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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15 화
* 뉴욕(New York) JKF공항 - 맨해튼(Manhattan)

JFK 공항은 우중충했다. 약하던 빗줄기는 어느덧 제법 굵어졌고 사람들은 비를 피해 재빠르게 발들을 움직였다. 뉴욕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는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그들이 오히려 여유있어 보였다. 'Yellow cap'이라 불리는 뉴욕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미드타운 맨해튼(midtown manhattan) 지역으로 향했다.

베라자노 해협을 통해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허드슨 강(Hudson river) 어귀에 자리 잡은 섬. 기사에게 한 두 마디 붙여본다는 게 은근히 변죽이 맞아 동행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4,50대로 보이는 흑인 운전기사는 뉴욕시의 택시기사로 살아가는데 여러 심경을 토로했다.

뉴욕은 비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에 잠겨 있다.
▲ 뉴욕 JFK 공항 뉴욕은 비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에 잠겨 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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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회사에서 하루 빌리면 160달러 정도 내거든. 하루에 주간 교대로 12시간씩 일하는데 차고(Garage)에 반납하면서 정비 비용, 기름 값 정산하면 200달러가 넘어."

한국의 회사 택시처럼 사납금의 개념이 있는가 했다. 한국은 일정기간 이상 무사고면 개인 택시 자격을 주는데 미국은 독립하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물었다. 흑인 특유의 큰 눈망울을 굴리며 잠깐 나를 뒤돌아 본 그는 숫자를 말했다.

"750000달러."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을 재차 물어 확인했으나 'hundred'와 'thousand'가 한 단어씩 흘러 나왔다. 그리고는 앞 유리창 너머를 가리킨다. 빗줄기와 와이퍼가 어지러이 각축전을 벌이는 앞 유리창으로 보닛 위 검은 색 물체가 보였다. 택시 면허 표식이라는데 차내에 있는 미터기, 운전자 보호 펜스 등 택시와 관련 있는 모든 물품을 포함해서 그만한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택시 자격에 대해 치러야 할 비용이다. 

"차 값도 따로 내야 하는데 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

지금도 부담되는 금액이 해마다 오르는 추세라고 한다. 기사 말로는 택시 회사를 배후에서 쥐고 있는 마피아 같은 조직이 장난을 치는 거라는데,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는 뉴욕에서 가진 자의 끝 없는 욕심 또한 끝간데 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목적한 맨해튼의 호텔에 도착하니 택시 기사가 빈 방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며 친절을 보인다. 때마침 숙소를 나선 사람들이 택시를 타려 하자 멋적은 웃음과 함께 내게 손을 흔들고 그는 사라져 간다. 그가 개인 택시의 꿈을 이루길 빌어주며 나 또한 몸을 움직였다. 의식주 중 '주'를 해결하기 위해.

뉴욕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일까? 비성수기라 생각했는데 만석 중의 만석이다. 한국인 입장에서야 비성수기인 5월이겠지만  이때쯤 미국은 방학시즌이 시작된다는 걸 몰랐다. 가격대가 싼 Dormitory는 이번 주 내내 예약이 꽉 차 있다. 갈데 없으면 텐트에서 자면 된다며 호언장담한 여행길이지만 막상 눈 앞에 이런 상황이 닥치니 막막하다.

여 종업원이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빈방을 알아봐준다. 차이나 타운에 위치한 한 남루한 여관이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직접 예약은 물론 약도까지 뽑아주는 섬세함.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를 화끈한 옷차림만큼 성격 또한 그러한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결과적으로 택시를 연달아 탈 상황이 되었다. 근처에 있던 Van Taxi 내에서 기사가 식사중이었다. 처음에 "I'm not working"(일 안해)라며 단호하게 대답했던 그는 택시 없는 한적한 도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경적을 울리며 타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이티가 고향인 그는 먼저 이민 온 아버지를 따라 28년 전 미국에 왔다. 지금은 부인과 장모, 입양한 아이 하나를 포함해 세 명의 자녀, 이렇게 6명이 한데 살고 있다.

다리 하나만 건너 인근 뉴저지로 가도 부가가치세가 3% 인데 반해 7%씩 물리는 팍팍한 뉴욕을 피해 롱아일랜드에 거주한다. 그러나 택시기사 입장에서 승객이 많은 뉴욕은 활동무대 1순위로 꼽힌다고 한다. 말투에 묵직한 인생의 무게감이 실려 있는 그는 차이나 타운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English is business(영어는 영업이야)."

한국에 와보지 않아 그쪽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영향력 있는 언어에 능숙하면 그만큼 성공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 외국인도 가능하냐고? 자기를 보란다. 미국 토박이가 아닌데도 이 정도 영어를 쓰는 게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짐 탓에 잡아탄 택시들이 첫날부터 여럿 생각해 볼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2012. 5. 16 수
* 맨하튼 (Manhattan)

몸 하나 겨우 누일 만한 침대 하나. 그리고 딱 그 정도 크기의 여분의 공간. 중국인이 운영하는 호스텔에서 하룻밤은 마치 몇날 며칠 있던 것처럼 강한 인상을 남겨 준다. 배정받은 방은 5층이었는데 6층 건물임에도 엘리베이터가 없어 짐을 들고 오르내리느라 엄청난 체력이 요구됐다.

한시 바삐 자전거 구입이 급하다. 캠핑 장비는 이럴 때 쓰라고 갖고 온 게 아닌가. 캐리어 가방과 큰 포장박스에 그득한 여행 준비물들이 자전거에 실리지 못하고 무용지물 신세다. 어제 지나가던 라이더의 추천을 받아 들렀던 'Bicycle habitat'. 매장의 크기나 드나드는 고객의 숫자로 볼 때 맨해튼 내에서 나름 유명한 점포다. 생활 자전거나 로드 바이크(Road bike)는 종류가 다양한데 MTB는 빈약하다.

그러다 보니 내 조건에 부합하는 자전거 찾기가 어렵다. 500달러 이하의 가격에 26인치 바퀴, Large 사이즈의 프레임. 한국에서 가져온 프론트 랙이 부착되려면 브레이크 타입도 림 브레이크 방식이어야 한다. 알루미늄 소재는 마땅한 게 없다며 철 소재 자전거 하나를 매니저가 가져온다. 미국에서 웬만한 종류는 쉽게 구할거라 기대하고 왔는데 여기에서 철TB를 타게 될 줄이야.

혹시나 싶어 주변 가게에도 발품을 팔아 보았다. 오히려 기본 1000달러가 넘을뿐더러 MTB 자체는 취급하지도 않는다. 자전거가 딱히 레저용이라기보다는 생활 속에 밀착되어 있는 이들의 문화를 감안하면 도로가 잘 포장된 도시에서 굳이 험한 지형에 적합한 MTB를 취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구입 가격은 359달러. 프론트 랙(앞 짐받이)과 리어 랙(뒷 짐받이)를 설치하는데 각각 15불의 추가 공정비가 든다고 해서 과감히 사양했다. 한국에서 습득한 자전거 정비 기술 덕택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비용을 아끼는 보람찬 순간. 시트 스테이(Seat stay)에 랙(짐 받이)를 설치할 볼트 구멍이 적절하게 뚫려 있어 기대 이상의 만족이다.

프론트 랙과 리어랙이 설치된 모습
▲ 뉴욕에서 구입한 자전거 프론트 랙과 리어랙이 설치된 모습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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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 사이트에서 소개받은 'Rico Washington'의 집에서 머물 수 있다. 2th avenue 와 Bowery Street 사이 East 4th Street로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레게머리를 한 흑인이 나를 맞아준다. 뮤직 칼럼니스트이며 싱어송라이터인 그의 이력이 실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크지 않은 원룸이지만 한쪽 벽장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음악 LP판들. 4남 1녀 중 장남인 리코는 올해 35살. 미혼으로 보였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빨간색 조명을 은은하게 틀어놓고 향을 피우더니 레코드를 하나씩 꺼내어 들려준다. 나중에 한국 유학생에게 들어보니 내가 진정한 뉴요커를 만난 셈이란다. 숨가쁜 이틀을 보냈던 몸뚱아리가 편안한 분위기에 젖어드니 13시간의 시차에도 상관없이 잠이 스르르 밀려든다. 창 밖으로 마천루의 불빛이 반짝이며 눈에 들어와 박혔다.

2012. 5. 17 목
* 맨하튼 (Manhattan)

리코 형님은 정리 정돈에 나름의 절도와 감각이 있었고 디지털 세대 임에도 아날로그적인 취향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이보다 좋은 호스트도 찾기 힘들겠지만 간혹 한국인 입장에서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소파 덮개를 들추면 접이식 침대가 밖으로 펼쳐져 나름 근사한 모습이 된다. 그 공간은 더럽혀질 수 없는 그만의 공간이었나 보다. 대화 중 엉겁결에 침대에 앉자 단호한 어조의 명령이 떨어진다.

뮤직 칼럼니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그의 벽장은 LP판으로 가득차 있다.
▲ 리코 와싱턴(Rico Washington)의 벽장 뮤직 칼럼니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그의 벽장은 LP판으로 가득차 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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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지 마. 그 바지 입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잖아."

리코가 사용하던 컴퓨터를 잠깐 만지작거렸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불호령이다.

"지금 뭐하는 거지?"
"인터넷 하려고 그러는데."
"미리 말하고 써야되는 거 아니야."

그가 띄워놨던 작업창이 깜박이는 노트북 또한 사적인 영역. 물론 화를 내면 그뿐 더 이상 뒤끝은 없지만 한국식 사고방식으로는 아리송한 부분이다. 한의대 재학 시절 한방신경과 정신수업에서 '화병'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병적 개념이다. '화'(火)라는 속성은 위로 떠오르는데 거세지면 거세졌지 약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를 억제하는 '수'(水)의 속성은 부족한 경향이 있다. 감정적인 '화'의 기운은 그때 즉각 발산하지 않으면 위로 상충하여 얼굴에 상열감이 뜨고 눈이 충혈되며 목이 마르고 가슴 부위에 답답한 증상을 일으키기 쉽다.

화병이 특히 4,50대 갱년기 여성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것은 가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여자가 개인적인 영역을 포기하며 인내해야 하는 한국적 관습의 영향이 크다. 압력밥솥의 김을 중간 중간 빼 주듯 감정의 김도 빼주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의 감정을 고려해서 화를 뭉치고 있기 보다는 할 말은 그때 그때 풀어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정신건강에 좋다는 생각이 리코를 통해 떠오른다.

오늘 리코는 작업이 있어 밤 10시에 귀가한다. 이 말은 나도 10시까지 집에 못 들어간다는 소리다. 초대받은 손님이지만 잠만 허락받았으니 많은 걸 바랄 수는 없다. 마침 접수된 문자. 뉴욕행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미선 누나의 연락이다. 친구들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다는 안성맞춤의 메시지. 뉴욕주 이타카(Ithaca)에 소재한 코넬(cornell)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여행 겸 졸업식에 참석하러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동행한 인연이 이렇게 이어진다.재학 시절 같이 방을 썼던 친구 'karbi chan yuet' 와 그녀의 남자친구 'Luca'.

캘비 아버지는 중국 본토 출신이고 어머니는 홍콩 출신이라 그녀는 광둥어(cantonese), 북경어(mandarin), 영어에 능통하다. 차이나 타운의 한 음식점에서 종업원과 광동어로 대화하는 목소리가 낭랑하고 속사포 같다. Luca는 현재 메디컬 대학의 1학년 생인데 부모님이 각각 세르비아계와 루마니아계라 영어를 포함해 3개 국어에 능하다. 영국 작가인 이스라엘 쟁윌(Israel Zangwill)이 표현했던 대로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라는 미국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실감난다.

Luca는 일반적인 의대생과는 달랐다. 어려서부터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그리스 관련 분야에 심취하였다. 부모님 두 분 다 의사인 집안의 영향과 주위 사람들의 기대가 그의 진로를 결정했는데, 인문학 얘기만 하면 관심을 보이는 것이 타고난 성향이 어디 가지는 않은 듯 하다.

소문으로만 듣던 타임스퀘어의 화려함
▲ 타임스퀘어 소문으로만 듣던 타임스퀘어의 화려함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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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도중 주변을 살피니 벽면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는 마치 실제 창 밖의 전경인 양 홍콩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슥하도록 깊어지는 뉴욕의 밤과 함께 서울, 루마니아, 중국의 밤도 깊어지고 있었다. 오늘 고마운 시간을 내준 세 사람은 내게 안전한 여행을 빌어주며 헤어졌다.

안녕! 미선 누나.
再见(짜이찌앤)! 캘비.
Ciao(챠오)! 루카.


태그:#뉴욕, #자전거 여행, #미국, #카우치 서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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