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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가 부평갑임에도 불구하고 인천 월미도사건의 중차대함을 인지, 특별법제정 마련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문병호 국회의원(가운데)의 발제 모습. 문 의원은 향후 한국전쟁사 관련 민간인 희생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제정에 온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사진 오른쪽 앞이 이장희 교수, 이희환 박사
 지역구가 부평갑임에도 불구하고 인천 월미도사건의 중차대함을 인지, 특별법제정 마련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문병호 국회의원(가운데)의 발제 모습. 문 의원은 향후 한국전쟁사 관련 민간인 희생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제정에 온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사진 오른쪽 앞이 이장희 교수, 이희환 박사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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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미군의 인천연안 초토화 작전인 월미도 사건은 인권 살상 외에 국가가 적법한 절차 없이 토지 주거권을 빼앗고 금전적 이득을 취한 비도덕적 야만행위다. 이에 정부는 엄중한 책임감을 갖고 희생자와 유족에게 정당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문병호 의원)

"이번 사건은 일반 전쟁희생자에 대한 사법차원의 범죄가 아니고, 소위 국제법상 전쟁범죄에 대한 국가의 헌법유린행위다. 전쟁의 3가지 평화원칙인 군사적 필요원칙, 인도주의적 원칙, 기사도 원칙에 위배되는 국제인도법 위반 범죄임을 새롭게 입증해야 한다."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천상륙작전은 월미도 원주민마을을 한국군이 사전 정찰했음에도 융단폭격을 통해 완전초토화해 단기간 상륙 목적을 달성한 반인륜적 살상행위였다. 당시 발생한 무자비한 살육과 민간인 재산권 침해에 대한 진상규명 그리고 맥아더 장군 영웅화에 가려진 월미도 학살사건의 진실을 반드시 알려야 한다" (이희환 인천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기획실장)

한국전쟁 당시 참혹한 피해를 당하며 거주지에서조차 쫓겨나야 했던 인천월미도 원주민들의 60년 한이 풀릴 수 있는 단초가 마련돼 향배가 주목된다.

민주통합당 문병호(부평갑) 의원은 생생포럼 (대표 김재홍 교수)과 공동으로 16일 오후 2시 '월미도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보상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국회의원회관 4층 제1간담회실에서 개최했다. 토론회에는 월미도귀향대책위 주민 30여 명과 박지원 원내대표, 김낙연 의원, 국방부 소속 사무관, 인천시청 공무원 등이 나와 특별법 제정에 관한 열띤 난상토론을 열었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회는 각 전문가의 월미도 사건 특별법 제정 근거와 국방부 사무관과의 실시간 질의응답 형식으로 진행됐다. 월미도 주민은 국방부 사무관의 소극적인 답변으로 공방이 가열될 때마다 거친 발언을 내뱉으며 주최 측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전시 국가의 민간재산 강탈은 당연?... 미군도 민간토지점유권 인정해 줘

날선 공방의 이유에는 '현행법으로 할 수 없기때문에', '별도의 예산투입이 어렵기에', '주거권에 대해서 등기부등본 등 법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기에' 등 미온적인 답변으로 일관한 국방부 사무관들을 향한 분노로 풀이된다.

일례로 국방부 이영호 사무관은 문병호 의원의 "전쟁 상황이 끝났음에도 국가가 민간재산을 마음대로 강탈해서 그것도 수백억 원의 토지매각대금을 편취해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원주민이 살았다는 것이) 토지대장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시에 벌어진 일이라 소급 적용하기에는 무리인 것 아닌가. 공무원이 별도로 의사 표시하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해 주민의 공분을 샀다.

한인덕 월미도귀향대책위원장. 그는 이날 근 14년간의 노숙농성 투쟁 과정을 설명하면서 내내 눈시울을 적셨다.
 한인덕 월미도귀향대책위원장. 그는 이날 근 14년간의 노숙농성 투쟁 과정을 설명하면서 내내 눈시울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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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한인덕 월미도귀향대책위 위원장은 "일제시대인 1914년 식민지토지조사사업으로 원본대장을 빼앗긴 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당시 일제가 버리고 간 땅은 3년간 점유해야 내 땅으로 인정됐는데 2년 후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며 당시의 억울한 심정을 전했다.

이어 그는 "이후 58년~63년까지 귀속처리재산법에 의거해 미군부지로 활용돼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71년 미군철수 후 한국군부대가 차지하면서 토지대장을 바꿔 국가부지로 강탈한 것"이었다고 성토했다.

한 위원장의 이런 주장은 한국전쟁사 문헌에도 그대로 나와 있다. 1914년 5월 일제는 토지조사에 의한 국유화 조치로 당시 월미도 원주민 주거지 2352평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후 1963년 만석동장과 인천시장에 의해 원주민 거주 확인과 귀향 진정을 통해 원주민 입주를 보장받았으나 군부대 점용 등의 이유로 정부가 불허 했다.

한 위원장은 덧붙여 미군 철수 당시 미2함대 재산관리과 담당자에게 월미도 원주민의 보존등기를 확인한 후 "재산 관리를 잘하라는 말까지 들었다"며 "어떻게 미군도 이렇게 챙겨줬는데 한국정부가 마음대로 토지를 빼앗고 거주지 출입을 막아 사람들을 60년간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시키느냐"며 울분을 토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와 관련 지난 2001년 8월 30일 인천시와 국방부는 월미도 원주민 옛 거주촌 부지를 일방적으로 매매계약(700억 원 편취)에 합의하며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2008년 2월 26일 과거사위원회 진실규명에 의거해 미국과의 협상 권고, 위령사업 지원, 월미도 원주민의 귀향지원, 가족관계 등록부 작성 및 정정, 공식기록 등재, 외교적 노력 확대 등이 결정됐다. 현재 귀향대책위는 월미도사건 배상, 보상 관련 소송을 진행 중이다.

57년 만에 실체가 드러난 월미도 미군폭격... 미군 고의 전쟁범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직후의 월미도 모습(1950년 9월 15일). 당시 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네이팜탄이 무차별 투하돼 월미도 전체가 화마로 뒤덮였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직후의 월미도 모습(1950년 9월 15일). 당시 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네이팜탄이 무차별 투하돼 월미도 전체가 화마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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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0일, 이른 아침에 미군 비행기가 월미산 동쪽 민간인 거주지에 네이팜탄을 떨어뜨렸고, 기총사격했어. 마을 사람들은 잠을 자다 속옷 바람으로 도피했는데 미처 피난을 못했던 사람은 불에 타 죽었지. 희생자 중에는 여자와 어린아이가 다수였고 너무 참혹했어."

"10일 날 새벽에 휘발유를 끼얹는 줄 알았어. 그게 네이팜 탄이래. 그게 떨어지고 나면 완전히 불바다가 되는 거야. 비행기가 서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가는데 우리 동네만 폭격하고 가는 거야... 그 옆에 미군부대는 놔두고. 그다음에 기총사격하고...(한숨)... 나도 그 당시 팬티바람으로 갯벌로 기어 도망갔어. 낮에 도망갔던 사람들이 꾸역꾸역 왔지, 가보니 집이 다 탔어.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가족들은 다 죽은 거야. 자는 사람들을 (미군이) 모두 몰살한 거야. 우리는 몇백 명이 죽었는지 몰라. 양놈들이 시신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렸지. 그 사람들 한 풀어줘야 해."

전쟁 당시 14살이었던 한 소녀는 어느새 백발노인이 됐다. 하지만 이 소녀는 전쟁 당시 화마 현장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비규환과 혼비백산의 살육 현장에서 살아남은 소녀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 "인민군이 주둔하지도 않았고 마을과 부대가 확연히 구분되었음에도 미군은 새벽에 아무런 사전경고 없이 민간인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증언했다.

이희환 실장은 월미도 사건이 다른 민간인 학살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쟁범죄였다고 폭로했다. 이는 당시 인천지역은 전선의 후방지대로 피난을 가지 못한 많은 민간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맥아더를 영웅시하며 인천상륙작전을 미화하는 그 내면에는 미국과 한국의 불편한 (전쟁범죄의) 진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월미도 주민 기억을 통해 복원한 마을 지도다.
▲ 월미도 원주민 거주 위치도 1950년 6월 25일 당시 월미도 주민 기억을 통해 복원한 마을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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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의 항공공격보고서(Air Attack Reports)에 따르면 폭격의 목적은 월미도 동쪽지역의 전소 또는 철저한 집중폭격으로 모든 시설을 불태우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네이팜탄으로 투하한 지역으로는 창고, 수풀 진 곳, 건물, 많은 작은 건물들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고 기총소사를 한 지역으로는 창고, 건물, 갯벌, 방파제 등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유추하면 미군은 인민군 주둔부대가 아닌 민간인 마을임을 사전에 인지했음에도 무차별 폭격을 통해 전쟁범죄인 대량소실을 자행한 것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이희환 박사는 이에 대해 "주민은 폭격 다음날 가족의 시체를 가매장한 뒤 마을을 떠났다"며 "그러나 월미도가 미군기지로 사용되고 국가가 토지를 강탈하면서 원주민들은 지금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조사보고서 확인 결과 미군(정보장교 클라크 대위 주도)은 폭격 전 월미도에 대해 치밀하게 정보 수집을 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리고 동쪽의 민간인 밀집 거주지가 있는 것을 사전에 알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이유로 법학자들은 월미도 양민 학살사건을 미군이 고의로 계획한 중대한 전쟁범죄였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태그:#월미도사건, #맥아더 , #인천상륙작전, #전쟁범죄, #국제인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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