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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Edinburgh)에 도착한 날, 우리는 기차역을 빠져 나오며 에딘버러의 풍광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과 언덕 위의 고성, 다양한 모뉴먼트들은 우리가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고도에 드디어 도착했음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강렬한 도시, 빛 바랜 회색빛 건축물들이 이토록 매력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2층버스 2층에서 내려다 본 에딘버러 시가지가 장관이다.
▲ 2층버스 타기 2층버스 2층에서 내려다 본 에딘버러 시가지가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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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전부터 수많은 마차들이 지났을 돌길 위로 2층 버스와 승용차들이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에딘버러의 숙소에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명물 2층 버스인 더블 데커(Double Decker)를 타고 2층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2층에서 내려다본 에딘버러는 바로 눈 앞에 잡힐 듯했다. 버스 앞으로 회색빛 첨탑의 건물들이 스치듯이 지나간다. 좌측통행인 이 2층 버스는 코너를 돌 때마다 옆 버스와 부딪힐 듯 길게 길을 돌았다. 우리는 몸이 급하게 옆으로 쏠리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마일'이 유래된 유서 깊은 거리이다.
▲ 로열마일 '마일'이 유래된 유서 깊은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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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올드 타운의 중심, 로열마일(The Royal Mile)을 찾아가고 있었다. 로열마일은 서양에서 아직도 많이 사용되는 거리 단위인 마일(Mile)이 유래된 곳이다. 즉 로열마일의 총 길이가 1마일이고 1마일이 1.6km이니 로열마일은 총거리가 1.6km인 거리이다. 나는 1.6km 정도는 충분히 걸으면서 답사할 만한 거리라고 생각하고 로열마일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로열 마일은 이름 그대로 왕족들만이 사용하던 길이었다.
▲ 로열마일 표지판 로열 마일은 이름 그대로 왕족들만이 사용하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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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로열마일 안에서는 차가 다니지 않는다. 많은 여행자들이 로열마일 양편의 예쁜 가게들을 보면서 여유 있게 걷고 있다. 로열 마일은 지구상 다른 곳에는 없을 아름다운 거리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길 이름을 갖고 있는 로열마일은 이름대로 예전에 왕과 왕족만이 사용하던 왕가 전용의 길이었다.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 살던 왕이 로열마일 동쪽 끝에 위치한 홀리루드하우스 궁전(Palace of Holyroodhouse)에 왕비를 보러 갈 때 사용하던 길이었다. 왕이 왕비와 한 성에서 같이 살면 될 것 같은데 아무튼 왕은 왕비를 만나러 이 길을 다녔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그때 당시 평민들은 밟고 지나가지 못하였다. 평민들은 자기가 사는 집을 눈 앞에 두고도 로열 마일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평민들은 서울 종로의 피맛골처럼 큰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서 자기 집에 가야 했다. 당시 에딘버러 시민들은 큰 길 옆에 작은 길을 만들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로열 마일 아래로 지하통로를 뚫고 다녔다.

"신영아! 얼마 전에 뮤지컬, '지킬 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 봤잖아. 그 배경이 되는 곳이 이 에딘버러 로열마일의 지하 통로야. 어때? 이 도시의 거무튀튀한 분위기 속에서 하이드가 나올 것 같지 않니?"

신영이가 내 말에 웃으며 동조했다.

"진짜!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나올 것 같아. 오래된 건물이 마치 뮤지컬 배경 같아."

오래된 이 길. 소설과 뮤지컬의 배경 속을 나는 걷고 있었다. 박석이 깊게 깔린 로열마일의 돌길 옆으로는 체크무늬가 아름다운 킬트(Kilt) 가게, 따뜻함이 느껴지는 울 가게, 영국다운 펍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가게들은 모두 석조 건물의 웅장함에 역사적 체취까지 더하고 있다.

로열마일에서는 매일 거리의 공연가들이 자유롭게 공연한다.
▲ 로열마일 공연 로열마일에서는 매일 거리의 공연가들이 자유롭게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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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로열 마일에서는 사시사철 거리 공연가의 무대가 펼쳐진다. 우리는 로열 마일을 얼마 걷지 않아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리 공연을 만난 신영이가 키득거리며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영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를 만나면 상황이 끝나기 전까지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계획했던 에딘버러의 여행 순서를 전면 수정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조끼와 검은 바지를 입은 거리의 공연가가 수십 명의 관광객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머리와 수염은 금발보다 더 짙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고, 얼굴은 영화배우 멜 깁슨(Mel Gibson)을 닮았다. 그의 앞에는 머리에 주황색 가발을 눌러 쓴 한 어린이가 바람잡이로 불려나와 있었다.

그는 어린이와 같이 온 아버지와 농담도 주고 받으면서 주변의 관광객들을 웃긴다. 순박하고 촌스러워 보이는 아저씨를 끌고 나오더니 엉덩이를 흔드는 동작을 시키며 사람들을 웃긴다. 나는 그의 행동과 알아듣는 영어 단어를 따라 대충 웃었다.

각국의 많은 여행자들이 거리에서 배꼽을 잡고 공연을 즐기고 있다.
▲ 풍선 먹기 각국의 많은 여행자들이 거리에서 배꼽을 잡고 공연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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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리 공연장 바로 옆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자 공연 도중 얼른 달려가서 음악을 꺼버린다. 그는 갑자기 손에 든 화염을 불꽃놀이 하듯이 돌린다. 길다란 풍선을 빵빵하게 불더니 그 긴 풍선을 꾸역꾸역 입 속으로 모두 밀어 넣는다. 온전한 풍선이 사람 입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곳에 모인 구경꾼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다. 이 친구는 공연도 재밌지만 끝날 줄 모르는 수다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다.

거리 공연은 끝날 줄 몰랐고 신영이는 거리 공연이 끝날 때까지라도 있을 기세였다. 한참 거리공연을 보던 나는 신영이의 발길을 재촉했다. 로열 마일에서 발걸음이 지체되면서 에딘버러 성 답사는 뒤로 미루고 주변의 하이 스트리트(High St)에서 '크램 쉘(Clam Shell)'이라는 작은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로열마일에서 저럼한 가격에 영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 크램 쉘 로열마일에서 저럼한 가격에 영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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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다양하지 않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그래도 대표적인 음식을 꼽으라고 하면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다. 음식 이름을 영어로 적어놓아서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우리말로 쉽게 풀어쓰면 반죽한 생선튀김에 채썬 감자튀김을 곁들인 식사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영국에서 과거부터 많이 만들어먹던 일종의 패스트푸드다.

영국 전통의 대표적 요리지만 맛은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
▲ 피시 앤 칩스 영국 전통의 대표적 요리지만 맛은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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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램 쉘은 에딘버러에서도 피시 앤 칩스의 양이 많고 값도 저렴해서 외국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다. 피시 앤 칩스가 단 6파운드이니 영국 물가를 생각하면 정말 싼 가격이다. 이 가게에서 팔리는 다양한 다른 음식들은 피시 앤 칩스보다 가격이 더 싸다. 나는 이곳에서 가족의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로 하고 피시 앤 칩스, 튀긴 스프링 롤과 함께 커다란 파이도 한 개 주문했다.

조리가 워낙 간단해서인지 피시 앤 칩스가 바로 나왔다. 살만 발라낸 커다란 생선살이 통째로 튀겨져 작고 흰 스티로폴 그릇에 담겨있다. 감자 튀김도 한 가득 담아주는데 감자튀김만 먹어도 1명이 배가 부를 수 있는 양이다. 피시 앤 칩스 한 개만 주문했는데도 2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왔다.

작은 식당의 명성과는 달리 맛은 충격적으로 평범하다. 생선은 맛있다고 들었지만 냉정하게 평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으며 그저 기름에 튀기기만 한 듯한 맛이다. 영국 음식이 맛없기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이 식당 선택은 실패한 듯하다. 아내와 신영이도 입만 대보고 먹지 않으니 엄청난 양의 음식을 내가 먹는 데까지 먹었다.

아시아 국가들에서 싸 먹는 밀 전병을 닮은 스프링 롤과 파이도 너무 두껍게 튀겨져서 맛만 보고 말았다. 웬만한 음식은 다 먹어치우는 나도 억지로 먹기가 힘들다. 나는 맛 없는 영국 전통의 맛을 드디어 직접 체험하고야 말았다.

골목길 끝에 스코틀랜드 작가 박물관이 보인다.
▲ 레이디 스테어스 클로즈 골목길 끝에 스코틀랜드 작가 박물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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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튀김기름이 가득 묻은 입가를 닦고 가족의 로열마일 답사를 계속 이어갔다. 에딘버러 로열마일의 건물과 건물 사이, 좁고 긴 골목길인 클로즈(close)가 곳곳에 이어지고 있다.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로열마일의 대로에서 연결되는 남북방향의 클로즈는 수도 없이 많다. 이 골목길들은 과거 에딘버러의 서민들이 살았던 저지대의 아래 동네로 이어진다. 마치 숨어 있듯이 자리한 클로즈는 서민들의 삶과 죽음이 이어졌던 곳이다.

클로즈에는 '메리 킹스 클로즈(Mary King's Close)'와 같이 특별하게 알려진 것도 있고 지금 내가 걸으면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운치 있는 클로즈들도 많다. 이 클로즈는 왕이 다니는 로열마일을 피해 서민들이 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나는 이름 난 여행지 답사를 잠시 미루고 좁은 골목길의 벽을 만지며 한가하게 클로즈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클로즈의 벽면에 등을 잠시 기대고 아내, 신영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열마일의 론 마켓(Lawn market)에서 북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레이디 스테어스 클로즈(Lady Stair's Close)'가 있어서 나의 답사코스를 살짝 벗어나 보았다. 스테어 백작 부인의 소유였던 17세기 후반의 집, '레이디 스테어스 하우스(Lady Stair's House)'가 나타났다.

이 집의 내부는 현재 스코틀랜드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보아야 할 스코틀랜드 작가 박물관(Scottish Writers' Museum)으로 되어 있다.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작가 3명의 유품과 책으로 만든 조각상이 인상적인데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만이다.

세상의 끝을 볼 수 있는 골목길이다.
▲ 월드스 엔드 클로즈 세상의 끝을 볼 수 있는 골목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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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마일의 어린이 박물관 앞을 지나다 보니 기가 막힌 이름의 클로즈가 나온다. '월드스 엔드 클로즈(World's End Close)'! 여기 이 골목길을 들어서면 세계의 끝이 나온다는 것인가? 클로즈 벽면의 두루마리 그림을 보니 16세기 에딘버러 시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는 설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클로즈의 건물 기단부와 세인트 메리 거리(St. Mary's street) 아래쪽에 지금도 성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클로즈의 돌길에 기록된 황동판 표지가 성벽 자취의 정확한 위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성문이 이 클로즈의 대중적인 술집 펍(pub)의 외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에딘버러 시민들에게 성벽 밖의 시 외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을 당시에 이곳은 세상 끝, '월드스 엔드(World's End)'였던 것이다.

세상의 끝으로 인도하는 골목길. 나는 피맛골을 지나 세상의 끝에 도착해 있었다. 과거 에딘버러 시민들은 에딘버러 성과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에서 호화롭게 살던 왕족을 피해 로열마일의 골목길과 지하, 그리고 성 밖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좁고 막다른 골목의 석재 건물들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낀 채로 찌푸려 있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로열마일의 골목길을 한가하게 계속 산책했다.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영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로열 마일, #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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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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