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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숙소에서 식구들과 서둘렀고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탔다. 아침 이른 시간, '토튼햄 코트 로드(Tottenham Court Road)'역에 내리니 바로 눈앞이 '도미니언(Dominion)' 뮤지컬 극장이다. 이 극장에서는 흑인들이 주연인 록음악 뮤지컬이 공연 중이고 극장 앞에도 유독 흑인들이 많다. 아침부터 햇살이 맑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반갑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런던의 지하철은 내부가 좁고 혼잡하지만 운치 있다.
▲ 박물관 가는 지하철 안 런던의 지하철은 내부가 좁고 혼잡하지만 운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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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까지 걸었다. 나는 아내, 신영이와 함께 10분 정도 걸었다. 기대를 안고 대영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세계 3대 박물관인 대영박물관을 향한 접근로는 작은 길들로 이어지고 있다. 굳이 대영박물관을 찾을 필요도 없다. 많은 여행자 차림의 방문객들이 한 방향으로 걷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박물관은 대영박물관이라고 했는데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라고 많이 부른다.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을 '영국'으로 번역하면 되는데 '그레이트(great)'를 의식해서 대영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래서 꼭 '대'자를 붙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대영'이라는 이름에서는 19세기에 전 지구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영국 제국주의가 연상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왠지 '영국박물관'이라고 하려니 세계 최대 박물관이 '영국' 관련 유물들만 전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색하다.

그리스 이오니아식 기둥이 장대하다.
▲ 대영박물관 입구 그리스 이오니아식 기둥이 장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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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그리스 이오니아식 기둥... 입장료는 무료

눈앞에 그리스 이오니아식 기둥이 웅장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그리스 등 고대 유물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대영박물관답게 입구가 그리스 신전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44개나 된다는 이오니아 기둥들이 일대 장관이다.

전세계에서 약탈한 문화재들이 많기 때문인지 입장료는 무료이다. 웅장한 기둥 사이로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시원스런 메인 홀이 나온다. 전에 봤던 대영박물관과는 달리 박물관 1층 입구에서부터 커다란 홀이 여행자를 반긴다.

메인 홀 천정에는 그물망 철구조로 이어진 유리 지붕이 하늘을 덮듯이 자리 잡고 있다. 고전적인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는 철골과 유리 구조의 현대 디자인이 상큼하기만 하다. 박물관 내부가 너무 넓어서 어디부터 봐야 할지 엄두가 안 나지만 메인 홀의 왼쪽 방향부터 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물망 철구조와 유리 지붕이 고대 유물들과 잘 어울린다.
▲ 대영박물관 중앙홀 그물망 철구조와 유리 지붕이 고대 유물들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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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고 가장 보고 싶어하는 곳은 이집트 관련 전시관들이다. 이집트에서 발굴하여 제국주의의 힘으로 이동시킨 유물들이 눈 앞에 가득하다. 장물과도 같은 그 유물들이 화려한 향연을 펼치고 있다. 이 화려한 유물을 마음대로 사진 촬영할 수 있게 한 배려도 약탈한 유물에 대한 비난을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장 가 보고 싶었던 곳, 앗시리아관 입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반인반수의 신성한 동물이 입구 양쪽에 사람의 눈길을 압도하며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동물, 라마수(Lamassu)는 너무나도 긴 수염을 기른 인간의 머리에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소의 몸체를 하고 있다. 라마수는 인간의 지혜와 독수리의 용맹, 소의 부지런함을 이상으로 한 상상 속의 동물이다.

라마수가 악과 싸우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 앗시리아관 입구 라마수가 악과 싸우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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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수 머리에 뿔과 매듭이 달린 모자같이 생긴 관은 오직 신을 나타내는 조각에만 장식되는 상징물이다. 라마수 뒤로는 한 신상이 벽면에서 앞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이 신상은  물통과 함께 마법의 방울 열매를 들고 있다. 라마수는 대영박물관 앗시리아관 앞에서 지금도 사악한 무리와 불운을 몰아내고 있다.

라마수는 왕궁의 성문과 궁전, 신전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또한 거대한 라마수는 앗시리아의 지배자인 왕을 상징한다. 대영박물관 앗시리아관 입구를 견고하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라마수는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Sargon Ⅱ)가 살던 코르사바드(Khorsabad) 궁전의 성문이었다. 현재 박물관 안의 조명 아래에 자리 잡은 라마수는 마치 테마파크 입구의 괴물같이 보이지만 초원 지대의 성벽을 막고 있었을 라마수는 당시 성문을 드나들던 사람들에게 무서움과 위압감을 주었을 것이다.

라마수를 찬찬히 보고 있으니 무언가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것 같다. 라마수가 멈춰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얼핏 보면 정적인 작품이지만 다시 보면 동적이기에 라마수는 볼수록 모습이 묘하다. 자세히 보니 라마수의 다리가 5개나 된다. 라마수를 측면에서 보면 다리 4개가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라마수를 앞에서 보면 앞 다리 2개는 다리에 힘을 주듯이 힘 있게 나란히 버티고 서 있다. 앞 모습은 정지상태인 것이다.

라마수의 걸어가는 다리는 무릎이 구부려지지 않고 펴져 있어서 부자연스럽다. 라마수의 옆모습은 걸어간다기보다 걸어가다가 순간 멈춘 듯한 동작이다. 몸은 움직이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고 땅에 붙어있는 듯한 모습이다. 왕을 상징하는 라마수는 성문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일까? 마치 라마수는 걷다가 신의 명령을 받고 잠시 멈춘 것만 같다. 라마수는 당시 성문을 통과한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는 모습으로 조각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라마수가 악과 싸우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시 라마수를 만든 사람들이 라마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왜 라마수가 이런 동작을 취하고 있는지, 라마수 다리가 원래 5개였는지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앗시리아의 역사를 담은 벽화가 서사시같이 이어진다.
▲ 앗시리아 왕궁 벽화 앗시리아의 역사를 담은 벽화가 서사시같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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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게 새겨진 부조들 전시, 놀라워

성문 뒤에는 앗시리아의 치열했던 전투장면이 그려진 부조벽화가 벽면 가득히 전시되고 있다. 이 벽화들은 왕궁터의 궁전 복도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부조들이었다. 앗시리아의 궁전 터에서 발굴된 이 고대의 전투장면들은 유목민이었던 앗시리아 사람들이 주변을 정복하고 침입해 나가던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벽화 속에서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왕은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하고 있다. 전투 장면이 많이 그려진 것은 앗시리아인들이 풍요로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웃의 땅을 공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부조를 보면서 계속 놀랍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석고에 섬세하게 새겨진 부조들을 모두 뜯어와서 박물관 안에 그대로 전시해놨다는 점이 놀라운 것이다. 19세기에 이 벽화들을 발굴해서 그대로 바다 건너 이송을 하고 박물관 안에 정교하게 넣어 놓은 영국인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벽화를 보고 있으면 앗시리아 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며 살았고 전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는지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롭다. 고대의 전투장면은 다양한 슬라이드 화면이 지나가듯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나는 신영이와 전투장면마다 멈춰 서서 각 벽화가 어떤 전투장면을 그리고 있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전쟁 속에서 성장한 앗시리아인들은 아주 호전적이었다. 그들의 호전성은 성경에도 잔인하고 돌풍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현대적 국가의 군사편제와 유사한 편제를 가지고 있던 앗시리아군은 앗시리아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중추였다.

말을 탄 궁수들이 속도감있게 돌진하고 있다.
▲ 앗시리아군의 속도전 말을 탄 궁수들이 속도감있게 돌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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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앗시리아군이 속도전을 즐겼던 사실이 벽화 곳곳에서 보인다. 여러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위에 오른 군사가 활을 쏘는 모습은 벽화 속에서도 튀어나올 듯한 속도를 느끼게 한다. 앗시리아에 저항하는 적군들은 서서 활을 쏘고 있지만 그들의 속도에 밀려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다.

기가 막히는 장면은 앗시리아의 군사적 민첩성을 보여주는 잠수부대 벽화이다. 벌거벗은 채로 물밑으로 침투하는 앗시리아 군인들이 헤엄을 치며 전진하고 있다. 그런데 수염이 덥수룩한 앗시리아 군인들이 무언가를 가슴에 안고 헤엄을 치고 있다. 가슴에 안은 것은 다름 아니라 소, 돼지, 양의 내장으로 만든 공기통이다. 동물의 내장에 공기를 넣어 마치 UDT 보트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앗시리아군이 물속에서 동물 내장 공기통을 타고 접근하고 있다.
▲ 앗시리아군의 물속 공격 앗시리아군이 물속에서 동물 내장 공기통을 타고 접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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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내장 보트는 물위에 뜨기 때문에 이 벽화는 성을 둘러싼 해자의 물길 속에서 살며시 야습을 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잠수병들 아래로는 병사들이 배 위에 전차를 싣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지금 우리나라도 UDT가 최고의 정예부대이듯이 이들도 앗시리아군의 최정예 병사들이었을 것이다.

전차 같은 공성무기의 공격에 성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 성벽을 부수는 공성무기 전차 같은 공성무기의 공격에 성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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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앞까지 전진한 앗시리아군은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 어떤 문자로 표현한 책보다도 벽화 한 장이 전쟁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쟁에 능한 앗시리아 군은 탱크 같이 외부가 둘러싸이고 바퀴가 달린 공성무기를 성벽 앞까지 밀고 들어가고 있다. 공성무기인 전차에서 앞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봉이 성벽을 부수고 있고 이 봉에 성벽의 돌이 무너지고 있다. 전차 내부에는 많은 앗시리아 군이나 노예들이 들어 있어서 전차를 움직였을 것이다. 이러한 효과적인 무기들을 그들은 이미 기원 전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앗시리아 방의 부조에서 가장 압권인 작품은 따로 있다. 앗시리아 방의 가장 많은 부분에 새겨진 왕의 사자사냥 장면은 관람객을 압도한다. 나는 가족과 함께 다양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사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이 명작들은 당시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고 거대했다는 니네베(Nineveh) 궁전에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왕의 용맹을 보여주기 위해 장식된 벽화이다. 출토된 시기가 후기 앗시리아 시기인 기원전 645년경으로 추정되니 우리나라로 치면 고조선으로 비정될 만큼 옛날 이야기다.

화살에 맞아 다리가 마비된 암사자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 죽어가는 암사자 화살에 맞아 다리가 마비된 암사자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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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자사냥 작품 중 척추에 화살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된 암사자의 모습이 가장 명품같은 명작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눈으로 경험하지 않고는 묘사할 수 없는 명장면이다. 앗시리아에서 사자는 우리나라의 호랑이처럼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앗시리아 부족을 공격하기도 하는 사자를 사냥하는 행사를 통해 용맹함을 과시함으로써 왕권 강화를 꾀했던 것이다.

석고 위에 새겨놓은 서사시는 어제 새긴 듯이 훼손 없이 보존되어 있다. 앗시리아 군의 화려한 갑옷 뿐만 아니라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팔의 근육도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살벌한 사자의 아가리와 포효하는 듯한 이빨, 사자 털의 갈기가 섬세하게 움직이는 듯 하다. 앗시리아의 왕이 숫사자의 목을 움켜 잡고 칼로 배를 찌르는 모습은 과장이다 싶지만 보는 관람객을 압도한다.

왕이 한 손으로는 사자의 목을 쥐고 한 손으로는 칼로 사자를 찌르고 있다.
▲ 왕의 사자사냥 왕이 한 손으로는 사자의 목을 쥐고 한 손으로는 칼로 사자를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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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직전의 숫사자는 몹시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그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다. 인간들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는데 유독 사자는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숫사자는 머리에 화살 한 발을 맞은 상태다. 머리에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자를 목 조르며 왕이 쇼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백성들은 왕이 사자를 진짜 사냥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이 벽화를 보면서 왕의 권력과 왕의 용맹함에 대해 세뇌되었을 것이다.

나는 2천 6백년 전의 오래된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그 오래된 영화는 단순하지만 단순할수록 눈에 와 닿는 느낌은 명쾌했다. 굳이 글로 나타내지 않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앗시리아의 왕이 무엇을 했는지가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왕은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 잡고 다양한 전법으로 적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있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도 살아남은 벽화이기에 화려한 동영상보다도 훨씬 울림이 강하다.

앗시리아관의 뒤로는 이집트관이 이어지고 있다. 이집트관에도 앗시리아관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나는 이 고대의 유물들이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지 다 알지 못한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파라오들을 슬쩍 보고 지나갔다. 나는 내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던 석조각 앞에서만 멈춰 섰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의 속도로 이집트관을 답사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80편이 있습니다.



태그:#영국여행, #대영박물관, #영국박물관, #앗시리아관, #사자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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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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