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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와 '김여사'는 만만한 상대만 골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비겁한 공명심의 결과다.
 '~녀'와 '김여사'는 만만한 상대만 골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비겁한 공명심의 결과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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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가혹한 공간이다. 우리 현실이 그렇듯 말이다. 현실 사회의 괴팍함이 인터넷까지 번지는 건 당연하다. 인터넷도 사회의 산물이고, 인터넷을 드나드는 사람 역시 현실 사회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에서 오가는 이야기로 한국사회를 진단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비록 한 사회를 온전히 비추는 전신거울은 될 수 없을 망정, 작은 '손거울'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다고 본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온 '~녀/김여사' 현상은 한국사회의 어떤 점을 보여주는 것일까? 일단 검색부터 해 본다. 구글에서 '김여사'를 검색하니 0.26초만에 1790만개가 뜬다.

검색 결과를 하나씩 열어본다(다른 일도 해야 하니, 다 볼 수는 없다). 말 함부로 하는 건 대개 여자고('막말녀'), 남에게 행패 부리는 것도 여자며('행패녀'), 아무데서나 담배를 빼 무는 것도 여자다('담배녀'). 이 갖가지 '녀'들은 운전석에 앉는 순간 '여사'가 되는데, 역주행과 불법 좌회전을 즐기며, 주로 학교 운동장이나 논두렁에 주차하는 습관이 있다.

검색 엔진으로 '김여사'를 입력해 얻은 사진들. 여성과 무관한 교통사고까지 포함되어 있다.
 검색 엔진으로 '김여사'를 입력해 얻은 사진들. 여성과 무관한 교통사고까지 포함되어 있다.
ⓒ 인터넷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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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장 손쉬운 설명은, 한국 여자들이 실제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여자들이 정말 그렇게 '막장'일까?

'김여사' 허구, 어떻게 만들어지나

일단 이 가설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반적 경험으로 보아, 한국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특별히 더 거칠고 뻔뻔하다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행'이 주로 여자들 차지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혹시나 앞의 가설에 여전히 미련을 갖는 사람이 있을까봐 말해 두건대, 통계적 사실은 '김여사 전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교통안전공단의 2010년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 남성이 여성보다 평균 5배 넘는 교통사고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운전면허 소지자 100명당 교통사고 발생건수를 봐도, 남성이 여성보다 3.3배나 높았다.

그렇다면 사고차량마다 '김여사'가 어른거리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음의 보도를 보자.

보도 1. 현금 수송차 '김여사'…가만히 있는 차를 왜?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현금 수송차를 들이받아서 1명이 숨졌습니다. 운전자는 50대 여성이었습니다. (SBS 뉴스 2012. 6. 21)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이다. 제목의 '김여사'부터 시작해, 이 짧은 보도는 운전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사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열흘 전, 더 큰 사고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매체인데도, 보도태도는 사뭇 달랐다.

보도2. 음주운전에 '일가족 참변'…가해 운전자 '만취'
오늘(11일) 새벽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에서 승용차 2대가 추돌해 일가족 4명이 모두 숨지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가해 차량의 운전자는 만취상태였습니다. (SBS 뉴스 2012. 6. 11)

여성이 낸 교통사고를 다룬 기사. '김여사'와 '중년여성'이라는 표현이 무려 8차례나 등장한다. 남성이 유발한 사고를 보도할 때는 성별을 드러내지 않거나 '~씨'로 통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이 낸 교통사고를 다룬 기사. '김여사'와 '중년여성'이라는 표현이 무려 8차례나 등장한다. 남성이 유발한 사고를 보도할 때는 성별을 드러내지 않거나 '~씨'로 통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동아일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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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족 네 명이 모두 사망한 대형 사고였고, 가해자는 음주운전을 하다 이 끔찍한 사고를 저질렀다. 그러나 제목에도, 본문에도 운전자의 성별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만취상태'였다는 사실만 언급될 뿐이다(가해 운전자는 남자였다).
두 보도는 아주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두 번째 보도가 사건을 외적 요인, '만취운전'이라는 외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반면, 첫번째 보도는 '여성성'이라는 내적 요인과 결부한다. 다시 말해, '여성성' 자체를 사고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한국 언론 거의 모두가 이런 식의 보도 태도를 보인다.

남자는 실수로, 여자는 열등해서?

행동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음으로써 고정관념과 차별을 합리화하는 '귀인편향'적 태도는 사회 곳곳에 널려 있다. 누군가 죄를 저지르면 당사자 개인을 비난하다가도, 그가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행위를 '지역적 특성'과 결부짓는 못된 습성이 그렇다. 같은 범죄도 다른 지역 출신이 일으키면 '지역연관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마치 특정 지역 사람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김여사 신화'도 같은 방식으로 생산되고 유포된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운전자가 남성이면 과실이나 고장 등 원인을 찾지만, 여성이면 원인을 밝히기에 앞서 여성이라는 사실부터 조롱하고 보는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이 유발하는 사고 횟수는 훨씬 적어도 눈에 쉽게 드러나게 되고, 여성은 사고 때마다 정체성까지 공격 받게 된다.

이런 식의 고정관념이 강화되면 사고가 나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김여사'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언론보도와 인터넷에 게시된 글들을 보면, 운전자 성별을 알 수 없는 실수나 사고조차 '김여사'로 의미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남자들이 교통사고를 낼 때마다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오면 어떨까?

음주운전에 '일가족 참변'…가해 운전자 또 '남자'
오늘 새벽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에서 승용차 2대가 추돌해 일가족 4명이 모두 숨지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역시나, 가해 차량의 운전자는 남자였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양반이다. 앵커가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요?'라고 묻고, 전문가들이 나와 '남성의 두뇌구조'를 들먹인다고 생각해 보라. 이게 정확히 한국 여성들이 처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다.

강자는 숨기고, 약자는 드러내고

한 사회의 지배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름 자체가 없는 경우도 흔하다. 기호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무표/유표(un/markeness)'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남자를 일컫는 인칭 대명사 '그'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지칭하지만, '그녀'는 오직 여자만을 지칭한다. 남자는 그냥 가수고, 작가고, 경찰이지만, 여자는 '여가수'에, '여류 소설가'에, '여경'이다. 사회는 약자와 소수자의 정체를 꼭 집어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사건과 상관 없고, 운전자 성별이 드러나지도 않은 사건까지 '김여사'로 의미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사진은 현금수송차량 보도 하단에 링크된 해외화보로, 프랑스 지하철 입구로 진입한 차량에 "또 '김여사' 작품?"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
 사건과 상관 없고, 운전자 성별이 드러나지도 않은 사건까지 '김여사'로 의미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사진은 현금수송차량 보도 하단에 링크된 해외화보로, 프랑스 지하철 입구로 진입한 차량에 "또 '김여사' 작품?"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
ⓒ 동아일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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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 담론이 부당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김여사'에 대응할 남자 이름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호칭 자체가 마땅찮다. 간혹 '김사장'이나 '김여사 남편'이 쓰이지만, 이 명칭들은 여성의 약자 지위를 강조할 뿐이다.

'김사장'? 사장은 남자여야 한단 말인가? '김여사 남편'? '여사'는 '남편 둔 여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김여사 남편'이라는 조어는 '남편 둔 김씨 여자의 남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 '여사'라는 말 자체가 의존적 이름으로, 남성은 이에 상응하는 호칭이 없다. 남자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까.

언어가 얼마나 교묘하고 권력자 편을 드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언어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고, 권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여성 운전자는 맨몸이 드러나는 '유표'인 반면, 남성 운전자는 베일 뒤에 감춰진 '무표'인 것이다.

한국사회를 들끓게 한 온갖 '~녀'들도 같은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물론 약자를 바라보는 편향적 시선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과 주류 미디어가 '못된 여자들' 이야기로 가득한 데는 한국 특유의 이유도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매우 비겁하다는 것이다.

만만한 상대만 건드리는 비겁함

인터넷에 남자들보다 '못된 여자들' 사진과 비디오가 넘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만만한 상대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현실 속에서 아무리 행패를 부려도, 이들에게는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여자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카메라의 먹잇감이 된다.

이처럼 만만한 상대를 골라 시답잖은 공명심을 느껴보려는 욕구가 '~녀'와 '김여사' 현상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악녀' 사진을 찍어 올리며 정의의 화신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할지 모르지만, 그런 일을 누가 못 하겠는가. 이런 사진이 보여주는 건 찍은 사람의 정의감이 아니라, 휴대폰 배터리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여자 앞에서는 거리낌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 다수가 (나처럼) 험상궂은 사내 앞에서는 수줍게 고개를 숙일 것이다.

이제 카메라 없는 사람이 없고, 이 카메라는 붐비는 광장에서 으슥한 거리까지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녀/김여사'도 이 카메라에 의해 탄생했고, 이 시간에도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아르고스의 눈'은 정작 '정의'가 구현되어야 할 순간에는 무기력하기 그지 없다.

지난 2월, 여중생이 지하철 안에서 오랜 시간 성추행 당한 사건이 있었다(어디 한 번 뿐이겠는가). 퇴근 시간이어서 수많은 승객이 타고 있었다. 당시 승객 가운데 성추행 사실을 눈치 챈 이도 있었으나, 소녀를 돕기는커녕, 그 흔한 휴대폰 카메라 하나 꺼내드는 이가 없었다. 상대가 건장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건장한 청년'만 카메라를 피해가는 건 아니다. 지난 5월에는 버스 안에서 노인이 여대생에게 심각한 폭언을 한 사건이 있었다. 오직 피해자 휴대폰에만 제대로 작동했던 모양이다. 폭언을 참다 못한 여대생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가해자는 "나도 너 바지 벗겨서 찍어도 되냐"며 협박했다. 경찰은 이 사진을 증거로 가해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자동차 불법 좌회전으로 오토바이가 넘어진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이 '좌회전 김여사'와 '뺑소니 김여사'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나중에 운전자가 남자였고, 사고에 대한 적절한 조치도 취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많은 언론이 정정보도조차 내지 않았다.
 자동차 불법 좌회전으로 오토바이가 넘어진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이 '좌회전 김여사'와 '뺑소니 김여사'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나중에 운전자가 남자였고, 사고에 대한 적절한 조치도 취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많은 언론이 정정보도조차 내지 않았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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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약한 상상이지만, 가해자-피해자 상황이 뒤바뀌었다면 어땠을까. 버스에서 여대생이 노인에게 폭언을 했다면 말이다. '폭언'은 고사하고 반말만 했어도 승객의 카메라는 일제히 터졌을 것이다. 그리고 '누리꾼'들은 낄낄거리며 이 '반말녀' 사진을 열심히 퍼 날랐을 것이다.

패배주의에 찌든 사회의 값싼 공명심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패배의식 때문이다. 공명심은 느끼고 싶지만, 정말 중요한 사회문제를 바로잡을 용기가 없을 때 하는 짓이 '만만한 상대 물고 늘어지기'니 말이다. 이는 한국 주류 언론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일부 누리꾼이 퍼 나른 '~녀/김여사'를 주류언론이 열심히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안다. 모두가 모두에게 공손하고, 좌회전해야 할 때 좌회전하고, 주차할 곳에 주차하면 더 안락한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를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는 '욕설녀'나 '담배녀'도, 심지어 '대변녀'도 아니다.

초등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건물에서 뛰어 내리고, 고등학생이 음식배달 오토바이를 몰다 차 바퀴 밑으로 들어가고, 대학생이 등록금을 보태기 위해 술집에 나가고, 야근을 밥 먹듯 하던 회사에서 직업병으로 목숨을 잃어도 산재처리를 받을 수 없고, 노부부가 생활고로 번개탄을 피우고 잠드는 사회다.

비열한 공명심은 이걸로 족하다. '김여사' 조롱은 충분히 봤으니, 이제 더 중요한 문제에 카메라를 들이대라. 그럴 자신이 없으면 카메라 끄고 게임이나 하는 게 낫다.


태그:#김여사, #교통사고, #패배주의, #공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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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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