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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교과서는 헬렌 켈러의 장애를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할 문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역경과 시련'으로 묘사하고 있다.
▲ 중1 도덕 교과서에 소개된 헬렌켈러 이야기 도덕 교과서는 헬렌 켈러의 장애를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할 문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역경과 시련'으로 묘사하고 있다.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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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한국장애인방송국을 방문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관련 영상을 만드는데, 사회과 교사로서 자문을 해달란 요청 때문이었다. 방송국에서 한 회의엔 도덕 교사와 특수교육 교사도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각 교과에서 장애인 문제와 그 해결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얘기 나누며 평소 관심 두지 못한 도덕 교과서들을 뒤적이다 깜짝 놀랐다. 중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에 실린 헬렌 켈러 이야기 때문이었다.

헬렌 켈러는 혼자 힘으로 글을 익히고 대학에 입학했을까?

'희망과 의지의 헬렌 켈러'란 제목의 소단원은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하나는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는 첫문장에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가진 것에 만족하자는 교훈이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제목 그대로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고 노력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과서는 헬렌 켈러가 말과 글을 배우고 나아가 시각과 청각을 잃은 사람 중 세계 최초로 대학을 졸업한 것과 관련해 "그녀가 그런 열정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인 생각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었다.

물론 헬렌 켈러가 대학을 졸업하고 책을 쓰는 '성과'를 이룬 데에 있어 그녀의 개인적 노력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는 데에 집착하지 않고 희망과 의지로 끝없이 노력한 점을 본받을 점이 맞다. 하지만 그 모든 성과가 과연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걸까?

설리반 선생님 없이 헬렌 켈러가 'water'를 시작으로 말을 배우고 글을 익힐 수 있었을까? 하버드 병설대학인 래드클리프가 장애 학생에 대한 입학 허가라는(당시로서는 상당히 과감한)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헬렌 켈러가 학위를 취득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살짝 아쉬운 도덕 교과서

도덕 교과서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개인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헬렌 켈러가 성장하고 성취하는 모든 과정에는 교사와 교육기관과 지역사회가 있었다. 그렇다면 헬렌 컬러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얻어야 할 교훈은 '장애를 가진 이에게는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은 제도적 장치와 특별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또는 '제도와 혜택은 시혜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라는 교훈도 있다.

도덕이라는 교과는 개인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학생 개개인이 꿈과 의지와 바른 정서를 갖도록 하는 것이 그 목표다. 그런 점에서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개인의 역경 극복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사회과 교사이기에 도덕 교과서 속 헬렌 켈러 이야기에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사회 교과는 개인 밖의 법과 제도에 관심이 많고, 개인적으로 접근한다 해도 개인이 어떤 권리를 지니고 그것이 어떻게 보장받아야 하는지에 주목하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공의 관점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21세기의 장애인의 문제는 개인을 넘은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이 같은 서술 방식엔 다소 미흡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헬렌 켈러가 여러 가지 교육적 도움을 받은 것은 당연한 권리 보장이었다고, 그 제도적 장치들 때문에 성인이 돼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장애인 겪는 어려움은 공동체가 함께 해결할 문제라고 적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만 정상인 대열에 합류

한편 도덕 교과서 속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자칫 학생들에게 '장애는 극복해야 할 역경이다.',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만이 가치 있다'는 식의 편견을 갖게 할 우려가 있어 보였다.

'장애=역경'이란 시각은 장애인을 비정상인으로 인식시킨다. 장애를 가졌다 해도 다소 불편할 뿐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역경으로 만드는 순간 무언가 특별한 노력을 해 정상인이 되어야 한다고 무언의 강요를 하는 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편견과 강요는 헬렌 켈러나 루즈벨트 대통령과 같이 비범한 인물들만 부각시킬 때 더욱 심각해진다. 일반인보다 더 뛰어난 장애인만 정상인의 대열에 합류시키고 그렇지 못한 장애인은 여전히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달 24일 개봉한 임태형 감독의 영화 <안녕!하세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각장애인 전문학교인 인천혜광학교의 실제 재학생들이다. 임감독은 실제 장애 학생 캐스팅의 목적이 "장애학생들의 있는 그대로를 보이고자 한 데 있다"고 밝혔다. '장애가 있어도 예쁘니까', '장애가 있어도 똑똑하니까'가 아니라, 그저 장애를 가진 이들도 조금 불편하고 조금 다를 뿐 우리와 다름없이 인간이기에 그 자체로 존엄하고, 눈이 안 보여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장애는 극복해야 할 역경만은 아니다.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두 눈이 보이고 두 귀가 들리는 이들이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그렇지 않은 이들을 비정상인으로, 불행한 이들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개개인의 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 교과서가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담아낼 때엔, 헬렌 켈러와 주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해 나갔는가 하는 부분에 주목해야 했던 것 아닐까? 또 행복이란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서로를 배려하는 가운데 맛볼 수 있는 것이란 점을 강조했어야 했던 것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교육희망>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헬렌 켈러, #장애인, #장애 문제, #도덕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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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였고, 로스쿨생이었으며, 현재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입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남매둥이의 '엄마'입니다. 모든 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를 위한 '교육혁명'을 꿈꿉니다. 그것을 위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씁니다. (제보는 쪽지나 yoolawfi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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