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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극의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 아니 나는 나이 들어 어떻게 살까,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누구와 살아가고 있을까.

 

78세 '박복녀' 할머니. 오래 전 어린 딸을 병으로 잃고 평생을 혼자 살았다. 30년 동안 한집에 살면서 텃밭에 농사지어 먹고산다. 식구라고는 길 잃고 흘러든 개 한 마리, 버려진 고양이 한 마리, 알을 잘 낳지 못하는 닭 한 마리가 전부다. 등은 굽고 입가는 호물호물하지만 성격만은 꼬장꼬장 까칠하기 이를 데 없다.

 

76세 '지화자' 할머니. 가난한 집 맏딸로 태어나 쌀 다섯 가마니에 팔려 후처로 들어갔다. 전실 자식을 지극 정성으로 키웠지만 늙고 병드니 요양병원에 맡겨졌고 아들은 6개월 치 보증금만 내놓고는 감감무소식. 강제 퇴원당한 할머니 손에는 주소가 적힌 아들 편지 한 장만 남아있다.

 

그 주소를 찾아나선 지화자 할머니가 도착한 곳이 바로 박복녀 할머니의 집!  

 

 

평생을 이 집에서 살아온 할머니와 갑자기 들이닥쳐 아들 집이 틀림 없다고 우기는 할머니. 두 할머니의 입씨름과 티격태격에 귓가가 얼얼하고 웃음이 잇달아 터진다. 거기다가 개와 고양이와 닭으로 분한 배우들의 현란한 몸연기까지.

 

이 뮤지컬 역시 갈등으로 시작해 어찌어찌 동거가 시작되고, 아기자기 평화로운 공존의 시기를 보낸 후 위기가 닥쳐 한 사람이 떠나게 되고, 숨겨진 사연과 아픔에 대한 공감으로 마음이 풀리면서 찾아 나서고, 둘이 만나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화해에 이르는 흐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건드리는 것은 배우들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연기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이야기 덕분이다. 평생 떠나본 적 없는 시골마을에서 여전히 홀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의 어머니다. 홀로 깨어 일어나 밥 한 술 뜨고, 홀로 밭에 나가 농사짓고, 기르는 짐승들 거두고, 다시 홀로 누워 잠드는, 홀로 계신 어머니.

 

평생 한눈 팔지 않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하며 자식 길렀지만 늙어 병드니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으로 가야만 하는 어머니. 자주 들여다봐 주면 고마우련만 그러기는 커녕 발길을 끊어버리다니, 속상해 죽고만 싶다. 그래도 행여나 소식이 올까, 잠깐이라도 들를까 싶어 눈길은 창밖으로만 향한다. 자식들의 변심을 알면서도 바빠서 그런 거라 애써 이해하며 스스로를 달래는 어머니.

 

의붓아들이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나서 온 가족이 중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지화자 할머니의 경우는 누가 보나 계획적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경우를 기로(棄老)라고 하는데, 부양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 남몰래 노인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흔히 부모님의 재산을 다 빼돌리고 버리거나,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모시고 여행을 가서는 그곳에 버리고 자기들만 돌오는 식으로 저질러진다. 물론 요양기관에 맡겨두고 소식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낯선 곳에서 발견된 부모님들의 반응이다. 하도 울어서 짓무른 눈을 하고서도 내게는 원래 자식이 없다, 살던 곳의 주소도 전화번호도 다 잊어버렸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금쪽 같은 자식이 고의로 자신을 버린 것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자식에게 해가 갈까 다물어버린 입. 입술을 깨물며 눌러 삼키는 피울음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까. 생각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박복녀 할머니와 지화자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지만 이제 '같이 밥 먹으면서'[食口] 서로 등을 기대고 남은 날을 살아갈 것이다. 물론 때로 싸우기도 하고 미운 소리를 쏟아붓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검게 그을린 얼굴, 자글자글한 주름, 굽은 허리와 등, 거친 손마디, 병든 몸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예쁘다고 할 것이다. 옛 일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거나 그리움에 눈가가 젖어들면 서로 등을 가만 가만 쓸어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두 할머니는 이미 서로에게 고백했다. 이 고백이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 솔직하고 뜨거운 것은 살아온 생 전부를 끌어안아 주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이 다음에 내 생애 전부를 있는 그대로 받아 안아주는 그런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당신 밥 잘하는 손이, 푸근한 눈빛이 예쁘다, 예쁘다, 참 예쁘다!"

덧붙이는 글 |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 (작, 작사, 연출 : 오미영 / 작곡, 음악감독 : 조선형 / 안무 : 김정윤 / 프로듀서 : 오준석 / 출연 : 김효숙, 이봉련, 문민형, 이경욱, 양승호 등) ~ 6. 24 까지,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태그:#식구를 찾아서, #식구, #노인, #할머니, #기로(棄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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