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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울산 옥동 울주군청 근처에 있는 우리생협. 생긴지 며칠 안되었지만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울산 옥동 울주군청 근처에 있는 우리생협. 생긴지 며칠 안되었지만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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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 식당 옆엔 책꽂이가 있고 책이 많이 꽂혀 있었습니다.
 가게 안 식당 옆엔 책꽂이가 있고 책이 많이 꽂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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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채소도 많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유기농 채소도 많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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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금 탁발하며 살고 있어요."

몇 개월 전 음악 모임서 아주 독특한 여성 한 분을 만났습니다. 남편과 자식들 빡빡 깎은 모습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백조라면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했습니다. 저와는 달리 생활에 대한 걱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대포가 큰 여장부의 기질이 엿보였습니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여자일까? 저는 그녀에게 호감이 가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탁발하면서 산다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탁발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까요? 음악 모임서 잠시 잠깐 만난 사이였지만 한 번쯤 만나 사는 이야기 들어 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변 선생님, 제가 우리생협을 시작하는데 꼭 참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인연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사이버 공간 카카오톡(카톡). 얼마 전 그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 왔습니다. 가게는 울주군청 옆에 있다 했습니다. 돈이 없어 탁발하며 생계를 이어간다던 그녀가 가게 문을 연다? 이건 또 무슨 도깨비가 놀라 나자빠지는 소리? 더욱 궁금증이 생겼지만 저는 문여는 날엔 가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 주간 출근에 걸려 개업식엔 못가보고 다음날 저녁에 퇴근하면서 가보게 되었습니다.

"어제 약 1000여 명이 오시고 오늘은 600여 명이 오셨네요. 아무도 안 오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 많이 했는데..."

간판엔 '우리생협'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생협도 종류가 많은가 봅니다. 생각보다 가게 안은 컸습니다. 돈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그런 생협 가게의 대표를 맡아 보다니 참 대단한 여성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돈이 없어 탁발하며 먹고 살았다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생협의 대표가 될수 있었을까요? 갈수록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6월 13일 개업식 하고 다음날도 개업기념 이벤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 9시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 거렸습니다.

"며칠 후 조용할 때 다시 올게요."

그날은 밤이고 바빠보여 그렇게 짧게 인사만 하고 말았습니다. 개업 초기라 많이 바빠 보였습니다. 저는 아이들 좋아할 과자 몇개를 사들고 나서려는데 바쁜 중에도 장바구니 하나 주면서 안에 여러가지 먹을 거리를 싸주었습니다. 아파트 경비 알바를 하고있는 저는 시간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과 겹치고 해서요. 19일 경비 출근 쉬는 날 오후엔 꼭 찾아 가보고 싶었습니다.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 갔습니다. 저는 사전 연락하고 찾아가 정해진 질문과 그럴싸한 답변을 듣고자 하는게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찾아가 준비되잖은 상황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습니다.

식당의 점심. 주방엔 주방관리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식당의 점심. 주방엔 주방관리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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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에 울산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12시경 찾아가니 그때도 많이 바빠 보이더군요. 그녀는 저에게 밥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안 먹었다니까 식당으로 대려 가더니 우선 밥부터 챙겨 먹으라 했습니다. 작은 주방엔 음식을 만들고 차려주는 분이 따로 계셨습니다. 저를 직원 식당으로 안내하고는 다시 나갔습니다. 제가 밥먹을 동안 바쁜 일처리를 하려는 거 같았습니다.

그 전에 잠시 둘러보니 다른 생협 가게와 마찬가지로 모두 친환경 제품으로 진열해 두었습니다. 내부장식도 친환경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육류 파는 곳도 있고 빵을 직접 만들어 파는 곳도 있었습니다. 식당으로가는 통로 한켠엔 직원과 손님이 보라고 책도 수십여권 준비해 두었습니다. 잔을 가져가면 커피 한 잔에 100원 한다고 했습니다. 앉아서 먹도록 탁자와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생협에 관심이 많아 동네 생협에 가끔 들러 보기도 했었는데 그곳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배부르게 밥 다 먹고나니 원두커피도 한 잔 주었습니다. 커피를 다 마실즈음 울산 우리생협 대표 장영숙씨가 들어 왔습니다. 바쁜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 어떻하느냐는 입장을 보일줄 알았는데 무작정 들이대는 게 맘에 든다고 하네요. 역시나 참 여장부 기질이 다분한 분 같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라며 저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잉? 이분이 남편이라고?' 저는 속으로 좀 놀랐습니다. 빵 만드는 분이 남편이라니요?

"우리 남편은 참 대단한 분이에요."

남편 되시는 분은 인상이 참 좋았습니다. 남편은 줄곧 일본에서 제빵 기술을 익히고 빵가게도 운영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제빵 기술자라 합니다. 두 분이 어떻게 인연이 되어 부부가 되었을까요?

유기농 재료로 직접 만든 빵들도 많습니다.
 유기농 재료로 직접 만든 빵들도 많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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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울산 태화동에서 1989년부터 웨딩사업을 했어요. 1997년에 친척 중 한 분이 사이판으로 사업차 방문한다고 했어요. 머리도 식힐겸 해서 따라 갔었죠. 친척이 아는 분을 소개 했는데 지금의 남편이었어요. 저는 결혼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남편 집에 놀러 갔을 때 집안에 제가 관심많은 명상에 관한 책이 1만여 권이나 책장에 꽂혀 있더라구요. 속으로 생각했죠. '이 남자랑 살면 이 많은 책이 내 게 되겠네'라고요. 남편도 알고보니 명상에 관심 많더라구요. 인상도 좋고 해서 제가 끌어 당겼죠."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저도 웃었습니다. 재밌었습니다. 결혼할 맘은 없었지만 책과 명상하는 게 맘에 든다고 그냥 결혼했다고 하고 남편이 아닌 그녀가 먼저 대시했다니 사연이 재밌었습니다. 남편분은 일본에서 사이판으로 건너가 빵집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분의 소개로 친분을 쌓던 중 남편 되시는 분이 캐나다로 가서 살고자 했었는데 장영숙씨가 힘차게 끌어 당겨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남편이 외국에서만 지내다 국내 들어오니 처음엔 많이 힘들어 했어요. 적응이 안 되나 보더라고요. 저는 웨딩업을 하고 남편은 빵집을 했었어요. 그러다 아이도 생기고 하니 서로 힘들어 제가 웨딩업을 접고 남편과 함께 빵집하는 데 전념하게 되었죠. 남편은 고객 입장에서 빵을 만들어요. 재료 하나도 섬세하게 신경 쓰는 편이죠. 빵의 주 재료가 밀가루잖아요. 그런데 시중엔 온통 수입 밀가루 뿐이었어요. 우리밀 빵을 만들어 공급하자는 게 남편의 기본 방침이었는데 구할 길이 없었어요. 그러다 아는 분을 통해 생협을 소개받게 되었고 저와 남편이 찾던 바로 그 유형의 방식이라 좋았어요."

장영숙 님은 생협에 대해 호감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생협에 취업하여 4년 정도 일하면서 생협에 대해 공부해 나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생협이 제가 아는 것만도 14개 정도 됩니다. 전국에 크고작은 생협을 모두 찾아보면 꽤나 많을 겁니다. 저는 생협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생협에 대해 공부해 보니 어떤 생협은 생산자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어떤 생협은 소비자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생협이 많아 질수록 좋겠다는 기본 생각엔 변함 없어요. 생산자와 소비자를 서로 엮어서 직거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니 생산자도 좋고 소비자도 좋잖아요."

그많은 생협중에 왜 하필 '우리생협'을 골랐을까요?

"우리생협은 생긴지 3년이 되어갑니다. 몇십년 된 생협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선 제가 할일이 20% 정도 되는 거 같았어요. 저는 모험을 즐기는 편이라 제가 할일이 많은 곳을 찾다보니 우리생협을 찾게 되었어요. 우리생협은 전국에 100개 정도 매장이 있었어요. 이번에 울산 옥동에 차려진 우리생협이 딱 100번째 생협이예요. 울산엔 우리가 1호점입니다."

그녀는 우리생협 대표단을 만나 우리생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합니다. 이사장과 면담에서 그분이 생각하고 있는 생협에 대한 겸손함이 마음에 들었다 합니다. 또, 생산자를 찾아가보니 유기농 농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생협 개념과 동질감을 느껴 어렵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생협에 직원으로 일하면서 생협은 기업화가 되면 탈나겠구나 하는걸 느꼈어요. 생협은 동네 구석구석 마치 수다방 처럼 있어야 생협다운 생협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거기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보급하는거죠. 저는 멀리서 가져 오는거 보다 가까운 곳에서 가져오는것이 더 싱싱하고 좋겠다고 생각해요. 우리생협은 그런 구조가 잘 되어 있었어요."

그녀는 지난 1년간 무작정 하던 일을 모두 중단했다 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탁발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가 한마음 먹고 시작한 게 생협운동. 여러 지인들이 뜻을 모았고 그녀의 생협활동 방식에 힘을 모아 주어 울산 옥동에 우리생협을 개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 며칠간 300여 명이나 회원 가입 했어요. 시작이 좋은 편입니다. 저는 저혼자 잘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정년퇴직자나 적은 돈으로 장사하다 망한 분 그리고 실직자들... 저는 이런 분들에게 희망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농업이 꼭 시골에만 있어야 하나요? 저는 도시 농업을 꿈꿉니다. 시골서 농사 짓는 농부가 시골농업을 한는 것이라면 도시 소비자와 연결하는 우리는 도시 농업을 하는 거 아닌가요?"

힘이 들어간 그녀의 목소리가 희망에 가득차 보입니다. 그녀는 우선 조합원 1000여 명 모집을 목표선으로 잡았다고 했습니다.

"생협 조합원이 1000여 명 되면 여러가지 더 좋은 사회사업을 펼칠수 있을거라 생각 됩니다. 청소사업이나 서비스업, 문화사업으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스스로 생업을 이어가게 하는거죠.

저는 우리생협 울산점을 열면서 '그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기업은 위아래가 있어 명령체계지만 저는 나와 너가 아닌 우리가 함께 일하고 발전시켜 나가는거죠. 일하는 사람들이 명령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일 하듯이 서로 도우며 하자는 거죠. 서로에게 도움주며 일하면 서로 기분 좋잖겠어요?"

생협 개업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아서 거론 할 수가 없을 지경 이라고 합니다. 공사기간 중에 무료로 식사를 제공해준 분, 비용이 만만찮게 들었는데 그냥 아무 조건없이 수 천만원 씩이나 선뜻 빌려준 분, 이런저런 분들이 모여 생협 울산점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생협을 시작하면서 자신은 인복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 혼자 힘으로 이렇게 생협을 시작하는 걸 꿈이라도 꾸었겠어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죠. 그런 분들께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저에게 좋은 일 많이 하라고 도와 주신거죠. 저는 이 생협 공간을 책 읽는 공간과 문화공연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합비 일부를 모아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이나 장애인 시설,무의탁 노인과 같이 소외된 곳에 쓸 계획입니다. 또,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에겐 어느 정도 숙달되면 울산 지역 여기저기에 작은 생협을 만들어 운영하겠금 도울 겁니다."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겨, 같이 잘살아야 재밌제'

어느 작가의 그런 말이 생각 납니다. 장영숙. 그 분이 그런 분 같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함을 주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게 바람이랍니다. 그녀에게 생협운동은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하는 것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처음에 생협이 생길 땐 아토피나 암 환자 그리고 유기농만 찾는 유별난 이들 위주로 시작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대가 변하고 건강문제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협시대가 오는 거 같았죠. 생협에 관심이 높아지는만큼 문제도 많이 발생하는 걸 보았어요. 생협은 독점화가 되면 안 될 거 같아요. 기업적 사고를 버려야지 생협이 기업화가 되면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에요. 저는 질좋은 유기농 제품 판로 연결해 주는 게 생협의 의무라 여겨요. 유기농이면 다 같은 유기농인데 왜 때깔 좋고 모양 좋은 놈만 갔다 팔아요? 그러면 좀 모난 유기농 농산물은 어떻게 하라구요. 저는 질 좋은 유기농이면 모양이나 때깔을 따지지 않으려 해요. 좀 모나고 때깔 없더라도 몸엔 똑같이 좋잖아요. 그래야 유기농 생산자들이 힘을 내어 더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려고 노력할거 구요. 제 말이 틀린가요?"


태그:#우리생협, #울산, #장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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