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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씨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콜트악기 천막 농성장의 모습.
 이동호씨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콜트악기 천막 농성장의 모습.
ⓒ 부평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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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날씨가 매우 추웠다. 공장 작업장에 들어간 그는 아세톤 한 통을 들고 나왔다. 오른손으로 아세톤을 몸에 붓던 그는 미처 다 붓지 못하고, 아세톤 통을 놓치고 말았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의 부싯돌을 튕기는 순간, 오른손에 불이 붙으며 그의 옷과 몸이 활활 타올랐다. 순식간이었다. 그는 목 놓아 외쳤다.

"부당해고 철회하라!"

이를 본 조합원이 천막농성장에서 뛰쳐나왔다. 공장 문을 지키던 수위도 물을 들고 뛰어 왔다. 그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몸이 뜨겁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내 희생으로 부당한 회사의 정리해고 문제가 제발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돈만 아는 세상, 더러워서 더는 못 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날은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314일째 되던 날이었다.

다행히 그의 몸에 붙어있던 불은 꺼지고, 그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응급처치만 하고 화상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서울의 한 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살았다. 천막농성장에서 매일 밤을 지새우느라 옷을 두껍게 껴입었던 게, 그를 살렸다. 하지만 얼굴에는 2도 화상, 오른손에는 3도 화상을 입었다.

의사는 오른손을 절단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다행히 오른손의 피부조직이 살아났다. 세 번의 이식수술과 2년여의 치료를 이겨낸 결과였다. 치료가 끝날 무렵, 다시 농성장을 찾아야했다. 정리해고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1915일째 되는 오늘(2012년 4월 30일)도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화상을 입기 전, 손가락도 잃었다

'콜트 빨간 모자' 이동호씨가 1912일 째를 맞이한 천막농성장 앞에 서있다.
 '콜트 빨간 모자' 이동호씨가 1912일 째를 맞이한 천막농성장 앞에 서있다.
ⓒ 장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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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1일 밤 11시, 인천 부평구 갈산1동 콜트악기 부평공장 안 천막농성장 앞에서 부당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분신했던 이동호(49·인천 계양구 작전동)씨는 왼손 검지와 중지가 다른 사람보다 짧다. 콜트악기는 그의 몸에 화상을 남기기 전 손가락도 빼앗아 갔다.

1996년 3월 12일 콜트악기에 입사해 전기 톱날로 기타 몸체와 목 부분을 다듬는 작업을 하던 그는,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오른손 약지를 잘릴 뻔한 사고를 당했다.

이 일로 산업재해 처리를 했는데, 그때부터 회사는 회사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공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산재로 처리해, 회사에 벌점이나 벌금을 받게 하는 피해를 줬다는 이유다.

이 사건 후, 그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반장도 태도가 달라져, 일을 훨씬 심하게 시켰다. 제대로 된 기술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넘게 보내고 1997년 7월 30일, 그의 왼손 검지와 중지를 절단시키는 사고가 발생했다. 처음해 보는 작업에 투입됐던 그에게 아무도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전에 하던 작업과 다름없으니, 그냥 하면 된다는 말만 들었다.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다. 순식간에 전기 톱날에 장갑이 말려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손을 뺐지만, 이미 손가락 두 개가 잘린 상태였다. 이 일로 또 9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당시 콜트악기 공장 노동자들은 근골격계질환을 많이 앓고 있었고, 손가락 절단 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안전장치를 설치하라고 노동부에서 수차례 얘기했지만, 안전장치를 달 수 없는 기계가 대부분이었다. 작업하다 보면 손이 톱날 바로 앞 0.5㎜까지 접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회사에서는 작업 시 장갑을 끼지 말라고 하지만, 장갑을 끼지 않고 목재를 깎으면 튀어나오는 가시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완치되고 나서 다시 일했지만, 다쳤던 손가락을 또 다치는 사고가 생겼다. 다행히 이번에는 날이 손가락을 자르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회사에서는 또 공상 처리하자고 했지만, 그는 산재 처리를 했다. 또 회사에 찍혔다. 이미 찍혀 왔고, 회사에서 일하다 다치면 산재 처리를 당연히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회사 측에 의해 더이상 기타를 가공하는 작업은 못하고, 도장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입사하고 4년 만에 산재 사고를 세 번이나 당하고, 자리도 옮기게 된 것이다.

2007년 4월 12일, 회사의 일방적 통보

그는 잔업이나 특근이 있으면 거의 빠지지 않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개근상을 빼놓지 않았던 그는 회사 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입사한 지 11년 1개월이 되던 2007년 4월 12일 해고됐다. 동료 37명이 그와 함께 해고됐다. 회사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해고 사유는 노동조합 활동으로 허락 없이 외출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노조 대의원이었다. 회사 측에 따지며 해고 기준을 이야기해달라고 했지만,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해고자 명단에는 노조 활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 정년퇴직을 얼마 안 남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조퇴를 많이 하거나 불성실한 사람이 있었지만, 회사 측에 아부를 많이 하던 사람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가 노조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군 복무를 의무경찰로 마쳤기 때문이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던 병무청에서 의경을 모집한다는 전단을 보고 지원했다. 그는 성북경찰서로 배치됐다. 대학에서 집회하는 학생을 진압하는 부대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유치장에 잡혀 온 대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나라 노동 역사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됐다.

대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참에게 걸려 음식 찌꺼기 통에 머리를 처박히고 두들겨 맞기도 했고, 명치를 발로 차여 기절하는 일도 있었다. 고집이 센 그는 잡혀 오는 대학생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기억으로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 노조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대법원의 엇갈린 판결... 계속되는 싸움
   
이동호씨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회사는 그에게 2번째 해고 예고를 통지했다.
 이동호씨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회사는 그에게 2번째 해고 예고를 통지했다.
ⓒ 장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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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노조는 일방적인 정리해고에 대한 교섭을 회사에 요청했으나,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노조는 같은 해 2월 1일 공장 마당에 천막을 치고,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싸움이 어느덧 1915일이 됐다. 지난 2월 23일에는 대법원이 당시 해고가 부당해고라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같은 날 자회사인 콜텍 노동자들이 낸 해고 무효 소송에 대해, 대법원은 회사의 손을 들어주는 엇갈린 판결을 했다.

대법원 판결 현장에 있었던 그는 승소 판결로 눈물을 흘렸지만, 오후 콜텍의 패소 판결로 그 눈물은 몇 시간 만에 말라버렸다. 콜텍 노동자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고, 콜트악기 노동자의 싸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는 민사 소송이 아직 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다음 달 4일 오전 10시, 세 번째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또한, 민사 소송 1심에서 승리하고 난 후 부평공장 건물을 압류했으나, 회사가 공탁금을 걸어 압류가 풀렸고, 다른 업체가 건물을 사 버렸다. 이 업체 관계자가 "지난 23일 리모델링을 하겠다"며 공사 인부들을 데려왔다. 조합원들이 막아 그냥 떠났지만, "다음날 업체 관계자가 찾아와 하루 일을 못하면 4000만 원의 손해가 생긴다"며 그 비용을 가압류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갔다.

노조는 문제 해결을 위해 최근 지역 국회의원과 시의원 등으로부터 탄원서를 받고 있다. 1915일 동안 싸워왔지만,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콜트악기 때문에 손가락 두 개가 잘리고, 몸에 화상까지 입은 그이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박영호 콜트악기 사장이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여, 해고자를 복직시키고 공장을 정상화시킨다면 다시 일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원래 빨간색을 좋아했는데, 콜트악기 박영호 사장이 빨간색을 싫어한다고 해서 더 좋아한다. 그의 닉네임도 '콜트 빨간 모자'다. 이 닉네임으로 부평공장 농성장에 합류해, 투쟁 중인 콜트악기와 콜텍 노동자들의 활동을 카메라에 담아 전국민주노동조합 총연맹 인천지역본부 홈페이지 등에 올리고 있다.

콜트악기를 생산하는 콜트악기 부평공장과 콜텍 대전공장의 노동자는 정리해고되고, 공장은 폐쇄됐다. 이들이 일하던 공장의 라인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세워진 공장으로 옮겨졌다. 지금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악기로 1000억 원대 자산가인 박영호 사장은 여전히 돈을 벌고 있다.

한편, 기사를 작성하던 30일 그에게 전화가 왔다. 콜트악기가 사업 폐지와 경영상 사정의 이유를 들어, 올해 5월 31일 자로 해고를 하겠다는 예고장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대법원이 그를 복직하라고 판결하자, 회사는 또 해고를 통보한 것이다. 그는 같은 회사에서 2번의 해고를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http://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콜트악기, #이동호, #콜텍, #분신, #천막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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