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사 보강 : 5일 오후 3시 50분] 

안녕하세요? 박도입니다. 2012년 6월 9일은 대단히 좋은 날인가 봅니다. 올 연초 일본에 있는 한 문인단체에서 시집 발간 50호 기념일을 이 날로 정하였다고 저에게 참석을 부탁해 와 무심결에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초, 장원호 졸업생이 이 날이 자기들 기수 졸업 30주년 모교 방문일이라고 초청하여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선약을 어길 수 없어 여러분의 귀한 모임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음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고1 때는 1학년 3반 담임으로, 고2 때는 2학년 2반 담임으로, 그리고 국어 담당 교사로 일주일에 4~5시간 씩 가장 많이 만났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의 얼굴과 이름이 눈에 선합니다. 아직도 여러분 240명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기억할 것 같습니다.

저는 2004년 2월, 정년을 꼭 5년 남기고 더 이상 밥값을 못할 것 같아 조기 퇴직한 뒤 곧장 강원도 안흥 산골 마을로 내려와 얼치기 농사꾼으로 지내다가 2010년 11월부터 원주로 이사하여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8년 근무했던 이대부고(현, 이대부중)
 28년 근무했던 이대부고(현, 이대부중)
ⓒ 박도

관련사진보기


제자 덕분 제주에 가다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고 하였는데, 이곳 강원도로 내려온 뒤 더욱 지난 추억을 되새기며, 즐겁고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생각하면 늘 감사한 마음과 때로는 지난날 나의 잘못한 언행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매우 부끄럽기도 합니다.

박현선 가족과 제주에서(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현진 제주대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맨 오른쪽)
 박현선 가족과 제주에서(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현진 제주대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맨 오른쪽)
ⓒ 박도

관련사진보기


좀 창피한 얘기지만 저는 대학 재학시절 과에서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가는데 돈이 없어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 신혼여행 때도 그 무렵 가장 인기였던 그곳을 가 보지 못하다가 여러분 동기 박현선 님이 제주도에 살면서 우리 가족을 초청하여 1992년 이른 봄날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이 부분도 좀 창피) 3박 4일 제주여행을 매우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그때 바라본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제 머릿속에 남아 있고, 그동안 제 작품 속에도 여러 번 제주 풍물을 그렸습니다. "아내가 귀여우면 처가집 말뚝 보고 절한다"는 속담처럼 박현선 님의 부군 제주대 서현진 교수님은 저에게 해마다 연하 인사와 때때로 문안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나중에야 서 교수님이 신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매우 가슴 아팠습니다. 지금도 다정다감한 그분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마음이 아립니다. 다행히 박현선 님이 남편을 잃은 아픔을 털고 뒤늦게 다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의 큰 병원에서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에 감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999년 여러분 동기 이종원 님의 아버님(이영기 변호사) 주선으로 중국 대륙의 항일유적지를 다녀온 게 제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뒤 근현대사 연구와 항일유적지 답사로 국내외 여러 곳을 답사한 뒤 여러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1990년대 어느 날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여러분의 동기 신민철 님이 뉴욕에 있는 자기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내 교무수첩에 적어주면서 "선생님, 미국에 오시면 꼭 찾아주세요. 그러면 제가 뉴욕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고맙네"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말도 영어로 할 줄 모르는 꾀죄죄한 골동품 훈장이 2004년 2월에 천만 뜻밖에도 40여 일간 미국에 가게 되어 허드슨 강 언덕에 그림 같은 그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더군요.

신민철 님 내외는 고국에서 온 와룡 선생을 위하여 대서양에서 나는 온갖 진귀한 해산물을 상다리가 휠 정도로 차려놓고 대접했습니다. 그때 저를 안내하던 재미동포(박유종 선생)가 "도대체 선생님은 학생을 어떻게 가르쳐 이런 대접을 받습니까?"라는 찬사를 입이 닳도록 받았고, 그분과는 지금도 교류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날 밤 여러분 동기 김창현 님의 안내로 뉴욕 맨해튼의 야경을 구경한 뒤 신민철 님이 잡아준 호텔에서 잠을 자는데 하필이면 새벽녘에 불이 나 비상 탈출하여 호텔 주차장에서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이튿날 아침밥은 호텔 측에서 무료로 제공하여 여비를 절약하였고, 숙박비도 일부 환불을 받았습니다.

뉴욕에서 만난 옛 제자와 가족들과 즐거운 한때(오른쪽부터 김창현, 신민철, 필자, 그리고 신민철 부인 이지수 씨와 자녀들)
 뉴욕에서 만난 옛 제자와 가족들과 즐거운 한때(오른쪽부터 김창현, 신민철, 필자, 그리고 신민철 부인 이지수 씨와 자녀들)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의 큰 잘못

귀국 후 아내로부터 미국에서 바쁘게 사는 제자들을 괴롭혔다고 무척 호되게 야단을 맞은 뒤 2007년에는 조용히 미국에 갔으나 메릴랜드 주 락빌에 사는 이미진 님이 어떻게 알고서 굳이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마침 안내해 주시던 분과 같은 마을이라 찾아갔습니다.

제자 이미진 가족, 부군은 한국 출장 중으로 담지 못하였음
 제자 이미진 가족, 부군은 한국 출장 중으로 담지 못하였음
ⓒ 박도

관련사진보기


그는 고국에서 공수해온 온갖 나물반찬과 심지어 복분자 술까지 차려놓고 친정아버지를 만나듯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미국에 있는 여러 제자들이 만든 예쁜 두툼한 카드까지 받았습니다. 제 살아생전에 그 빚을 다 갚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나에게 더욱 열심히 글을 쓰라는 격려로 알고 남은 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꼭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지난 잘못을 여러분에게 깊이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 고1 때인 1979년 어느 봄날 우리 반(1-3)은 교련시간이고, 옆 반(1-2)은 기술 가정 시간으로 교실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반 남학생들 가운데 미처 각반을 준비 못한 두 학생이 교련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지 않으려고 옆 반에 빌리러 갔으나 교실 문이 담겨 있자 복도 쪽 윗 창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가 사물함에서 각반을 가져 나온 모양인가 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간이 끝난 뒤 교실로 돌아온 옆 반 여학생들의 책가방이 다 털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울부짖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을 조사 하던 가운데 우리 반 두 학생이 열쇠로 잠긴 옆 반 교실 윗 창문을 넘어 들어간 사실이 밝혀져 저는 그때 그 두 학생에게 "왜 문이 잠긴 남의 반에 창 넘어 들어갔느냐"고 두들겨 팼습니다.

그 몇 해 후 꼬리를 물던 교내 도난사고의 주범이 잡혔습니다. 주범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괴로웠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 그 학생들에게 문이 담긴 남의 반에 창 넘은 것을 탓하며 두들겨 팼지만 그때 그 학생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때 저에게 매를 맞은 이아무개 제자는 1990년대 말 무렵 어느 목욕탕에서 하필이면 피차 벌거벗은 채로 만났습니다. 그때 제가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지난 일을 정중히 사과하자 그는 "선생님, 저는 벌써 다 잊었는데요"하고서는 음료수 한 병을 사서 건네고는 온탕으로 들어가고 저는 목욕탕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제자 배아무개에게는 전화로만 사과했을 뿐, 아직 직접 만나 사과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깊이 사죄합니다. 혹 오늘 그가 참석치 못하였다면 여러 분들이 꼭 전달해 주시고, 누구든 한번 별도로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81년 설악산 수학여행 중, 비룡폭포에서 이대부고 2-2반 일동
 1981년 설악산 수학여행 중, 비룡폭포에서 이대부고 2-2반 일동
ⓒ 박도

관련사진보기


세상에 공짜는 없다

때때로 사진첩을 들추면서 여러분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립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재직시절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르면 무척 마음이 아프고 교단에 선 게 매우 부끄럽습니다. 

오늘 제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역시 저는 훈장티를 벗어날 수 없기에 여러분에게 두 가지만 당부합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도 이제 50에 접어든다고 하니 이제부터 노후 대비를 잘 하십시오. 늘그막에 비참하게 된 사람은 대부분 맨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 맨홀에 빠지는 대부분 사람들은 평소 불로소득이나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맨홀에 빠지면 헤쳐 나오기 힘듭니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는 먹이를 쉽게 구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둘째는 여러분 가정을 잘 지키십시오. 최근 우리 사회에 늘그막에 가정이 깨어진 집이 많은데, 이는 가족 간 소통부족과 가부장적인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왕이 되고 싶으면 여러분 부인을 여왕으로 모시고, 여러분이 여왕이 되고 싶으면 남편을 왕으로 모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부부는 해로하게 되고 가정은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여러분 가정의 화목을 빌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보탭니다. 죽으면 썩을 몸, 여러분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사십시오. 그러면 다시 만날 때 더 반갑습니다.

22기 졸업생 여러분, 사랑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안녕!!!
2012년 6월 옛 훈장 박도 올림


태그:#모교방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