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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달간 몸이 굉장히 안 좋았다. 만사가 귀찮았고, 그래서 의도와 달리 휩쓸려가는 일들은 시간과 더불어 해결되리 하며 놓아버렸다. 이제 새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았는데 문제는 또 다른 방향에서도 찾아오는 법. 인간사 가장 기본적 욕망인 식욕, 그것이 이 야심한 밤에 가장 큰 문제로 등극해 버린다.

 

주방으로 가서 싱크대 선반을 뒤져서 부시럭부시럭 라면을 꺼내고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올려본다. 냉장고에 든 계란도 톡 깨뜨려 넣고, 파도 송송 썰어서 보글보글 끓여본다. 그 새를 못 참고 배에선 천둥이 쿠르르릉. 아, 이제 한입 먹어볼까 싶어 젓가락을 들어본다만, 이런! 가장 중요한 김치가 없다면 이 어찌 난감치 않을쏘냐.

 

김치. 오늘도 어제도 식탁을 점령하는 가장 기본적인 반찬. 한편으론 한국인을 상징하는 가장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인 이것은 '마늘냄새 나는 한국인'이란 표현과 더불어 한국인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외국인들이 한국 남자를 '김치보이'라 부르는 것, 외화로 발행되는 국내 채권을 '김치 본드'라 하고, 사진 촬영 시엔 멋진 미소를 위해 '김치'라고 슬그머니 말해보는 것에서도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김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단단한 인지도 못지않게 영양적으로도 뒤지지 않아서 미국의 건강잡지 '헬스'에서 거론한 '세계5대 건강식품'의 하나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김치의 재료를 보면 그 영양적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배추, 열무 같은 식이성 섬유를 많이 함유한 채소를 주재료로 하고, 양념으로 들어가는 고춧가루의 캡사이신 성분은 지방을 연소시키는 작용과 더불어 노화를 억제하는 기능도 있다. 때문에 김치 먹으면 살 빠지고 젊어진다는 속설도 생겨났고, 이 덕분에 고추씨 미용이나 다이어트에 열 올리는 여성들도 꽤 생겨났다. 혹여 매운 기운에 위장 다 버릴까 싶다만, 이것 역시도 김치에 대한 관심이라 여기면 나쁘지만은 않다.

 

그런 한편으로 김치는 다양성을 대변하는 음식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 제철 채소를 이용해 다양한 조리법으로 만든 김치는 그 종류만도 몇 천 가지가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봄에는 무를 이용해서 새콤달콤하게 입맛 돋워주는 나박김치, 여름에는 갖은 양념으로 맛과 멋을 살린 오이소박이, 가을에는 울에서 뚝 딴 늙을 호박으로 만든 호박김치, 겨울에는 여럿이 모여 만든 김장용 배추김치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사계절의 변화와 그 속에 자리한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음식이 가진 그윽한 서정성 까지도 보여준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게다가 김치 담그는 과정은 한국을 알리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 이 음식이 가진 정과 풍요의 아름다움도 엿보게 해준다. 실제로 '김장담그기'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도 최근에 활발한 상황이다.

 

요즘이야 김장을 하는 집이 잘 없지만 예전에는 긴 겨울을 대비한 가장 큰 일 중 하나가 김장 아니었겠나. 이웃사촌, 가족, 친척들이 모여서 배추를 씻고, 양념을 버무리고, 그러면서 잘 양념한 한 줄기를 쭉 찢어서 입에 넣어주며 '간 잘 됐수?',' 에이, 너무 싱겁잖아. 젓갈을 더 넣어' 하는 풍경은 겨울에만 느끼는 푸근한 정서를 만들어 주었고, 그렇게 여럿이 모여 만든 김치는 맛이 더욱 배가 되었다. 김장을 하고 남은 양념에 배추속대를 슥슥 잘 버무려선 삶은 돼지고기를 싸먹는 맛도 별미인데, 거기다 어른들은 막걸리도 한 잔씩 돌려가며 마셨다.

 

그런 것이다. 한국인에게 김치를 빼놓고 밥상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는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얼큰하게 소주에 취해보고, 흥겨운 술자리에선 두부김치의 부들한 맛에 감겨도 본다. 여인들은 특별한 날이면 정성스레 매콤새콤한 김치만두를 빚어서 손님을 대접해 왔다. 쏭쏭 썬 김치를 메밀묵 위에 얹어서 육수와 더불어 한 그릇 간단한 계절음식으로 즐기고, 오늘 날에는 버거, 스테이크, 필라프 같은 서양 음식에서도 김치는 주재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김치를 '더불어 문화'의 매개물이라 하면 어떨까? 김치는 하나만 단독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이것저것 섞어서 푹 끓이거나 무치면 더 맛있다. 게다가 김장을 담그는 것도 여럿이서 하는 것이고, 들어가는 재료도 갖가지 해산물과 채소와 양념이 어우러져야 되며, 자연과 시간과 노력이 더불어서 작용하는 발효식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결국 단독으로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으니 '뭉쳐야 산다'는 흔한 진리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김치인 것이다.

 

 

한편으론 어디서건 빛을 발하는 그 쓰임새는 사람 역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가르쳐 준다. 오롯이 자신만의 가치와 철학으로 묵묵히 노력하는 자는 그 어떤 흔들림에도 끄떡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 작은 한 그릇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저의 블로그 '캣스트리트의 추억'에서도 음식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태그:#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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