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골목은 기억박물관이다. 발전이 더딘 탓에,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탓에 오래된 풍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혹 골목을 거닐다 1960~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낡았다'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몇 백년 전 집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좀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가꾸면 골목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랫동안 골목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보물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 기자말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재현한 이발관 모습.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재현한 이발관 모습.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1895년 11월 15일, 임시내부대신 유길준 명의로 다음과 같은 고시가 내려졌다.

"단발은 위생적이고 집무상 편리하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행정개혁과 국민생활향상의 어견지에서 맨 먼저 그 수범을 신민 앞에 내려 보이셨다. 대한 국민인 자는 근엄히 이 성지를 받들지 않으면 안된다."

상투 튼 긴 머리를 자르라는 명령이었다. 15일 고종과 세자가 머리를 자르고, 다음날엔 정부 관료와 군인들이 머리를 잘랐다. 17일엔 전 국민 대상으로 단발령이 떨어졌다. 우리나라 이발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01년, 인사동에 국내 최초 이발관인 동흥이발소가 문을 연다. 당시 일본서 이발기를 사오고 전기안마기까지 뒀다고 하니 당시로써는 엄청난 시설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발 가격도 비쌌을 테니 이용자는 고위 관리나 많은 재산을 지닌 갑부들이 주 고객이었던 듯하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미용실은 1933년 러시아 여성들이 정동에 차린 게 최초다. 미용실 이용 또한 일반 여성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비쌌고, 대표적인 사치산업이었다.

이발소와 미용실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우스갯말로 '이발소는 엎드려서 머리를 감기고, 미용실은 누워서 머리를 감긴다'는 말이 있었지만, 둘은 주목적은 다르다.

이발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면도 등을 하기 위해 항상 난로에 들통을올려 물을 끓인다.
 이발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면도 등을 하기 위해 항상 난로에 들통을올려 물을 끓인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이발을 한다는 점은 공통점이었지만 이발소는 이발과 면도 등 '제모(除毛)'가 주목적이고 미용실은 염색이나 퍼머(Permanent Wave)처럼 미용이 주목적이다. 미용실에서는 화장이나 눈썹 정리 등도 한다. 주 목적이 다르니 자연스레 남성 손님은 이발소를, 여성 손님은 미용실을 이용했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며 일반인들도 이발소와 미용실을 드나들기 시작했지만, 잦은 일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잔뜩 길렀다가 명절에나 한 번씩 하는 연례행사 수준이었다. 그래도 그런 연례행사 날이 돌아오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발소를 찾았고, 도시의 신사들이 머리를 단장하는 데 재미를 붙이면서 이발소 숫자는 늘기 시작한다.

1975년 전국의 이발소는 2만9713개, 미용실은 1만6330개 정도로 집계된다. 당시 이발소는 남녀노소 가족 누구나 가는 곳이었고, 미용실은 일부 여성들만 가는 곳이었다. 당연히 미용실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장발문화가 퍼지기 시작한 것. 젊은층을 중심으로 머리를 기르는 게 유행이 된 것이다. 이들은 명절이 돼도 머리를 깎지 않았다. 또한 197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이발소 현상은 가족들을 이발소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와 비교해서 산뜻한 이미지로 몸단장을 하기 시작한 미용실에 남성 손님들이 찾기 시작한다.

이발소 숫자는 조금씩 하락세를 그리고, 미용실은 늘기 시작한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전국 이발소는 2만1739개, 미용실은 9만5194개로 그 격차가 크다. 서울시가 최근 '위기생계형 자영업 특별지원 사업'의 하나로 2011년 전통상업점포 27곳을 뽑아 경영기법을 전수했는데, 여기엔 대장간·주단집·전파사·손짜장집과 함께 이발관이 포함됐다.

오래된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명소, 이발소

이발소 내부. 손잡이가 있는 의자가 높이 조절이 가능하다.
 이발소 내부. 손잡이가 있는 의자가 높이 조절이 가능하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이제 여성들만큼 꾸미는 남성들을 보는 게 어렵지 않은 요즘, 남성들도 이발소 대신 미용실을 찾는다. 이발소를 찾는 사람들은 일부 중년남성들이나 노년층 정도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점점 더 줄어드는 추세다. 오래된 단골들만이 이발소를 찾지만, 동네가 재개발되고 이사를 하면서 동네를 떠나는 단골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

확실히 이발소는 쇠락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대로변에선 찾기 힘들어졌고, 골목 한 귀퉁이나 오래된 동네에서 발견된다.

재미있는 점은 지역에 따라서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이발소는 '이발관' '이용원' '이용소' 등으로 불리는데 경북과 강원도 쪽에서는 주로 '이용소'라고 쓴다. 북쪽에 가까운 강원도 쪽에선 '리발관'으로 쓰기도 한다. 충청도 이북이나 수도권에선 '이용원'이나 '이발관'이라고 많이 쓰니 이발소 명칭에도 지역색이 들어가는 셈이다.

손님이 줄어들고 경쟁에서 밀리다 보니 이발소는 시설이나 간판 등이 미용실에 비해 훨씬 낡은 느낌을 준다. 1970~80년대 한창 손님을 끌던 이발소 가운데 상당수가 문을 닫았고, 몇 군데가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경쟁에서 뒤처지며 사람들 외면을 받던 이발소가 이제 쉽게 보기 힘들어지면서 사람들 추억을 자극한다. 일부러 이발소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생기는가 하면 TV나 잡지에서도 오래된 이발소를 찾아 사연을 듣는다. 귀해졌기 때문에 받는 대접이며,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눈길을 받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잘 담근 김치는 오래될수록 더 맛있지만, 잘못 담근 김치는 오래되면 썩어버린다. 가게나 동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정도 없이 방치한 채 시간이 흐른다면 점점 더 낡게만 보이겠지만 계속 애정을 쏟는다면 사람 손길을 탄 나무마루처럼 반질반질 윤이 날 것이다. 여전히 멀리서 단골들이 찾아온다는 일부 이발소들이 그렇다.

단골들이 이발소를 찾는 이유, 바로 이겁니다

1927년 문을 연 성우이용원. 아직도 찾아오는 손님들 머리카락을 깎아준다.
 1927년 문을 연 성우이용원. 아직도 찾아오는 손님들 머리카락을 깎아준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대부분이 단골이고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상태로 머리카락을 깎아주는 곳이 바로 이들 이발소들이다. 때가 돼서 나타난 단골이 자리에 앉으면 이발사는 말없이 가위를 든다. 서로가 눈빛으로 교환한 건 '예전처럼'이다. 이사를 간 뒤에도 단골들이 일부러 여러 시간 걸려 차를 몰아 이발소를 찾는 건 머리를 깎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이발소가 살아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다 사라질 세상에서 그래도 없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는 그 무엇을 본다는 건 삶에 조그만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은 1927년 문을 연 성우이용원으로 서울 만리동에 있다. 그 외에도 도시 한 귀퉁이나 읍과 면 단위 지역에 가면 1960~70년대 문을 연 이발소가 아직까지 낡은 간판을 단 채 손님들을 맞이한다.


태그:#이발소, #이발관, #이용원, #이용소, #성우이용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