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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나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 건립된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나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 건립된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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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가리고 있던 흰색 천을 걷어내자 약 1미터 높이의 붉은색 화강석이 네모반듯한 모습을 드러냈다. 비문은 "일본군이 '성적인 노예(Sexual Slavery)'로 부리기 위해 20만 명이 넘는 소녀들을 강제로 납치했다"는 문구로 시작된다.

일본군이 이들에게 자행한 극악무도하고 가증스러운 범죄(Heinous Crime)는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며, 정신대 피해자들이 감내해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엄청난 범죄 행위는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석을 붉은색 화강석으로 만든 이유도 종군위안부 희생자들의 고통과 그들이 흘린 피를 상징하기 위해서다. 비문 바로 윗부분에는 임신한 위안부가 학대 받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새겨서 비문과의 일체감을 나타냈다. 비석 하단에는 미국 정부를 대표해서 낫소카운티와 에드 맹가노 카운티장이, 재미 한인사회를 대표해서 한미공공정책위원회(KAPAC)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광주광역시가 건립 주체로 기록돼 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낫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제막식이 열린 가운데, 이철우 한미공공정책위원회 회장(왼쪽에서 3번째)과 강운태 광주시장(왼쪽에서 4번째) 등 참석자들이 테이프 컷팅을 하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낫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제막식이 열린 가운데, 이철우 한미공공정책위원회 회장(왼쪽에서 3번째)과 강운태 광주시장(왼쪽에서 4번째) 등 참석자들이 테이프 컷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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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이례... 미국에 세워진 두번째 '위안부 기림비'

비석이 세워진 곳은 미국 뉴욕 주 낫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 전몰장병과 전쟁 실종자 기념비가 세워진 현충원과 같은 곳이다. 학생, 주민뿐만 아니라 정부 인사와 정치인 등 연간 수만 명이 방문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전쟁포로와 전쟁 중 실종자(POW/MIA)'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중앙에는 전몰장병들의 이름이 새겨진 영묘가 보인다. 비석은 바로 이 영묘의 왼쪽 편 넓은 잔디밭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20일(현지시각) 이곳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 기림비는 2년 전 뉴저지 주 팰리세이즈팍시 시립도서관 앞에 건립된 기림비에 이어 두 번째다. 참전 기념비 외에는 기념비 설치가 거의 불가능한 참전용사 기념원에 전몰장병도 아닌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가 새워진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이다.

게다가 기림비 건립 승인부터 제작 및 설치까지 모든 과정을 2주일 반 만에 마쳤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념비 설치에 2년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이 역시 대단히 이례적이다. 이번 기림비 건립을 사실상 주도한 이철우 한미공공정책위원회 회장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카운티 정부와의 추모비 건립 협의와 별개로 장소 선정, 비문과 그림, 추모비의 크기, 설치 시기, 위치 등 모든 것을 '기념비위원회'로부터 승인받아야 한다. 이후 기념비 도안 및 제작, 공원국 설치 허가증 발행, 설치까지 모든 과정이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이철우 회장은 이날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참전용사 기념원에는 전몰용사나 전쟁 관련자가 아니면 기념비를 세우기 어려운데, 특별히 승인을 받았다"며 "한국 현충원에도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도 '기념비위원회'로부터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림비 건립을 위해 "지난 3주간 밤잠을 못자고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것이다.

특히 이 회장은 혹시라도 있을 일본 인사들의 방해 공작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카운티 정부와의 협의를 은밀히 추진해왔다. 그는 "물론 제일 어려웠던 점은 카운티 정부와 관련 위원회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었지만, 일본 인사들의 항의 내지는 공격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에 따르면, 실제 맹가노 카운티장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반대하는 일본 인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사이버테러'를 당했다.

이 회장이 뉴저지 주에 이어 뉴욕에 제2의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추진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일본 인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망동"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 정치인 등이 뉴저지 주에 있는 기림비를 철거하라고 요구해서 미주 한인커뮤니티가 굉장히 화가 나 있다"며 "그들에게 더 큰 교훈을 주고자 뉴욕에서 가장 큰 낫소카운티에 기림비를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낫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낫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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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떼려다가 혹 붙인 일본의 '꼼수'

위안부 기림비 철거를 위한 일본의 움직임은 노골적이었다. 지난달 1일 팰리세이즈팍시를 방문한 히로키 시게유키 주미 뉴욕총영사와 나가세 켄스케 정무담당 부총영사 등 일본 대표단은 '미·일 우호 증진을 위해' 도서관 서적 기증, 벚꽃길 조성 재정 지원,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개설 등을 제안했다. 시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일본 대표단은 위안부 기림비 철거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기림비 비문에 적힌 "일본 정부에 유린 된 20만 명의 여성과 소녀를 기린다"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로툰도 시장은 "한인들의 요구로 기림비를 건립했지만 시에서 2년 동안 충분한 자료조사를 통해서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며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며칠 후 일본 자민당 소속 중의원 4명이 다시 시를 방문했다. 이들은 "여성들은 한 번도 성적 노예가 되길 강요받은 적이 없다"며 기림비 철거를 재차 요구했지만 시는 또 다시 그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은 기림비 철거를 위해 국가 차원의 외교적 노력을 펼쳤지만 모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역효과를 낳았다. 일본이 위안부 기림비 철거를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뉴욕을 비롯한 미국 전 지역 한인 커뮤니티에 공분이 일었고, 이러한 자극은 오히려 위안부 기림비를 더 많이 세우자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뉴욕한인회는 지난달 10일 팰리세이즈팍시 기림비 앞에서 일본의 '위안부 기림비 철거' 주장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특히 "뉴저지에 이어 뉴욕과 코네티컷, 롱아일랜드 등에도 기념비를 세워 일본의 반인권적 행위를 고발하고 미국과 세계에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겠다"며 위안부 기림비 확대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피커 쿠 뉴욕시의원(중국계)은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한인 주거지역인 플러싱 한인타운 등의 거리 이름을 가칭 '위안부 기림길'로 바꾸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제안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이 진행되고 쿠 의원에 대한 조직적인 항의서한까지 보내고 있지만, 오히려 거리 개명 논의는 힘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 지난달 19일 <뉴욕타임스>는 "일본 정부가 뉴저지 팰리세이즈팍에 있는 위안부 기림비 철거를 요구한 것이 도리어 위안부 기림비를 늘리는데 기여하는 결과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2년 전 기림비 건립을 주도했던 시민참여센터의 박제진 변호사는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행동에 나선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위안부 기림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면서 "한인 커뮤니티가 있는 미 전역의 도시에서 기림비를 추가로 건립할 것"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 보도와 관련 일본의 행위를 비판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특히 자신을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미국이 일본에게 원폭기념관을 철거하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일본이 미국에게 진주만 기념비를 철거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겠느냐"며 "(일본의 요구는) 말도 안 된다"는 댓글을 달아 눈길을 끌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낫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제막식이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기림비에 장미꽃을 헌화하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 낫소카운티 아이젠하워파크 내 참전용사 기념원(Veterans Memorial)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넋을 기리는 위안부 기림비(추모비) 제막식이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기림비에 장미꽃을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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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철거 요구? 해 볼테면 해봐!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가장 먼저 행동에 옮긴 것은 이철우 회장이었다. 이 회장은 뉴욕에 추가 기림비 건립 계획을 세운 지 3주도 안 돼 낫소카운티 정부와 기념비위원회를 설득해 이를 성사시켰다. 뉴욕 주 정치인 및 정부 인사들과 오랜 인맥을 형성해 왔던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이 회장은 일본의 또 다른 철거 시도 우려에 대해 "낫소카운티에서 오늘 날짜로 공식적으로 위안부 기림비에 대해 발표했고, 카운티가 이를 얼마나 강하게 지원하고 있는지 설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념비 관리를 카운티 정부와 기념비위원회가 맡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강하게 요청하더라도 철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설령 카운티 정부가 기림비를 철거하려고 해도 공원국, 원호처, 참전용사회 등으로 구성 돼 있는 기념비위원회의 전체 동의를 얻기는 힘든 상황이다.

특히 이번 기림비는 순수 민간단체 차원에서 추진한 팰리세이즈팍시 기림비와는 달리 한미 지방자치단체인 광주시와 낫소카운티, 주미 한인단체인 한미공공정책위원회가 공동으로 건립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강운태 광주시장은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광주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라며 "위안부 문제는 한민족이 공통적으로 지고 있는 피멍이기 때문에 이 피멍을 씻어내기 위해 뉴욕 주 한복판 낫소카운티에 기림비를 세우자는 이철우 회장과 의기투합을 했다"고 말했다. 강 시장은 이날 공식 기념사를 한 뒤, 자신의 한 달분 급여 전액을 기림비 조경 관리 비용으로 써달라며 기탁했다.

한편 이철우 회장은 오는 9월 22일 기림비가 설치된 참전용사 기념원 내에서 종군위안부 여성을 포함해 그동안 유린 되어온 여성의 인권을 주제로 한 대형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태그:#위안부 기림비, #중군 위안부, #위안부 추모비, #참전용사 기념원,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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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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