 덥다는 핑계로 밤마다 '지하 150m 천연암반수로 만들'었다는 맥주를 들이켰다. 당시 이 맥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덕분에 제조 회사가 시장점유율 만년 2위에서 1위로 도약하고 결국에는 회사 이름까지 맥주 이름으로 바꿨다.

집에만 있기도 답답해 난 후배 둘과 학교 선후배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 중 한 명이 어느 산골마을에서 방위로 근무하는 선배였다. 시골 면사무소 방위였던 형도 피엑스 방위였던 나 못지않게 '남다른'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뭐, 매일 퇴근길에 시골길을 걸으며 캔맥주 하나씩 마신다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속세를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던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떠올리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형의 그 '안빈낙도'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형을 만나고 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돼 형은 헌병에 붙잡혀 군 구치소에 수감됐다. 반국가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일성 사망 후 남북 간에는 조문 문제를 놓고 날 선 공방이 오갔다. 국내에서 민주당의 이부영 의원을 비롯해 일부 야당 정치인이 조문에 대한 정부의 의견을 묻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북한에 조문단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김일성을 "한국전을 일으킨 전범" "독재자" 등으로 비난하며 조문 관련 주장을 반국가행위로 몰아세우는 분위가가 조성됐다.

이에 맞춰 정부는 조문 행위를 불법으로 엄단하겠다고 했고 검찰은 애도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대학생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이영덕 국무총리는 국무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이 한국전의 책임자"라며 공식 정부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유고가 발생하자 비상력을 발동하며 상대측을 불질해오던 김영삼일당이 지나간 역사를 심히 왜곡했다"며 "무모한 발언들은 고인에 대한 중상모략일 뿐 아니라 청와대의 공식 전쟁선포"라며 반발했다.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다룬 1994년 7월 21일자 <한겨레신문> '목요 초대 그림판'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다룬 1994년 7월 21일자 <한겨레신문> '목요 초대 그림판'
남북 간 공방으로 확산한 조문 논란은 국내에서 또다른 양상으로 번졌다. 박홍 서강대 총장이 7월 18일 청와대 주최 대학총장 오찬모임에서 "주사파 뒤에 사노맹이 있고, 그 뒤에 북한의 사노청과 김정일이 있다"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한국판 매카시즘 광풍이 불기 시작한 것. 선배를 비롯해 지인들 몇몇은 이 와중에 잡혀갔다.

조문 논란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한 정부는 그후로도 학원·노동·종교 시설 가리지 않고 경찰을 투입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겨레신문>은 7월 25일자 '신 공안정국'이란 기사에서 "사회구성원들은 불과 2주남짓 만에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일치된 기대가 극심한 이념적 대립으로 바뀌는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고 썼다.

기사 말마따나 남과 북은 전쟁 위기까지 갔다가 정상회담을 하자며 화해 분위기로 급변하더니 다시 한쪽 당사자의 죽음으로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이.

씻어도 씻어도 땀이 계속 흘러내렸던 1994년 여름, 한반도는 그야말로 가마솥이었다. 그 찜통 안에서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졌다. 문제는 그 드라마가 18년 전 방영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매일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까.


태그:#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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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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