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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에 들른 건 이른 아침이다. 이름대로 맑고 깨끗한 소쇄원을 맛보기 위해서 서두른 것이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인데 자연뿐만 아니라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세속에 찌들어 추잡하거나 더러운 정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기운이 맑고 깨끗한 그런 곳이다.
소쇄원에 들면 맑고 깨끗한 기운이 느껴진다
▲ 소쇄원 정경 소쇄원에 들면 맑고 깨끗한 기운이 느껴진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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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는 아무도 없어 다만 몇 시간이라도 소쇄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소시민이 사물화(私物化)의 욕구를 떨치지 못하고 소유의 에고이즘이 발동하였다고 따가운 눈총을 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욕구는 눈감아 줄 것으로 생각하고 서두른 것이다.

소쇄원은 길과 담이 안내한다. 길은 대숲을 가르며 나있다. 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대숲에서 들려오는 댓잎 나부끼는 소리와 계곡물소리가 귀를 맑게 한다. 오관(五官)으로 느꼈을 때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는 소쇄원인데 오관 중 청각이 제일먼저 반응한다.

소쇄원에 들면 제일 먼저 청각이 반응을 한다
▲ 소쇄원 정경 소쇄원에 들면 제일 먼저 청각이 반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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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한 대숲 길을 빠져나오면 담이 길을 나눈다. 오른쪽은 자연으로 가는 길이요, 왼쪽이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담은 안과 밖, 자연과 인공을 구분하고 더러운 것, 세속적인 것과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하여 담으로 자연과 인공, 안과 밖이 차단되지는 않는다. 담 하나를 두고 교류는 무한히 계속되어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안과 밖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간다. 소쇄원은 바로 그런 곳이다.

소쇄원은 담이 길을 안내한다
▲ 소쇄원 담 소쇄원은 담이 길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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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따라 시선을 옮기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대봉대다. 소쇄원 입구가 제일 잘 보인 곳에 자리 잡았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대봉대는 객(客)을 봉황으로 여기고 여기서 객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봉황은 벽오동에만 깃든다 하였다. 벽오동이 담에 기대어 자라고 있다.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것이 창덕궁 후원의 청의정을 보는 것 같다. 청의정이 농사의 소중함을 알리려는 것처럼 대봉대의 초가는 소쇄원은 비록 누추하지만 객을 봉황처럼 대접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잠깐이나마 봉황이 되어 본다
▲ 대봉대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잠깐이나마 봉황이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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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대를 지나면 담이 길을 안내한다. 담은 'ㄱ' 자로 꺾여 계곡을 가로질러 쉬엄쉬엄 언덕을 타고 오른다. 담은 계곡위에까지 나있고 계곡 밑에 오곡문이라는 문을 내었다. 사람을 위한 문이 아니라 물을 위한 문이다. 물이 다섯 굽이를 이룬다하여 오곡문인데 이름에 걸
맞게 물소리가 굴곡지게 들린다.

 담은 언덕을 쉬엄쉬엄 타고 오른다
▲ 소쇄원 담 담은 언덕을 쉬엄쉬엄 타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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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까지 들어온 담은 언덕에 오르기 직전에 멈추고 언덕이 시작되면 언덕을 타고 다시 오른다. 언덕과 계곡사이에는 담을 쌓지 않고 터놓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물길에는 문이 있으되, 사람이 오가는 곳에는 문이 없다. 물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물이 된다. 계곡물이 문을 만나고 계곡은 담을 만난다. 자연은 사람으로, 사람은 자연으로 전화하여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이며 자연과 인공이 만나는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물을 위한 문이다. 담과 담사이에는 문이 없다. 물의 문은 있되, 사람의 문은 없다
▲ 오곡문 물을 위한 문이다. 담과 담사이에는 문이 없다. 물의 문은 있되, 사람의 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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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이름을 갖고 있다. 대봉대와 마주하는 담은 애양단(愛陽壇)이다. 유난히 볕이 잘 드는 곳이라 붙여졌다. 외나무다리로 계류를 건너면 매대(梅臺)라 불리는 화계가 있고 화계위에 담을 둘렀다. 이 담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집 주인인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의 조촐한 집이라는 의미다.

화계를 중심으로 위쪽에 제월당과 아래에 광풍각이 있다. '비갠 하늘의 밝은 달'이라는 의미의 제월당은 주인이 머무는 생활의 공간이요, 학습의 공간으로 사적 성격이 강하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이지만 제월당에서 주인행세를 하려하니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객은 영원한 객인가 보다.

제월당 뒤편은 훤히 트여있는 반면 앞에는 담이 쌓여 있다
▲ 제월당 제월당 뒤편은 훤히 트여있는 반면 앞에는 담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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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비갠 뒤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한 바람'의 뜻인 광풍각은 객을 맞이하는 사랑방과 같은 공간이며 휴식의 공간이다. 제월당에서 광풍각에 내려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 진다. 

광풍각의 처음이름은 침계문방(沈溪文房)이었다. 계곡을 베개 삼아 서있는 글방이라는 의미인데, 해남 대흥사의 침계루를 보고 기가 막히게 붙인 이름이라 감탄한 '침계'다. 광풍각은 이름대로 계곡의 풍광을 그대로 끌어안고 서있다.

침계문방이라는 옛 이름답게 계곡을 베개 삼아 아담하게 서있다
▲ 광풍각 침계문방이라는 옛 이름답게 계곡을 베개 삼아 아담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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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계문방이라는 멋진 이름을 버리고 광풍각이라 한 것은 이 집 주인인 양산보가 송의 주돈이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주돈이를 광풍제월(光風霽月)같은 사람으로 여겨서 하나는 제월당, 다른 하나는 광풍각이라 하였다. 흔히 아들 이름을 지을 때 하나는 '대한'이고 또 하나는 '민국'으로 짓는 거와 비슷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광풍제월이라 함은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은근슬쩍 양산보 자신을 빗댄 것일 수도 있다. 광풍각은 크지도 그렇다고 왜소하지도 않다. 계곡과 정원의 규모에 맞게 꼭 있어야 할 곳에 아담하게 서있다.

사적 공간인 제월당과 휴식공간인 광풍각 영역을 담이 나누고 있다
▲ 소쇄원 담 사적 공간인 제월당과 휴식공간인 광풍각 영역을 담이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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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과 제월당은 담으로 영역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제월당 뒤에는 담이 없어 자연과 훤히 통하게 되어있으나 앞에는 담을 쌓아 광풍각 영역과 확실히 구분해 놓았다. 담 하나가 아닌 'ㄷ' 자 모양의 담을 쌓고 그 사이에 나무를 심어 여운을 남겼다. 제월당 샛문을 통하여 가려면 한 바퀴 돌아야 광풍각에 이르게 되어 있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ㄷ’ 자 모양의 담을 쌓고 그 사이에 나무를 심어 여운을 남겼다
▲ 소쇄원 담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ㄷ’ 자 모양의 담을 쌓고 그 사이에 나무를 심어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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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제월당 오른쪽에는 담이 없어 계단 길을 통해 바로 광풍각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제월당과 광풍각은 담으로 공간을 확실히 구분하고 있으나 한쪽은 담으로 차단하지 않고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여 양 공간이 끊임없이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소쇄원은 인공을 가할 곳은 과감히 가하면서도 자연을 해치고 바꾸고 도려내지 않은 채 자연을 살짝 빌려 꾸몄다. 과연 우리의 최고의 원림이라 할만하다. 소쇄원을 두 번 돌았다. 지겹지도 힘들지도 않다. 다음에 오는 객에게 소쇄원을 넘겨주고 나오려 대봉대에서 앉았다, 누웠다하며 한 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소쇄원을 다 가진 기분은 한 참 이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소쇄원, #담, #대봉대, #제월당, #광풍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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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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