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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군산 신진조선소에서 건조한 목선 4척 진수식 장면.
 1970년대 중반 군산 신진조선소에서 건조한 목선 4척 진수식 장면.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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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970년대 중반 군산시 금암동 째보선창 옆에 있는 신진조선소(대표 나동문)에서 건조한 어선(황진호) 진수식 사진이다. 선박 4척의 크기는 3톤~ 5톤 사이. 당시만 해도 어선은 대부분 15톤 미만으로 20톤~30톤은 대형으로 분류했다 한다.

나 대표는 "당시 한 척(5톤) 건조 비용이 5백만 원 정도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요즘 가치로 따지면 5000만~1억 원 정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작은 어선도 합성수지 섬유(FRP)로 건조하기 시작하면서 목선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어 나 대표는 "1980년대만 해도 일이 있든 없든 조선소에 배목수가 15명~20명씩 상주했는데, 합성수지 섬유가 등장하면서 목선을 건조하는 선주가 사라졌다"며 "그 많던 배목수도 전업하거나 대부분 돌아가시고, 지금은 연락하기도 어렵다"고 안타까워했다.

선체를 처음 물에 띄우는 진수식 때는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告祀)를 지냈다. 용왕님께 제물을 바치는 뱃고사(용왕제)에는 선주, 선원, 배목수, 친지는 물론 구경꾼도 함께했다. 구경꾼이 많았던 것은 고사 음식을 여럿이 나누어 먹어야 재수가 좋고, 만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11년 정월대보름 군산시 중동 용왕제 상차림과 돼지머리.
 2011년 정월대보름 군산시 중동 용왕제 상차림과 돼지머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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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제는 옛날부터 전승되어온 의례로, 군산 째보선창 선주들은 대부분 매월 초사흘마다 고사를 지냈다. 섣달그믐, 설날, 추석, 정월 대보름 등 명절에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만선을 했을 때, 배가 자주 고장 날 때, 선주나 선장 몸이 아플 때도 어부들의 불안을 덜어주는 길일을 잡아 고사를 지냈다.

잡귀를 물리치고, 만선을 기원하는 화려한 오색기(五色旗)가 눈길을 끈다. 오방(동·서·남·북·중앙), 오감(단맛·신맛·쓴맛·매운맛·짠맛), 오곡(쌀·보리·콩·조·기장) 등을 상징하는 오색기는 친척과 친지들이 어부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걸어주었다.

나 대표는 "황진호를 진수하던 시절 오색기 하나에 5000원씩 했으며, 배를 진수하거나 출어할 때 동업자(어민)들도 하나씩 걸어주었다"며 "당시 5000원은 적잖은 금액으로 개업집이나 결혼식에 축하 화환을 보내고 상가에 조화를 보내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어부들이 선왕신(船王神)으로 모셨던 명태

고사 지낼 때 빠지지 않는 게 있는데, 명태(북어)와 실타래이다. 특히 명태는 해독작용이 뛰어난 생선이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애주가들은 해장국을 즐겨 끓여 먹었으며 농약이나 연탄가스에 중독됐을 때, 독사에 물렸을 때도 명태로 독을 제거했다.

군산시 째보선창 한 음식점 벽에 걸린 마른 명태와 실타래.
 군산시 째보선창 한 음식점 벽에 걸린 마른 명태와 실타래.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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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어선을 건조할 때 길일을 택해 용골(배 밑판)과 선수를 세워 첫 고사를 지냈다. 이때 명태와 돈을 선수의 기둥에 달아 놓았다. 명태는 악귀를 쫓는 어로신(漁撈神) 역할을 했으며 고사가 끝나면 바다에 떠내려 보내거나 배를 수호하는 선왕신(船王神)으로 모셨다.

요즘은 영업용 화물차나 택시, 자가용을 새로 구입해도 돼지머리와 과일 나물 등을 준비해서 고사를 지낸단다. 명태도 실로 감아서 트렁크에 메달아 놓는다고 한다.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명태를 비닐봉지에 싸서 부적과 함께 끼어놓았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에도 군산의 째보선창가에 가면 손님이 식사하는 방의 벽에 마른 명태와 실타래를 걸어놓은 식당이 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여쭈었더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님들 건강과 영업 번창을 위해서쥬!"라고 짧게 답했다.

1970년대 이전에 건조한 것으로 보이는 안강망(중선배) 시운전 모습.
 1970년대 이전에 건조한 것으로 보이는 안강망(중선배) 시운전 모습.
ⓒ 나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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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1970년대만 해도 어선은 남자만 승선할 수 있었다. 여성은 부정 탄다고 해서 뱃일은커녕 고사 지내는 날도 떡시루를 들고 배에 오르는 것조차 금했다. 해서 용왕제를 지내는 날 음식 심부름은 어부와 구경꾼으로 참여한 동네 아이들 몫이었다.  

부자(父子)가 함께 출어하지 않기. 휘파람 불지 않기. 칼·신발 조심하기. 밥 먹을 때 생선을 뒤집어서 발라먹지 않기. 날씨 얘기하지 않기. 아무리 급해도 뛰지 않기, 선장 자리에 함부로 앉지 않기 등 선주와 어부들이 배에서 지켜야 할 금기사항도 많았다.

부자가 함께 출어를 금지한 것은 사고가 나더라도 대(자손)를 이으려는 뜻이고, 배에서 휘파람을 불면 태풍이 온다고 믿었다. 신발을 바다에 빠뜨리면 사고가 날 징조로 여겼다. 칼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왕신 등에 칼을 꽂는 행위와 다름없다 해서 불경으로 여겼다.

어부들은 밥을 먹을 때도 생선을 뒤집어서 먹지 않았다. 생선은 배 모양과 비슷한 유선형이어서 배가 뒤집어진다고 믿었기 때문. 해서 뱃사람들은 생선을 반찬으로 먹을 때 한쪽을 다 먹으면 뒤집지 않고 가시를 발라낸 뒤 남은 한쪽을 마저 먹었다.  

날씨 얘기도 금했다. 날씨 얘기는 육지의 농가도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이것저것 가리는 집에서는 농가에서도 "날씨가 좋다"는 말을 못하게 했던 것이다. 날씨가 좋다고 얘기하면 날씨가 궂을까 봐, 즉 비를 몰고 오는 마파람이나 태풍을 암시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배에서 뛰지 못하게 막은 것은 뱃동서(다른 어부)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기관실에 있는 사람은 배에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놀라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이에 나 대표는 "그런 금기사항도 197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며 "요즘엔 여성이 떡집에서 주문한 떡시루를 들고 배에 오르는 모습을 종종 본다"고 덧붙였다.

"고기잡이 왔다가 정착한 아랫녘 사람 많아"

 수리를 위해 조선소 선대에 올라있는 어선. 25톤 정도 된다고 한다.
 수리를 위해 조선소 선대에 올라있는 어선. 25톤 정도 된다고 한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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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을 사이로 충청도와 마주하고 있는 신진조선소는 1960년대까지 얼음공장(제빙공장) 수조탱크가 있던 자리로, 벌거숭이 시절 여름방학을 하면 하루가 멀다고 동네 친구들과 찾아와 얼음도 훔쳐 먹고 수영도 하던 놀이터여서 아련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선대(船臺)에 올라있는 선박(창덕호) 한 척이 병실의 환자처럼 애처롭게 다가왔다. 겉은 멀쩡하게 보이는데, 수리를 위해 선대에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형님이 운영하던 조선소를 30년 전에 물려받아 운영해오고 있는 나 대표는 "목선은 1년 남짓 되면 따개비가 달라붙어 제 속력을 낼 수 없고, 스크류, 사우드 등에 녹이 슬기 시작하며, '소'라는 물벌레가 배에 구멍을 내기 때문에 기관고장이 없어도 1년에 한두 번은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합성수지 섬유로 선박을 건조하는 요즘은 달라졌다고 한다. 보기에도 좋고 수리비도 적게 들며 수명도 길어졌기 때문이란다. 나 대표는 "한 번 선대에 올라오면 수리기간은 5~7일 정도 걸리고, 간혹 외지 배들도 수리하러 온다"며 재미난 얘기를 해주었다.

신진조선소에서 바라본 1970년대 군산 째보선창 입구. 오른쪽 합석건물이 동빈(동부수협).
 신진조선소에서 바라본 1970년대 군산 째보선창 입구. 오른쪽 합석건물이 동빈(동부수협).
ⓒ 나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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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물론 외지 배들도 이곳으로 수리하러 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부산, 통영, 거제도, 남해 등 아랫녘 어민들이 고군산군도 어장으로 조업을 왔다가 군산의 조선소에서 배도 고치고, 어획한 물고기를 상고선들과 거래도 하면서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인심도 좋으니까 아예 정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도 이제는 토박이가 되었지요.

부산 인구가 5만일 때(1930년대) 군산은 3만이었다고 하드군요. 제 친구도 아버지 고향이 부산인데 흑산도 앞바다로 조기잡이 왔다가 군산의 발전상, 미래를 내다보고 가족까지 오라고 해서 째보선창에 눌러앉아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군산이 부산보다 발전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죠. 그러나 지금은 부산은 인구가 4백만 가까운데 군산은 30만도 못 된다며 투덜댑니다. (웃음)

지역적으로 장비가 좋은 일본과 가까워서 그런지 아랫녘(남해안) 어민들 어구와 기술이 좋았어요. '못생겨서 서러운 생선'으로 유명한 대구(大口)도 군산에 정착한 아랫녘 어민들이 잡기 시작하면서 어구와 어법이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생선에 따라 그물코 치수가 다르거든요."

학창시절부터 아버지 밑에서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서 썼다는 나동문 대표는 "옛날 어부들이 사용하던 어구와 기구를 모으고 있다"며 "아버지가 60년 전에 운영하던 철공소 선반과 조선소 도구 등을 합해 어린이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도 할 수 있는 선박 모형 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다"고 말했다.

나동문 부친이 60년 전 운영하던 철공소에 있었다는 8인치 선반.
 나동문 부친이 60년 전 운영하던 철공소에 있었다는 8인치 선반.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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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뱃고사, #진수식, #신진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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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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