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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기억박물관이다. 발전이 더딘 탓에,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탓에 오래된 풍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혹 골목을 거닐다 1960,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낡았다'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몇백년 전 집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완전히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좀 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가꾸면 골목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랫동안 골목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보물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기자주>

사람을 먹여살렸던 우물. 하지만 우물엔 어둠의 느낌이 있었고, 공포영화 연출자들은 그 점을 적극 활용했다. 영화는 우물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 링2(2005, 미국)
 사람을 먹여살렸던 우물. 하지만 우물엔 어둠의 느낌이 있었고, 공포영화 연출자들은 그 점을 적극 활용했다. 영화는 우물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 링2(2005, 미국)
ⓒ 링2(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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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날 회사 회식을 마치고 저녁 늦게 자취방에 들어갔다. 함께 살던 세 명 가운데 한두 명은 있겠거니 생각하고 술을 몇 병 샀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날 따라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씻고서 한참 기다리다가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오겠지 생각하면서. TV를 켰다. 영화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좀 음산했다.

혼자서 보기에 좀 꺼림칙하다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서 쉽게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 볼수록 무서움이 더해져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만큼 보고 싶은 욕구는 더 커졌다. 귀신이 우물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귀신의 음산한 느낌은 우물과 잘 어울렸다. 우물은 깊고 어두웠다. 습기로 가득해 축축한 느낌이었다. 우물은 귀신이 살 만한 곳이었다. 뒤늦게 그 영화가 <링>이었고, 꽤 유명한 공포영화란 사실을 알았다. 그날 아침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밤새 불을 켜놓고 잠을 청해야 했다.

연출자의 의도이긴 했지만, 영화 속에서 우물은 귀신이 사는 곳으로 나온다. 극중 귀신으로 나오는 사다코가 우물에 던져져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우물에서 귀신을 떠올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우물은 죽음의 장소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물은 깊고 좁아서 떨어지면 빠져나오기 어려웠고, 은밀했기 때문에 죽음을 숨기기에 좋았다.

우물에 대한 오래된 공포, 가까워서 위험했던 애증의 관계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연을 안은 채 목숨을 던진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선 안 되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일 때 우물은 그들에게 이용됐다. 특히 전쟁이나 큰 재난이 벌어졌을 때 우물은 종종 집단 학살 장소로 둔갑한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1950년 대전형무소에서 집단처형이 벌어졌는데, 형무소 안에 있는 우물 두 군데에서만 시신 100여 구가 발견됐다. 1950년 10월 19일 북한군 포로들이 국군 헌병이 감시하는 가운데 함흥의 한 우물 속에서 건져낸 민간인 시체는 65구였다.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우물이 이용됐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본인들의 조선인 사냥으로 이어졌다. 당시 유언비어 때문에 희생당한 조선인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공동우물을 이용했기 때문에 오염된 우물은 한 마을을 충분히 공황상태에 빠트릴 수 있었고, 그러한 사람들의 공포를 유언비어로 만든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1927년 일본 한 마을에선 우물에 독약을 넣어 한 가족을 죽음에 빠뜨린 일이 있었으니 우물을 오염시켜 누군가를 해치는 일은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연가시>가 물에서 사는 무시무시한 질병을 다룬 것처럼,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은 꽤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혔다. 콜레라, 장티푸스, 세균성 이질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 수인성 전염병이 일어나면 당시 정부는 문제가 생긴 지역의 특정 우물을 폐쇄하면서 대처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사람들의 우물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만큼 우물이 사람들에게 필요했고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흔히 무서운 이야기에서 단골로 나오는 소재 가운데 "내가 엄마로 보이니?"를 빼놓을 수 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나를 해칠 수 있다면 그 공포는 더 크다.

사람들에게 우물은 가장 가까운 삶 터였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밥을 짓고 몸을 씻고, 빨래했다. 우물 없이는 살 수가 없었으니 우물을 못 쓰는 것만큼 불편한 건 없었다. 문제는 삶에서 무척 필요한데도, 그만큼 오염되기 쉬웠으니 그런 애증 관계가 없었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처음 상수도가 등장하기까지 우물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마실 물을 해결했다. 초창기 일부 부유층만 이용하던 상수도가 점차 대중 속으로 파고들면서 우물은 외면받기 시작한다.

마을 개량과 함께 사라진 우물, 윗세대가 남긴 역사 고스란히 담겨 있어

기원전 2000여년 전 처음 나타난 우물. 인간이 처음으로 인공적으로 물을 관리해서 먹은 게 우물이다. 사진은 창녕.
 기원전 2000여년 전 처음 나타난 우물. 인간이 처음으로 인공적으로 물을 관리해서 먹은 게 우물이다. 사진은 창녕.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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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80년대 도시에서 살면서 동네에서 우물을 보진 못했다. 그때쯤 대도시에선 이미 수도가 꽤 보급돼 있었다.
도시에서 잠깐 우물을 본 적이 있긴 하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집을 사서 이사할 때 본래 집 마당엔 우물이 있었다. 공사해서 마당을 바꾸고 집 내부를 고친 뒤 이사를 했다. 고친 뒤에 보니 우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물이 있던 자리엔 큰 철로 된 뚜껑이 씌워졌는데, 그 집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작은 농촌마을이었던 외가에서 우물을 봤다. 우물에선 이모나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빨래를 하거나 잡담을 했다. 짐을 챙겨 목욕하러 올라가는 분도 있었다.

마을 우물은 외진 곳에 있었다. 마을에서 산 쪽으로 올라가다 한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들어가면 우물이 나왔다. 주변은 나무들이 둘러싸 조용하면서도 아늑했다.

여름에 외삼촌과 함께 우물에 간 적이 있다. 뚜껑을 열고 두레박을 던져 물을 퍼올렸다. 우물 속은 짙은 어둠이었다.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외삼촌이 두레박을 던진 뒤 한참 뒤에야 '풍덩' 소리가 들리는 걸 보고 꽤 깊구나 짐작했을 뿐이다.

길어 올린 물을 대야에 담은 뒤 등물을 했다. 한 사람이 뻗쳐 자세로 엎드리면 나머지 한 명이 등에 물을 끼얹었다. 한여름 등에 물을 뿌리기만 해도 온몸이 시원해졌다. 온몸 목욕에 비해 등물은 꽤 효율적인 목욕 방식이었다. 물이 차가워 닿자마자 "읏, 차거"라고 깜짝 놀랐고 그러면 외삼촌은 짓궂게도 더 물을 뿌렸다. 몇 번 물을 뿌린 뒤엔 금세 팔에 소름이 돋았다.

당시 외가 마당엔 우물 대신 펌프가 하나 있었다. 펌프는 개량식 우물이었다. 땅을 파서 지하수를 퍼올린다는 점에선 우물과 같았으나 펌프는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뚜껑을 덮은 다음 오로지 펌프질로만 물을 퍼올리게 하였다. 주사기로 물을 퍼올리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불순물이 들어갈 여지가 줄어 비교적 물이 깨끗하다는 게 장점이었지만 펌프질을 하려면 꽤 힘이 들었고, 겨울에는 얼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고무패킹이 헐거워진다든지 부품이 망가지면 물을 퍼올리는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도시와 시골 외가를 오가면서 도시는 수도를 쓰고, 시골은 우물이나 펌프를 쓴다는 이미지가 생겼던 것 같다. 그 이미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외가에도 수도가 들어와 마을 사람들이 우물을 더이상 이용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우물을 구경하러 가는 길에는 풀이 어른 키 높이만큼 자라있고, 우물은 뚜껑이 씌워진 채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개량된 우물 형태로 펌프우물이라는 게 있었다. 주사기처럼 물을 퍼올리는 형식인데, 막힌 형태여서 비교적 깨끗하게 물을 관리할 수 있었다. 사진은 경기도 고양시.
 개량된 우물 형태로 펌프우물이라는 게 있었다. 주사기처럼 물을 퍼올리는 형식인데, 막힌 형태여서 비교적 깨끗하게 물을 관리할 수 있었다. 사진은 경기도 고양시.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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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 세월이 지났다. 콸콸 잘 나오는 수돗물에 충분히 만족을 느끼는 삶에서 우물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필요성을 못 느끼니 우물은 관심 밖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서울 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어느 골목에서 우물을 보고 신기하게 느꼈다. 본디 우물은 시골에서만 있어야 하는데, 서울에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목여행을 계속하면서 꽤 많은 도시 골목에서 우물을 봤고, 우물이 시골에만 있었던 게 아님을 알게 됐다.

그 시기 지금은 창원의 한 구가 된 마산에 내려갔다가 집 근처에 있는 우물을 봤다. 비나 눈이 들이치지 못하도록 삿갓까지 씌운 우물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었다. 분명 그 우물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은 중학교 때부터 항상 그 길을 거쳐 학교엘 갔는데 기억이 없다는 점이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알게 됐다.

한 번 우물을 보기 시작하자 도시에서 꽤 많은 우물을 찾았다. 그동안 우물이 보이지 않았던 건 골목 깊숙이 더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면서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000여 년 전 나타난 우물, 오랫동안 사람들 식수원

사람들은 오랫동안 우물에서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물은 집안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통공간이었다. 사진은 영화 '우물바닥에 비친 달빛(2008)'
 사람들은 오랫동안 우물에서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물은 집안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통공간이었다. 사진은 영화 '우물바닥에 비친 달빛(2008)'
ⓒ 우물바닥에비친달빛(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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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우물은 기원전 2000년 전에 발견된다. 이집트 누비아에서다. 무려 4000년 전에 만들어졌으니 우물의 역사는 꽤 길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오래전 우물이 나타났다. 대구 동천동에선 청동기시대 우물 네 개가 발견됐다.

이미 수도가 일반화된 요즘 우물은 낡고 고루하게만 보이지만, 오랫동안 우물은 특별했다. 우물을 만들기 위해선 깨끗한 물이 나올 만한 곳을 찾아야 했고, 찾은 뒤에는 깊게 땅을 파야 했다. 여기엔 많은 노동력과 도구가 필요했다. 한두 사람이 쉽게 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개울 근처라면 우물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겠지만, 인구가 늘면서 개울과 제법 떨어진 곳에 마을이 생겼다. 매일 한참 떨어진 개울까지 물을 뜨러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마을 우물은 반드시 필요했다.

중국의 고대 우물 가운데는 깊이가 500m에 이르는 것도 있었으니 우물이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 것인지 짐작케 한다. 우물은 만든 뒤에도 꾸준한 관리가 필요했다. 더러운 물이나 쓰레기가 스며들면 우물의 기능은 떨어진다. 벽을 둘러싼 흙이나 돌, 시멘트가 부서지면 고쳐서 오물이 스며드는 걸 막아야 했다.

국가나 마을공동체는 공동우물을 만들어 사람들이 식수로 쓰거나 빨래 등을 할 수 있게 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물은 필수였고, 물 관리는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초기 태종은 매년 가뭄이 들어 식수가 부족하자 다섯 가구마다 하나씩 공동우물을 파도록 했다. 1962년 7월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또한 우물파기 작업에 나서며 물 관리에 대한 권력자의 의지를 보여줬다. 1963년 9월 서울시는 콜레라를 막기 위해 1만 개 우물을 소독하는 약품을 배정했다.

멀리 떨어진 강에 가는 것보다 우물에 가는 게 가까웠겠지만 어쨌든 마을에 하나 있는 우물에 가는 것 또한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게 번잡스럽고 능력도 있었던 부유층들은 사설우물을 만들었다. 사설우물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살만하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깨끗한 물이 나올 만한 곳에 터를 잡고 우물을 팠다. 조선시대 왕궁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우물물을 쓸 때 일반 백성들은 냇물을 길어 써야 했다.

부족한 우물물을 많은 사람들이 나눠 써야 했으니 공동화장실을 쓰는 것만큼 불편한 일이었다. 때론 그 때문에 다툼도 벌어졌다.

"김화선의 처 강씨(41)와 동 주소 송기송의 처 김씨(37) 두 부인은 우물을 깨끗이 쓰라느니 어쩌니 하다가 싸움이 되어 김씨가 강씨의 목을 움켜쥐고 몇 번 구타한 결과 강씨는 뇌일혈을 일으켜 그 자리에 혼도되어 절명하였다." - 동아일보(1933년 9월 2일)

마을마다 우물 하나 없는 곳은 없었다. 우물엔 그 마을 사람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사진은 서울시.
 마을마다 우물 하나 없는 곳은 없었다. 우물엔 그 마을 사람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사진은 서울시.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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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우물은 늘기 시작한다. 인구가 늘었고,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가뭄에 대비하고 농업용으로 쓰기 위한 우물도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1954년 공동우물과 개인우물을 포함해 대략 8천여 개 정도였던 서울시내 우물은 1957년엔 1만3천여 개로 늘어난다. 1980년엔 개인우물만 9만 개가 넘었다. 1968년 전국에 있는 우물은 49만 개 정도나 된다.

우물은 필요했지만, 관리는 쉽지 않았다. 꽤 많은 우물은 먹기에 적당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우물물을 써야만 했던 사람들은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영국 매체인 <더 타임즈(The Times)>가 20세기 들어 인간의 수명이 35년 정도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 30년이 상수도 보급 때문이라고 분석한 것은 우물물의 위험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 우물을 파고 청소하는 과정에서 인명사고도 일어났다. 우물을 파다가 흙이 무너져 압사하는가 하면, 청소하다가 공간에 차있는 가스에 질식하는 일도 벌어졌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물에 빠지거나 우물에 있는 물고기를 잡으려다 물에 빠진 어린이도 있었다.

우물에 의존하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니 수돗물이 보급되면서 이런 일들은 점점 옛날 일이 되어갔다. 수돗물이 보급되면서 우물은 식수로 사용하는 대신 빨래나 청소 등에 쓰였고, 다시 세월이 흐르자 그마저도 사라졌다.

언젠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 국숫집에서 우물과 펌프를 봤다. 그 단순한 물건들은 나를 오래전 시골로 추억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전라북도 전주에 가선 한 카페에 있는 우물을 보며 재미있어했다. 카페 주인은 카페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부러 우물을 없애지 않았고, 그 덕분에 우물카페라며 소문이 나는 계기가 됐다.

정읍의 전봉준생가 마을에선 전봉준우물이라며 복원을 했고, 대도시에선 오래된 우물의 역사를 더듬으며 발자취를 찾고 있다. 주민들이 나서서 우물을 공원으로 지정해줄 것을 지자체에 요구하는 곳도 생겼다.

우물
 우물
ⓒ 박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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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달라지면 가치가 달라지고, 가치에 대한 성격은 계속 달라진다. 애물단지로 여기며 복개해서 주차장으로 쓰기 바빴던 도시하천을 다시 되살리고,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칭송했던 고가도로를 애물단지로 여기던 세태를 보면 그렇다. 비록 우물을 다시 식수로 쓰긴 어렵겠지만 문화 역사적 측면에서 활용 가치는 꽤 있다. 이 땅 모든 앞세대들이 우물을 이용했고,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바가지에 담은 우물물에 버드나무잎을 띄운 처녀와 사랑에 빠진 고려 창업자 왕건이나 조선 창업자 이성계를 빼더라도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예언했다는 충북 괴산의 말세우물, 오랑캐를 무찌르게 한 시흥의 높은우물 등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지금 성인세대 가운데는 우물을 기억하는 이들이 꽤 된다. 이들과 함께 우물가를 찾으면 옛 추억을 주제로 과거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같이 더운 날 으스스한 공포체험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우물도 있을 것이고.

없애긴 어려워도 복원하긴 어려우니, 남아있는 우물이 있다면 조금은 다른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우물을 만난 곳
▲고양시 향동, 행주내동 ▲나주 영산포 ▲당진 면천 안샘 ▲부산 초량동 ▲서울 시흥동 한우물, 효창동 배나무우물, 중림동 박우물, 봉원동, 흑석동 ▲인천 중구 ▲정읍 전봉준선생고택우물 ▲창원 구 마산 산호동, 자산동, 장군동 ▲창녕 영산면, 창녕읍


태그:#우물, #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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