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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리 성암의 돌탑이 가지는 의미

고성리 성암 돌탑
 고성리 성암 돌탑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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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리 성암 방향으로 길을 잡은 우리는 상봉산을 왼쪽으로, 도명골을 오른쪽으로 끼고 걸어간다. 고개를 어느 정도 내려가니 왼쪽으로 커다란 돌탑이 4기 보인다.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쌓았는데, 동네 성황당 수준이 아니다. 예술성도 뛰어나고 종교적인 신성함도 느껴진다. 입구에는 전화로 허락을 받고 들어가라는 경고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간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출입을 허락받는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조금은 퉁명스럽다. 이번에는 고성리 이장(김백회) 전화번호를 찾아 탑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도 역시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고성리에 사는 천연홍씨와 돌탑을 쌓은 사람이 교류하고 있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나는 다시 천연홍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전화를 받아 바꿔준다. 나는 그녀에게 먼저 고성리 성암의 돌탑을 누가 쌓았는지 물어본다.

그러자 김덕식씨, 자신, 김도사가 함께 쌓았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20년 전 김덕식씨가 정신이상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병을 치료하려면 탑을 쌓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곳에 탑을 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연홍씨는 나라를 위해서, 동네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탑을 쌓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탑은 개인적인 이해와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비는 종교적인 기원이 합쳐져 쌓아졌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김덕식씨의 기숭과 천연홍씨의 정성이 담긴 돌탑
 김덕식씨의 기숭과 천연홍씨의 정성이 담긴 돌탑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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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농협과 신협에 천연홍씨 아들인 손문덕씨 이름으로 2,000만원을 대출받아 탑을 쌓았는데, 돈이 부족해서 좀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 바람에 탑의 관리권이 두세 번 넘어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에는 탑을 쌓는데 관여했던 포클레인 기사에게로, 다음에는 삼성화재 보험설계사인 지용대씨에게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탑의 소유권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럼 김덕식씨는 어떤 사람이냐고 천연홍씨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조경업자라고 말한다. 그는 탑을 쌓는 과정에서 병이 다 나았고, 그 후에도 보은군 회인면 쌍암리 등에 돌탑을 더 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천연홍씨는 이곳 고성리의 주산 도명산에 돌탑을 쌓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도명산과 문화유산(미륵산성)과 돌탑이 어우러져 더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고성리 이장 김백회씨에 의하면 천연홍씨에게는 신기(神氣)가 좀 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도 도명산 기슭에 돌탑을 세우는 원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돌탑을 쌓을 터에 이르는 길을 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돈이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덕식씨도 가끔 천연홍씨를 찾아 도명산에 돌탑을 쌓는 문제에 대해 상의한다고 한다. 고성리 성암의 돌탑은 SBS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성암 마을에서 만난 양봉업자와 서낭당

벌집을 꺼내는 양봉업자
 벌집을 꺼내는 양봉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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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에서 다시 20분쯤 걸어 내려가니 길가로 승암 노인회관이 나온다. 성암(聖巖)을 이곳 사람들은 승암이라 부른다. 성을 승으로 발음하는 것은 충청도식 어법이다. 노인회관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이고, 그 앞 공터에 꿀을 뜨는 양봉업자들만 작업을 하고 있다. 대화를 해 보니 강원도 사람인데 꿀을 채취하기 위해 이곳에서 얼마동안 머문다는 것이다.

그들은 얼굴에 보호막을 쓰고 벌통에서 벌집을 꺼낸다. 그리고는 그것을 모아 천막 안으로 보낸다. 천막 안에는 원심분리기를 작동시키는 사람이 있다. 벌집을 원심분리기 안에 8개씩 넣고 돌린다. 그러자 꿀이 아래로 모인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큰 통에 담는다. 이 꿀은 콘테이너 째로 조합에 납품되기도 하고 작은 병에 넣어져 소매로 팔리기도 한다.

성암 마을 서낭당
 성암 마을 서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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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해는 가물어 꿀의 품질이 좋다고 한다. 가뭄 때문에 농사짓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많았는데, 양봉업자들은 오히려 여건이 좋았던 것이다. 꿀의 가격은 소매로 1병에 4만 원 정도 한단다. 그런데 최근 농사에 농약을 많이 쓰는 바람에 양봉이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농약을 피해 계속해서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승암 마을회관 건너편 물가 쪽으로는 성황당이 있다. 이곳에는 느티나무, 돌탑, 선돌, 장승이 서 있다. 돌탑은 자연석을 이용해 쌓았고, 꼭대기에 거북 모양의 윗돌을 올려놓았다.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 날 이곳에서 장군제가 열린다고 한다. 여기서 장군은 장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곳 승암은 산신제와 장군제가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마을이다. 

햇터 마을 입구 돌에 새겨진 의미심장한 시구

성암교와 달천
 성암교와 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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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암 서낭당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우리는 오른쪽 길을 택해 화양동 방향으로 간다. 길은 또 다시 달천을 따라 하류로 이어진다. 달천은 폭이 그렇게 넓지는 않고 생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선지 낚시를 하는 사람들 모습도 가끔 보인다. 우리는 길을 따라 화양동 방향으로 나간다.

아직 고성리다. 그런데 햇터 마을 입구에 시구 같기도 하고 경구 같기도 한 문장을 새긴 표석이 하나 서 있다. 땅을 사랑하고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라는 글이다. 그러면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내용이다. 2009년 5월 7일에 세워졌다.

햇터 마을 표지석
 햇터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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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눈물로 흙을 적셔라.
그러면 네 눈물이
대지의 열매를 맺어 줄 것이다.
이 땅을 언제까지라도 사랑하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 열광과 환희를 맛보아라.

이 글을 선택한 사람은 햇터 마을을 운영하는 반창현 씨다. 그는 청주에서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하다 귀농해 유기농업을 추구하는 5년차 농부다. 위의 시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언집에 나오는 것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농부의 바지런한 발걸음이, 하늘과 자연이 주는 결실에 더하는 작은 보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늘이 마련하고 자연이 가름하는 농사일에 아직 자신도 만만함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의 순리와 하늘의 가르침, 농산물의 소중한 가치,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며, 모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자연주의자고 낙천주의자고 이상주의자다.

홍익대학교 조형대 교수를 지낸 고승관과의 만남

고승관 화백과 시공에 대한 대담을 나누는 대원들
 고승관 화백과 시공에 대한 대담을 나누는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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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터 마을을 지나 달천을 따라 내려가면 하천이 크게 한번 굽이친다. 그렇게 굽어 도는 안쪽에 도원리가 위치하고 있다. 도원리의 대표적인 마을은 원도원, 어룡, 강정이다. 우리는 원도원 마을로 들어간다. 이곳에 홍익대학교 조형대 교수를 지낸 고승관 화백이 살고 있다. 그는 도원리와 무릉리 피거산(避居山)에 300기 이상 톨탑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500기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탑을 쌓는 목적이 일종의 수행과 깨달음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선생의 집으로 들어가 대화를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먼저 '선생님 예술의 주제 또는 관심분야가 뭡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침없이 '시간과 공간(Time & Space)이야'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숫자를 통해 시간개념을 설명한다. 억, 조, 경을 넘자 처음 들어본 개념들이 나온다. 불교용어를 동원하는데, 이해가 쉽지 않다. 그는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타임캡슐 작업을 한다고 한다.

한성은행 발상지 표지석
 한성은행 발상지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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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은 분명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시간이나 시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후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는 탑을 쌓는다고도 말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의미 있는 작품으로 한성은행 발상지 표지석을 든다. 1997년 2월 27일 한성은행 개업 100주년을 기념해 조흥은행이 의뢰했는데, 이곳에도 시간과 공간을 담았다. 위에는 주판을, 아래에는 금고를 만들어 표지석 위에 얹었다.

주판과 금고는 과거 은행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과거의 유물로 변해가는 물건이다. 이를 통해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을 표현했다. 또 한성은행은 조흥은행이 되었고, 조흥은행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고화백은 나이가 70이 넘어 이제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홍익대학교에 넘길 거라고 한다. 건강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는 아직도 술과 담배를 즐긴다. 그리고 시공을 초월해 그렇게 살다가려고 한다.

고승관 화백의 집
 고승관 화백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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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오며 우리는 시공을 상징하는 그의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털이 다 빠진 닭이 한 마리 머리를 곧추 세우고 서 있다. 그 작품도 역시 시공이다. 우리는 밖에 나와 그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그도 역시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창틀을 빼고는 담쟁이로 다 덮었다. 그는 이렇게 자연과 함께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별 수 없이 외로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태그:#고겅리 돌탑, #성암 서낭당, #햇터 마을, #고승관, #시간&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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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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