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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경기도 화성에서 미나리 농장을 운영하는 노아무개씨는 지난 7월 19일 낯선 이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부산 지역에서 외국인 노동자 지원활동을 한다"고 소개한 여성은 노씨가 고용한 캄보디아 노동자 뜨엄 멍(26)의 신분증과 통장을 당사자에게 돌려 달라고 말했다. 또한 뜨엄 멍의 휴일 외출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중한 말투긴 했지만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 여성의 주문에 노씨는 기분이 나빴다.

노씨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의 정체가 '브로커'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해 고용했던 베트남 노동자들도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일을 잘하다가 갑자기 형이라고 찾아온 낯선 사람을 만난 뒤 일하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단다. 결국 노씨는 보증금을 돌려주고 차표까지 끊어준 뒤 농장에서 내보냈다. 일손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전화를 끊고 노씨는 뜨엄 멍에게 어떤 경위로 이 여성의 전화번호를 알게 됐는지 물었다. 뜨엄 멍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노씨는 그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려 했다. 이에 뜨엄 멍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주변의 돌을 주워들고는 자신의 이마를 찧으면서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노씨는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 112에 "외국인 노동자가 브로커의 사주를 받고 도망가기 위해 자해를 한다"고 신고했다.

[장면 2]

김소령(34)씨는 지난 7월 18일께 경기도 화성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노동자 뜨엄 멍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김소령씨는 부산에서 외국인 노동자 지원 활동단체 '(사)이주민과 함께'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산 지역 밖에서도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곧잘 김소령씨에게 노동환경에 대한 상담을 청했다. 김소령씨의 능숙한 캄보디아어 실력 덕분에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들과의 신뢰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이다.

뜨엄 멍씨는 김소령씨에게 자신이 일하는 미나리 농장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털어놨다. 뜨엄 멍씨는 오전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고, 격주 토요일에 쉰다고 했다. 아침식사 8분, 점심식사 20분, 오후 휴식 10분으로 채 1시간이 되지 않는 휴식시간에 매월 320시간 가까이 일했다. 월급은 105만 원으로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쳤다. 무엇보다 뜨엄 멍씨는 지난 3월 한국에서 일을 시작한 뒤 5개월 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며 외출을 희망했다. 또한 그동안 뜨엄 멍씨가 사업주에게 통장과 여권 등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면 사업주는 뜨엄 멍씨의 휴대전화를 압수하겠다며 겁을 줬다고 말했다.

뜨엄 멍씨의 작업 환경을 전해 들은 김소령씨는 다음 날(7월 19일) 오후 6시께 뜨엄 멍씨를 고용한 사업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소령씨는 사업주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뜨엄 멍씨와의 통화내용을 전하며, 뜨엄 멍씨에게 통장과 신분증을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또한 뜨엄 멍씨가 쉬는 날 외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도 정중하게 요청했다.

김소령씨의 전화를 받은 사업주는 "당신 누구냐? 용역업체 직원이냐?"라며 경계심을 보였다고 한다. 김소령씨가 다시금 신분과 소속단체, 그리고 뜨엄 멍씨에게 통역을 부탁받은 경위 등을 전했지만, 사업주는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일을 할 수 없다"며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5분여의 짧은 통화를 마칠 무렵 수화기 너머로 뜨엄 멍씨에게 향하는 사업주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렸다.

뜨엄 멍씨와 다시 통화가 이뤄졌을 때, 뜨엄 멍씨는 "사업주가 내 휴대전화를 빼앗으려고 해 이에 저항하다가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사업주가 이마 세 곳이나 찢어지질 정도로 뜨엄 멍씨를 폭행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이야기. 뜨엄 멍씨의 다급한 목소리에 김소령씨는 안산지역에서 외국인 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에게 뜨엄 멍씨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캄보디아 노동자 뜨엄 멍씨가 사업주의 폭행으로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다. 해당 사업주는 뜨엄 멍씨가 사업장을 이탈하기 위해 자해를 했다고 주장했다.
▲ 피흘리는 외국인 노동자 캄보디아 노동자 뜨엄 멍씨가 사업주의 폭행으로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다. 해당 사업주는 뜨엄 멍씨가 사업장을 이탈하기 위해 자해를 했다고 주장했다.
ⓒ 뜨엄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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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령씨의 부탁으로 급히 화성경찰서 남양지구대를 찾은 김이찬 대표는 뜨엄 멍씨의 상태를 살피고 진술서를 확인했다. 진술서에는 사업주의 일방적 진술만 있었다. 김이찬 대표는 경찰관들에게 "조사 과정에 뜨엄 멍의 진술이 빠졌다"고 항의했다. 결국 '브로커의 유혹에 의해 사업장을 이탈하려 하고, 이를 저지하는 노씨 앞에서 뜨엄 멍이 자해를 했다'는 내용의 진술서는 폐기됐다. 함께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천 라엠씨도 "뜨엄 멍이 노씨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하면서 노씨는 폭행혐의로 입건됐다.
   
노씨는 "내 아이들의 이름을 걸고 뜨엄 멍씨를 폭행한 사실이 없다"고 완강하게 부인했다. 뜨엄 멍씨는 김이찬 대표의 도움으로 지난 7월 30일 수원고용 센터에 사업장 변경 신청과 함께 임금체불과 폭행, 강제노동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현재는 사업주가 두려워 경기도 화성의 숙소를 떠나 '지구인의 정류장'에 머물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지원 단체, 고용노동부의 표적 될 것"

7월 25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민주노총과 '이주노동자 공동행동' 이 고용노동부의 <외국인 노동자 사업장 변경 및 브로커 개입대책>에 대한 규탄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 고용노동부 규탄집회 7월 25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민주노총과 '이주노동자 공동행동' 이 고용노동부의 <외국인 노동자 사업장 변경 및 브로커 개입대책>에 대한 규탄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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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부터 시행되는 고용노동부의 '외국인 근로자 사업장 변경 개선 및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아래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에 따라 외국인 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 요건이 강화된다.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의 잦은 사업장 변경이 불법 브로커들의 개입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브로커 개연성이 높은 자(단체)를 예의주시하는 동시에 필요시 수사기관에 기획 수사 등의 협조 요청으로 강력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고용노동부와 지역고용센터에 브로커 피해사례를 직접 신고할 수 있는 핫라인을 설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 지원 단체들은 고용노동부의 브로커 방지대책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고용노동부의 브로커 개입 방지 대책에서 "브로커의 정의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나 활동가를 그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고 있다.

열악한 환경 개선 안 되면... "브로커(?) 계속 양산"

외국인 노동자 지원단체 김이찬 대표
▲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 외국인 노동자 지원단체 김이찬 대표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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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사업주에게 브로커로 오인 받은 김소령씨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면서도 "사업주로서 지켜야 할 책임에 대한 교육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인 만큼 그들도 피해자"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김소령씨는 고용노동부의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이) 통·번역 인력이 부족해 지역고용센터가 외국인 노동자들의 근로 감독이나 사업장 변경에 충분히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간의 역할을 막아버린다"고 꼬집었다.

뜨엄 멍씨의 경찰 조사를 도왔던 김이찬 대표 역시 이번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을 두고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며 "고용노동부가 사업주의 불법을 방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히려 김이찬 대표는 "고용센터 직원들이 한 달에 두세 차례 현장점검을 해 외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작업 환경과 사업주에 대한 감독을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사업장 변경 신청의 당사자인 뜨엄 멍씨는 김소령씨를 김씨의 세례명 '마르타'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김소령씨를 두고 "친절하고 좋은 NGO"라며 신뢰를 드러냈다. 또한 "김이찬 대표의 도움으로 폭력 없는 사업장에서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김이찬 대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변경하는 직접적 원인은 브로커의 개입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환경"이라며 "이를 해결하지 않는 한 나와 같은 '브로커(?)'는 끊임없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태그:#외국인 노동자, #고용노동부,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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